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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05. 2023

아비스 가문 : 주앙 2세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아홉번째

 1481년 아폰수 5세가 사망한뒤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은 아폰수 5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인 주앙 2세였습니다. 주앙 2세 시기는 두가지 특징으로 요약될수 있는데 먼저 이전의 해양 정책을 더욱더 확대해서 아프리카를 비롯한 더 많은 식민지 지역을 획득하는 기초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귀족 세력을 경계해서 왕권을 강화했었습니다. 


주앙 2세


주앙 2세는 아폰수 5세 시기부터 이미 국정에 관여했었습니다. 아마도 아폰수 5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인 주앙 2세가 실무를 배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카스티야계승전쟁에 집중할 수 있도록 아들에게 여러 업무를 맡겼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전쟁하던중 아들인 주앙2세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는 아폰수 5세


주앙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적극적으로 관여한 정책중 하나가 바로 해양 정책이었습니다. 아폰수 5세의 경우 이전 시대의 해양 정책을 현상 유지 정도로만 하도록 했으며 정부의 관여를 최소한으로 하게 됩니다. 이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숙부인 “항해왕자” 엔히크가 정치적으로 소외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여러 해외 정착지의 이익은 일부 상인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익은 엄청났으며 정부에서 당연히 이를 관여하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이 문제를 주앙 2세가 맡았던 것입니다. 주앙 2세는 해상 무역을 통제했으며 주앙 2세에게 자금을 줄수 있었으며 이것은 아버지가 잠시 멈췄던 해양 탐사를 통한 식민지 확장을 지원할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주앙 2세가 이웃의 강력한 나라로 거듭나고 있던 에스파냐와 식민지 경쟁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앙 2세 역시 인도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노력했었습니다. 특히 포르투갈은 대서양과 아프리카쪽의 탐험을 이미 오래도록 시행했었고 주앙 2세 시기에는 상투메에 정착해서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아프리카의 끝인 희망봉을 발견했고 이곳을 돌아서 아프리카 동부 해안으로 나갔었으며, 인도 탐험을 위한 원정대에 돈을 대주기까지 했었습니다. 이런 주앙 2세의 지원은 결국 주앙 2세가 죽고 난뒤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상투메의 지


주앙 2세 시절에 체결된 중요한 조약은 바로 1494년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직후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서 체결된 조약으로 복잡한 상황이 시작됩니다. 사실 이전에 카스티야 왕위계승전쟁에서 주앙 2세의 아버지인 아폰수 5세가 육지에서 패배했기에 왕위를 얻지 못했었습니다만, 포르투갈의 해군은 카스티야 해군을 압도했으며 결국 이 전쟁의 평화조약이었던 알카소바소 조약(1479)에서 새로 발견되는 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르투갈이 차지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왔을 때 처음에는 자신의 발견을 보고하기 위해서 주앙 2세의 궁정에 갔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돈을 대준 카스티야에서는 반발했으며, 결국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간의 갈등이 다시 시작될 수도 있었습니다. 결국 교황의 중재를 통해서 유럽 외 새롭게 발견하는 지역에 대해서 포르투갈과 카스티야가 어떤 특정한 지점을 중심으로 동쪽은 포르투갈이며 서쪽은 카스티야의 땅으로 하기로 합의를 봅니다. 아마도 이미 포르투갈은 이전부터 인도항로를 거의 개척한 상황이었으며 신대륙이 아마도 인도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도항로쪽의 지역을 포르투갈이 선택했을 듯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인도쪽의 여러 지역에 대한 권리를 확보했었으며 카스티야는 당시에는 경제성이 의심되던 신대륙 지역을 얻게 됩니다. 물론 이 경계선은 엄격한 국경선같은 개념은 아니었는데 기본적으로 이 지역에 대해서 유럽의 대부분 사람들은 가본적 조차 없는 곳이었습니다. 이 경계선의 의미는 서로의 영역을 어느정도 확인하는 정도였고, 실제로 이 경계선의 서쪽에 위치한 브라질을 포르투갈이 점령한 것에 대해서 에스파냐는 크게 반발하지 않았기에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16세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무역로, 파란색은 포르투갈 무역로이고 흰색은 에스파냐 무역로입니다. 


주앙 2세가 해양 정책을 펴는동안 국내에서는 강력한 왕권강화체제를 도입합니다. 주앙 2세의 가장 강력한 행동은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내에서 자신의 뜻대로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중앙 집권체제로 가는 핵심적 정책이었으며 귀족들은 반발이 심했습니다. 특히 아폰수 5세 시절 권력을 누렸던 왕가의 친척들이었던 브라간사 공작등은 발발이 심했으며 또한 주앙 2세 역시 이들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주앙 2세는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가 카스티야와 내통해서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형합니다. 아마 주앙 2세는 외할아버지인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에 대한 기억을 강화하면서 페드루의 적이자 페드루를 반역죄로 처형하게 만들었던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공작 페르난두 2세의 할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산시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브라간사 공작에 대한 이미지를 더욱더 추락시켰을 것입니다. 


브라간사 공작 페드루 2세


뿐만 아니라 주앙 2세는 다른 가까운 친척들 역시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사촌이자 처남이었던 비제우 공작 디오고였습니다. 그는 브라간사 공작과 함께 주앙 2세의 왕권강화에 저항하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디오고는 여동생인 레오노르가 주앙 2세의 왕비였기에 적어도 자신을 처형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만 결국 주앙 2세는 디오고를 처형하기까지 했습니다. 


주앙 2세가 강력한 왕권강화를 추진한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안정적 통치를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주앙 2세의 유일한 적자 아들인 아폰수는 말을 타고 가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유일한 후계자의 죽음에 주앙 2세는 매우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복잡한 포르투갈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주앙 2세는 자신의 사생아 아들인 조르지Jorge를 적자로 만들어서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주앙 2세의 아내인 레오노르는 크게 반발하는데 남편의 사생아 아들이아닌 남동생인 마누엘이 정당한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이웃의 가톨릭 공동 군주 역시 조르지의 왕위계승에 대해서 반대했었고 결국 주앙 2세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95년 사망했습니다.


주앙 2세


주앙 2세는 포르투갈의 모든 분야에서 전성기를 누릴 바탕을 마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실은 주앙 2세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사촌이자 처남인 마누엘 1세가 얻게 됩니다.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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