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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19. 2023

아비스 가문 :마지막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열한번째

전성기에서 쇠퇴하는 모습은 바로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최고 정점에서 내려오는 시점은 서서히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전성기의 마지막은 주앙 3세 시기 이미 시작되는데 특히 왕가의 비극은 포르투갈의 쇠퇴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주앙 3세는 통치 말기가 되면서 성격이 매우 바뀌게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앙 3세는 아내인 카타리나와의 사이에서 모두 아홉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이 아이들 대부분은 영유아시절에 사망했으며 유일하게 성인으로 성장한 두 자녀들인 마리아 마누엘라와 주앙 마누엘 역시도 아버지인 주앙 3세보다 일찍 사망했습니다. 부모로 자녀들의 죽음은 매우 고통스러웠으며 이것은 주앙 3세에게 깊은 좌절감과 우울함을 느끼게 만들었으며 결국 그가 통치 말기에는 통치행위를 할수 없을 지경에 까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주앙 3세


특히 1554년 1월 주앙 3세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었던 주앙 마누엘이 사망하면서 후계자문제마저 발생합니다. 불행중 다행히도 주앙 마누엘의 아내인 후아나는 임신중이었으며 남편이 죽은지 한달도 되지 않아서 아들인 세바스티앙을 낳으며, 주앙 3세의 손자이자 유일한 후계자가 됩니다.  


주앙 마누엘, 주앙 3세의 아들이자 후계자, 그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습니다.


주앙 3세의 상태가 나빠지면서 아내인 카타리나가 포르투갈의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합니다만, 카타리나는 포르투갈을 경영할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포르투갈의 몰락을 가속화시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주앙 3세의 손자인 세바스티앙이 태어나면서 일부 사람들은 세바스티앙의 어머니인 후아나가 정치에 관여해야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고모와 조카간이기도 했던 카타리나와 후아나 사이에서 정치적 알력으로 작용하는 듯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중재자로 나선 사람이 바로 카타리나의 오빠이자 후아나의 아버지였던 황제 카를 5세였습니다. 카를 5세는 1554년 5월 딸인 후아나에게 에스파냐로 돌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의 메리 여왕과 결혼해서 잉글랜드에 가 있는 동안 에스파냐의 섭정 지위를 맡아달라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카를 5세가 여동생과 딸간의 권력 다툼이 생길 것을 막으며 또한 에스파냐에 유리한 정책을 펴던 여동생 카타리나를 돕기 위한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후아나는 이렇게 에스파냐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비록 평생 재혼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로도 돌아가지 않았고 평생 아들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아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늘 초상화로 그려서 보내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후아나가 정치적 문제로 시어머니이자 고모인 카타리나가 있는 포르투갈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추정할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후아나, 세바스티앙의 어머니, 황제 카를 5세의 딸


1557년 주앙 3세가 사망하고 왕위는 그의 손자인 세바스티앙이 국왕이 됩니다. 미성년이었던 세바스티앙이 왕위에 오르자 당연히 섭정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리고 이전부터 정치에 관여해왔으며 아이의 할머니이기도 한 카타리나 왕비가 세바스티앙의 섭정이 됩니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친 에스파냐 정책은 포르투갈내에서 인기가 없었습니다. 포르투갈 왕가에서 후계자가 점차 사라지면서, 포르투갈 왕가와 가장 가까운 친척관계로 강력한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는 에스파냐에 대해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경계하기 시작했었습니다. 특히 주앙 3세 시절 주앙 마누엘이 죽고 세바스티앙이 태어나기 직전, 며칠동안 후계자로 주앙 3세의 딸인 마리아 마누엘라와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아들인 카를로스가 포르투갈의 추정왕위게승자로 여겨졌는데 이에 대해서 포르투갈 내에서는 포르투갈이 독립 국가 지위를 상실하고 에스파냐에 편입될 것을 엄청나게 우려하기도 했을 정도였고 세바스티앙이 태어나자 포르투갈이 독립을 유지할수 있게 되었다면서 세바스티앙의 존재를 엄청나게 부각시키기까지 했었습니다.


결국 1562년 카타리나는 섭정지위에서 물러냐야했으며, 섭정으로는 주앙 3세의 살아남은 동생이자 추기경이기도 했던 엔히크가 섭정 지위에 오르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세바스티앙 이외에 포르투갈 왕가에서 유일하게 남은 적자 남성은 추기경이었던 엔히크밖에 없었으며 만약 세바스티앙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엔히크가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주앙 3세의 왕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다행히도 세바스티앙은 아무런 문제없이 무사히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만 세바스티앙은 결국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절망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매우 똑똑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완고하고 충동적 성격으로 성장했던 세바스티앙은 친정을 하면서 좋은 국왕이 될 자질을 보였습니다. 제국이나 영국 프랑스와의 외교관계를 강화했을뿐만 아니라 왕국의 여러 내정에도 관여했으며 아픈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의학에 대한 연구와 발전에 도움을 주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결혼 문제를 등한시했습니다.물론 다양한 혼담이 진행되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 혼담을 거절했는데 이 때문에 당대에는 세바스티앙이 동성연애자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었지만 아마도 그가 결혼문제를 등한시했던 것은 아마도 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증조할아버지인 마누엘 1세가 꿈꿨던 성전에 대한 꿈을 이어나가고 싶어했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바로 동방무역에 집중하기 위해서 포기했던 아프리카 지역을 다시 찾고 이들 무슬림들에게서 포르투갈의 영토를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세바스티앙, 포르투갈의 국


1578년 세바스티앙은 포르투갈을 비록한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모로코를 점령하기 위해 떠나게 됩니다. 허자먼 1578년 8월 4일  모로코 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아카세르 퀴비르 전투에서 엄청난 패배를 당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으며 탈출한 사람들은 겨우 100여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세바스티앙은 포로로 잡히거나 시신이 발견되지도 않았는데 목격자들에 따르면 적들에 중과부족이 되자 세바스티앙은 적들을 향해서 돌진한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알카세르 퀴비르 전투


세바스티앙이 실종되면서 포르투갈의 상황은 복잡하게 됩니다. 비록 국왕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렇게나 큰 패배에서 적을 향해 돌진한 국왕이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며 결국 왕위는 세바스티앙의 섭정이자 종조부이기도 했던 추기경 엔히크가 포르투갈의 국왕이 됩니다.


엔히크가 국왕이 된 것은 포르투갈의 왕가인 아비스 왕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엔히크는 성직자였기에 당연히 그때까지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물론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었기에 환속하고 결혼해서 후계자를 얻어야했습니다만 교회에서는 엔히크가 환속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교황이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비스 가문이 단절될 경우 혈연관계를 통해서 왕위계승을 요구할수 있는 사람중 한명이 바로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였기에 교황은 가톨릭의 제 1수호자로 자처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기도 한 펠리페 2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엔히크, 추기경 국왕


결국 1578년 국왕이 된 엔히크는 성직자로 남아야했고 정식으로 결혼할수 없었기에 왕위를 물려줄 적자 후손을 얻을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이렇게 되면서 포르투갈의 국왕이 누가 되어야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1580년 엔히크는 사망했고 포르투갈에서 아비스 왕가의 통치 역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엔히크가 죽을때까지 그는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포르투갈의 왕위는 이웃의 강력한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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