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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21. 2023

아비스 가문 : 가문의 시작- 주앙1세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일곱번째

아비스 가문의 첫 번째 국왕이었던 주앙 1세는 포르투갈의 국왕인 페드루 1세와 그의 정부였던 테레자라는 여성의 아들로 1357년 태어났습니다. 주앙 1세의 어머니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며 연대기등에 나오는 자료들은 시대에 따라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확실한 점은 테레자 로렌소가 귀족출신의 여성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테레자는 아들인 주앙이 태어난뒤 더 이상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에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페드루 1세는 주앙이 태어나자 주앙을 리스본의 믿을만한 인물에게 맡겨서 교육시키게 됩니다. 아마도 페드루 1세의 궁정에는 정식 아내가 없었기에 자신의 사생아 자녀들을 양육할만한 주체가 없어서였을 듯합니다. 주앙 1세를 맡아 키운 인물은 로렌소 마르틴스 다 프라사라는 인물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록에 따라서는 주앙 1세의 어머니인 테레자가 로렌소의 딸이라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주앙이 7살이었던 1364년 페드루 1세는 자신의 사생아 아들인 주앙에게 “아비스 기사단 단장”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아비스 기사단의 정식 명칭은 “아비스의 성 베네딕토 기사단”으로 200여년전에 생긴 종교기사단이었습니다. 1128년에 이미 포르투갈 내 종교 기사단이 존재했었는데 포르투갈의 여백작이었던 레온의 테레자가 이 기사단을 후원했었기도 했습니다. 특히 1166년 아폰수 1세는 무슬림 지역이었던 에보라를 점령한뒤 이 도시를 종교 기사단에 봉헌했으며 이 도시를 봉헌받은 기사단이 바로 아비스 기사단의 초기 형태로 처음에는 “에보라에 있는 성 마리아의 수사들”이라는 이름을 썼었다고 합니다. 이후 기사단은 아비스를 장악한뒤 베네딕토 수도회의 규율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이에 “아비스의 성 베네딕토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아비스 기사단의 별과 배지, 서양의 기사단은 기본적으로 Order라고 표시되는데 기사단의 일원에게는 기사단의 일원임을 알리는 상징인 별과 배지 휘장등이 주어집니다.


종교 기사단은 구성원들 모두가 성직자인 수도사였습니다. 그렇기에 주앙이 이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가 된다는 것은 종교 기사단의 수장인 동시에 성직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중세시대에 흔한 상황으로 아비스 기사단처럼 영지가 있는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는 그 지역의 영주가 되는 것을 의미했으며 결국 페드루는 자신의 재산이나 지위를 상속할 권리가 없는 사생아 아들인 주앙에게 앞날을 보장해준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앙이 조카인 베아트리스나 아니면 이복 형제들이었던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아들들(인판테 카스트로)들보다 힘을 얻게 된 이유중 하나가 당시 포르투갈 내 존재하던 상시 군사조직이자 이교도와의 전투를 이끌었던 아비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라는 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주앙 1세는 1385년 알쥐바로타 전투이후 포르투갈에서 국왕으로 완전히 지위를 굳히게 됩니다.하지만 주앙 1세의 지위는 확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카스티야의 정당한 왕위계승자라고 여겨지던 베아트리스와 그녀의 남편인 카스티야의 후안 1세가 있었으며 또한 주앙 1세의 이복 형들이었던 인판테 카스트로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생아인 주앙 1세보다 더 왕위계승에 대한 확실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주앙 1세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써야했는데 그중 하나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주앙 1세는 이전에 백년전쟁에서 카스티야를 지지하던 프랑스와 적국이었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었습니다. 주앙 1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더욱더 강화하기 위해서 당시 카스티야 왕위계승을 원하던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동맹을 맺게 됩니다.


랭카스터 공작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주앙 1세


여기서 잠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었던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은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에게 패배한 국왕이었던 카스티야의 페드로의 딸이었던 콘스탄사와 결혼했습니다. 페드로의 결혼문제도 복잡한데, 콘스탄사와 자매인 베아트리스는 숙부인 엔리케 2세가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잉글랜드로 피신했었으며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과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콘스탄사의 남편인 랭카스터 공작은 카스티야 왕위계승권리가 아내인 콘스탄사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카스티야의 왕위를 노리고 카스티야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사실 백년전쟁에서 이어진 전쟁으로 카스티야가 프랑스의 동맹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랭카스터 공작의 주장은 잉글랜드의 이익에 아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


주앙 1세는 랭카스터 공작과의 동맹을 맺었으며 그 확약으로 랭카스터 공작의 큰딸이었던 랭카스터의 필리파와 1387년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랭카스터의 필리파는 랭카스터 공작과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랭카스터의 블랑쉬와의 첫 번재 딸로 매우 교육을 잘 받은 인물이었으며 잉글랜드내 최고의 권력자이자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던 랭카스터 공작의 장녀로 매우 의지가 강한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주앙 1세와 결혼할 당시 필리파의 나이가 20대 후반이었으며 이 때문에 결혼하기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주앙 1세에게 아홉명의 아이를 낳아주었습니다. 주앙 1세와 필리파의 결혼이후 주앙 1세는 랭카스터 공작의 카스티야 왕위게승주장을 지지하면서 그와 함께 군사 작전을 함께했습니다만 성공적이지는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잉글랜드와의 동맹은 굳건했고, 주앙 1세 이후 포르투갈은 늘 잉글랜드의 동맹으로 남게 됩니다.


주앙 1세와 랭카스터의 필리파의 결혼


재미난 것은 랭카스터 공작의 카스티야 왕위계승주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만, 카스티야 측에서도 랭카스터 공작의 힘을 완전히 무시할수 없었기에 필리파가 주앙 1세와 결혼한 그해 랭카스터 공작과 평화조약을 체결했으며, 이 평화조약결과 1388년 랭카스터 공작과 카스티야의 콘스탄사와의 딸인 랭카스터의 캐서린을 후안 1세의 후계자인 엔리케 (후에 엔리케 3세)와 결혼시켜서 둘의 자녀는 왕위계승에 대한 완벽한 명분을 갖도록 하기로 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서 포르투갈 왕가와 카스티야 더 나아가서는 이후의 에스파냐의 왕가는 모두 랭카스터 공작의 후손이 됩니다.


랭카스터의 캐서린, 카스티야의 왕비


1390년 카스티야의 후안 1세가 사망한뒤 주앙 1세에게 대적할만한 적은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카스티야에서는 베아트리스와 그녀를 지지하는 인물들이 있었으며, 이복형이었던 드니스가 포르투갈을 침공하기는 했었지만 주앙 1세의 지위를 흔들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왕위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면서 주앙 1세는 이제 외부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는 경제적 이익과 외부 영토에 대한 확장을 위해서 아프리카쪽을 노리게 됩니다. 특히 아프리카 쪽으로 나가는 항구의 요충지였던 세우타를 점령하면서 외부 확장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합니다. 특히 주앙 1세는 교황으로부터 아프리카 쪽 항로를 개척하면서 얻는 땅들을 모두 포르투갈의 소유로 인정받을수 있게 했었으며, 또 아프리카쪽의 이슬람세력과의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을 노예로 팔수 있는 허락까지 받아냈습니다. 이것은 주앙 1세 이후 포르투갈이 활발한 해외개척을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앙 1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부분중 하나는 바로 주앙 1세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주앙 1세와 주앙 1세의 아내인 필리파는 모두 매우 훌륭한 교육을 받았었습니다. 주앙 1세는 이전에 아비스 기사단 단장이었으며 이것은 당시 교육의 중침이었던 수도회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 랭카스터의 필리파 역시 오래도록 부유한 랭카스터 공작의 궁정에서 있으면서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다양한 학문을 배웠었습니다. 이런 부부가 당연히 자녀들의 교육에 엄청나게 신경을 썼으며 둘의 자녀들 역시 모두 교양있고 학식이 풍부했었으며 이런 교육을 바탕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이를테면 주앙 1세의 아들이었던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는 당대 가장 학식이 뛰어났던 인물이라고도 알려져있었으며 또다른 아들로 “항해왕자”라는 별명의 엔히크는 과학과 지리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아프리카 지역을 탐험했고 이것은 포르투갈이 막대한 유럽 외 영토를 갖는데 큰 기여를 했었습니다.


주앙 1세의 자녀들이 묘사된 그림


또 주앙 1세는 자녀들의 결혼 역시 신경을 썼는데 포르투갈에 갓 생긴 자신의 왕조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혼담을 추진했었습니다. 아들들은 인근 이베리아 반도내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해서 아라곤이나 이베리아 반도내 왕가의 후손들과 통혼을 했었습니다만 딸인 이사벨은 부르고뉴 공작과 결혼시키게 됩니다.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선량공 필리프와 결혼시켰는데 이것은 포르투갈 왕가가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결되는 연결고리로 작용하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결혼전 정부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의 결혼도 신경썼는데 딸인 베아트리스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 잉글랜드의 귀족인 아룬델 백작과 결혼시켰었습니다. 또 아들이었던 아폰수는 당대 포르투갈 최고의 상속녀이자 주앙 1세의 최측근이었던 누노 알바레스 페레이라의 딸인 베아트리스 페레이라 데 알빙과 결혼시켰으며 아폰수에게는 브라간사 공작 칭호를 줬습니다. 훗날 아비스 왕가가 남성직계가 단절된뒤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문의 지배에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이끌었고 이후 포르투갈 왕가가 된 브라간사 가문은 바로 이 주앙 1세의 아들인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의 후손이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이사벨과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이사벨의 손녀가 바로 합스부르크가문의 부를 안겨다준 마리 드 부르고뉴로, 마리의 남편인 막시밀리안 역시 이사벨의 조카의 아들이었습니다.


주앙 1세는 태어날때는 사실 국왕이 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복잡한 정치 문제와 왕위계승문제는 결국 주앙 1세가 포르투갈의 국왕이 될 기회를 줬으며, 사람들은 주앙 1세를 포르투갈에 좋은 국왕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앙 1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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