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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12. 2023

아비스 가문 : 전성기와 몰락의 징조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열번째

주앙 2세 시기에 시행한 해양 정책과 국내의 왕권 강화정책은 그의 후계자인 마누엘1세 통치기가 포르투갈의 전성기가 되는 바탕을 마련했습니다. 주앙 2세 시기 이미 희망봉을 발견했었기에 곧 인도 항로가 발견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습니다. 게다가 포르투갈의 최고 권력 가문이었던 브라간사 공작이나 마누엘의 형이었던 비제우 공작 그리고 왕권에 반항적이었던 에보라 주교등이 처형되었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가 역시 재산을 엄청나게 축적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앙 2세의 유일한 적자 아들이었던 아폰수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주앙 2세 시기의 마지막은 혼란한 상황이 되었으며 이전에 추진했던 정책이 모두 중지됩니다. 주앙 2세는 정부에게서 태어난 자신의 사생아 아들인 조르지를 적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를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왕가의 다른 사람들은 당연히 반대하는데 그 중심에는 주앙 2세의 아내이자 마누엘의 누나였던 비제우의 레오노르가 있었습니다. 아마 레오노르는 남편이 오빠인 디오고와 여동생의 남편이었던 브라간사 공작을 처형하고 여동생 일가를 쫓아낸 것에 불만이 없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남편이 정당한 권리를 가진 동생 마누엘의 권리를 무시하고 사생아 아들을 적자로 만들어서 왕위를 물려주려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히 반대했고, 교황에게 호소해서 동생 마누엘의 지위를 인정받도록 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마누엘 1


1495년 주앙 2세의 뒤를 이어서 포르투갈의 국왕이 된 마누엘 1세는 여러모로 성공적인 포르투갈의 국왕이었습니다. 그는 즉위한 뒤 주앙 2세 말기에 잠시 중단되었던 해양 탐사를 다시 지원했으며 이것은 바로 인도 항로의 발견과 브라질의 발견과 점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마누엘 1세는 주앙 2세 시기의 왕권강화정책을 더욱더 발전시켰으며 사법 권한이나 세금에 대해서 명문화했습니다.     


마누엘 1세 시기가 가장 성공적으로 평가받게 되는 이유중 하나는 마누엘 1세가 자신의 왕권을 기독교 신앙과 연결시켰던 것입니다. 물론 유럽의 군주들은 늘 기독교 신앙과 자신의 왕권을 결합시켰지만 마누엘 1세는 이를 더욱더 확장해서 자신이 신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라는 개념을 심어줍니다. 마누엘은 성경에 나오는 다윗왕처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인물로 자신을 묘사했으며 신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기에 당연히 기독교적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수행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누엘 1세가 생각한 기독교적 사명은 바로 무슬림에 점령당한 예루살렘을 새롭게 해방해서 새로운 기독교 지역을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그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행하기도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누엘 1세는 이를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가톨릭을 중심으로 나라를 통합했던 에스파냐와 더불어 이베리아 반도와 그 너머 유럽 지역까지 마누엘 1세의 이름이 좋게 기억되는 원인이 됩니다.      


기도하는 마누엘 1세


사실 마누엘 1세 시기가 좋게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포르투갈이 경제적으로 매우 큰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황금의 항로라고 불리는 인도항로를 개척했을뿐만 아니라 너무나 크나큰 잠재력을 가진 신대륙의 브라질을 개척한 것 역시 포르투갈에게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동방무역을 바탕으로 포르투갈은 유럽의 중요한 무역중심지중의 하나로 발전했으며 이것은 포르투갈의 경제를 크게 향상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마누엘 1세의 외교 정책 역시 포르투갈의 안정에 기여했습니다. 이미 주앙 2세 시절 이웃의 카스티야와 평화를 위해서 결혼동맹을 맺었었는데, 마누엘 1세는 이런 정책을 이어갑니다. 그는 평생 세 번 결혼했는데 세 아내 모두 카스티야의 인판타였습니다. 첫 번째 아내는 조카인 아폰수의 아내였었던 아라곤의 이사벨이었습니다. 가톨릭 공동군주의 첫 번째 딸이었던 이사벨은 남편이 죽은뒤 카스티야로 돌아갔지만, 마누엘 1세는 왕위에 오른뒤 이사벨을 자신의 아내로 맞고 싶어했고 결국 이사벨을 아내로 얻습니다. 하지만 이사벨은 첫아이를 낳다가 사망했고 아들인 미겔 다 파스 역시 오래 살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아라곤의 이사벨, 마누엘 1세의 첫번째 아내


이사벨이 죽은뒤 마누엘 1세는 다시 한번 카스티야와 동맹을 맺었으며, 이사벨의 동생이었던 마리아를 아내로 맞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아홉아이를 얻었는데 그중에는 그의 후계자가 되는 주앙 3세도 있었습니다.


마누엘 1세와 아내인 아라곤의 마리아 그리고 둘의 후손들


마리아가 죽은뒤 마누엘 1세는 다시 한번 결혼하는데, 상대는 아내의 조카였던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였습니다. 황제 카를 5세의 누나이기도 한 엘레오노르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사이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누나인 엘레오노르를 마누엘 1세와 결혼하도록 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마누엘 1세의 세번째 아내, 남편이 죽은뒤 엘레오노르의 동생인 카를 5세는 누나를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결혼시켰습니다.


하지만 마누엘 1세의 기독교 중심적 종교 정책과 에스파냐와의 동맹 강화는 포르투갈 내 종교정책을 더 경직되게 만들었습니다. 에스파냐가 성립되면서 에스파냐내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은 개종하거나 쫓겨났었습니다. 이때 포르투갈은 이들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했었지만 마누엘 1세 시기가 되면서 에스파냐의 압력으로 인해서 포르투갈 내 유대인과 무슬림에 대해서 개종하거나 추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1521년 마누엘 1세가 사망한뒤 왕위는 그의 아들인 주앙 3세가 이어받았으며 더욱더 발전시켜 포르투갈의 해외 영토를 엄청나게 늘리게 됩니다. 주앙 3세는 브라질을 개척해서 식민지로 삼았으며 또 인도 항로의 향신료 무역의 독점 체제를 확보했었습니다. 그리고 동쪽으로 더 나아가서 남아시아를 거쳐서 일본에까지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머나먼 나라였던 동아시아 지역에까지 직접 무역로를 확보했기에 포르투갈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도 했었습니다.      


주앙 3세


주앙 3세는 이제 이웃에 유일한 나라인 에스파냐와 평화를 유지하기로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인도 무역과 신대륙의 신민지를 통해서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던 포르투갈이 이웃의 막강한 에스파냐와 갈등을 빚는 것은 포르투갈에 유리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포르투갈과 평화를 유지하려했던 황제 카를 5세와의 뜻과도 맞는 것이었으며, 이들은 다시 한번 결혼을 통해서 동맹 관계를 강화합니다. 주앙 3세는 황제 카를 5세의 여동생이었던 카타리나와 결혼했으며, 황제 카를 5세 역시 주앙 3세의 여동생이었던 이사벨과 결혼했었습니다. 그리고 동맹관계를 계속 지속하기 위해서 자식들대에도 에스파냐와의 결혼동맹을 추진해서, 주앙 3세의 아들인 주앙 마누엘은 카를 5세의 딸인었던 후아나와 결혼했고, 주앙 3세의 딸인 마리아 마누엘라는 카를 5세의 후계자인 펠리페 2세와 결혼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 주앙 3세의 사촌이자 아내, 황제 카를 5세의 여동생


또한 주앙 3세는 교황와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서 포르투갈 내 교회의 최고위직을 포르투갈의 국왕이 임명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위에 자신의 동생들을 임명하므로써 동생들에게 힘을 주지만 국왕의 권력에는 영향을 주지 않게 했을뿐만 아니라 당시 포르투갈을 지배하던 사상이었던 가톨릭을 움직일수 있는 곳에 자신의 사람을 임명하면서 왕권을 더 강화할수 있게 했습니다.      


브라가의 추기경 엔히크,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3세의 동생


하지만 주앙 3세 시기 후반이 되면서 포르투갈의 전성기가 끝나갈 징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늘어나고 독점 무역로가 엄청나게 커지게 되면서 효율 역시 떨어지게 됩니다. 당시 시스템으로는 이 넓은 지역을 모두 통제하는 것을 무리였습니다. 사실 주앙 3세 통치 초기 이미 주앙 3세는 동방무역에 집중하기 위해서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쪽 영토들을 포기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마카오등에 이르는 엄청나게 넓어진 무역항로를 통제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주앙 3세는 무역로를 통제하기 위해서 장악한 포르투갈의 항구들을 경영하기 위한 행정관들을 보내서 시스템을 개혁하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이런 상황은 이후 포르투갈의 무역이 점차 쇠퇴하기 되는 원인이 됩니다.      


주앙 3세 초기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포르투갈의 문화와 사상이 발전하긴 했지만 에스파냐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종교재판소를 열었고 곧 자유로운 사상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포르투갈내 사상을 경직되게 만들었습니다.     


리스본에서 종교재판후 화형을 집행하는 모습.


주앙 3세의 치세 말기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이 후계자 문제는 에스파냐와의 동맹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결혼동맹을 맺어왔으며 그 때문에 근친혼이 심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근친혼의 가장 큰 폐해는 바로 후손들이 줄어드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문용어로 Inbreeding depression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근친교배가 지속될 경우 후손들이 줄어드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이 경향성은 새로운 형질을 가진 개체와 교배를 할 경우 사라진다고 합니다.


카스티야(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왕가의 근친혼 관계도

     

주앙 3세 역시  근친혼의 후손이었으며 그의 자녀들 역시 근친결혼을 했습니다. 그 결과 후손들이 점차 남아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포르투갈에 또 한번 위기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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