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아라 Sep 14. 2023

1383년-1385년 포르투갈의 공위시대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 ... 여섯번째 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페르난두 1세에게는 살아남은 아들이 없었고 오직 딸인 베아트리스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페르난두 1세의 이복 남동생들 역시 있었는데 특히 페드루 1세가 왕위에 오른뒤 이녜스 데 카스트로와 자신이 정식으로 결혼했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녜스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적자로 인정했었습니다. 그렇기에 비록 적자 지위에 대해서 애매한면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페르난두 1세의 이복동생들이자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자녀들 역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특히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아들중 한명이었던 주앙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이복형인 페르난두 1세와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었으며 페르난두 1세의 궁정에서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었습니다.   


페르난두 1세

   

아마도 주앙은 왕위계승자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페르난두 1세에게 베아트리스외에 다른 자녀들이 없으면서 더욱더 그랬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왕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페르난두 1세의 딸이자 적자로 포르투갈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베아트리스와 적자 지위가 애매하긴 했지만 적자로 볼수도 있는 주앙을 결혼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적 문제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사실 주앙은 몰래 베아트리스의 이모이자 레오노르 텔레스의 언니였던 마리아 텔레스와 비밀리에 결혼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주앙은 왕위를 원했으며 조카와 결혼한다면 왕위를 얻을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앙은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들었을 때 바로 아내를 부정의 혐의로 살해해버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히 큰 문제가 되었으며, 주앙은 카스티야로 도망가게 됩니다. 페르난두 1세는 점차 이복동생들에 대해서 불만을 나타냈으며 이들의 왕위계승권리를 배제합니다. 그렇기에 왕위계승자는 페르난두 1세의 유일한 딸인 베아트리스로 점차 굳어지게 됩니다.     


인판테 주앙, 페드루 1세와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아들


페르난두 1세 치세 마지막에 외교 정책은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페르난두 1세는 잉글랜드와 동맹으로 카스티야를 공격했었습니다만 이 전쟁은 포르투갈에 불리한채 마무리 되었으며 결국 페르난두 1세는 1382년 카스티야와 평화협정을 체결합니다. 이 평화협정을 보증하기 위해서 두 나라의 왕가간의 결혼이 추진되었는데 페르난두 1세의 딸인 베아스리스 역시 카스티야의 후안 1세의 아들중 한명과 결혼하기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1383년 후안 1세의 아내가 죽자, 페르난두 1세의 아내인 레오노르 왕비와 왕비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주앙 페르난지스 앙데이로João Fernandes Andeiro는 베아트리스를 후안 1세와 결혼시키기로 하자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국왕의 이복동생들을 견제하고 베아트리스의 왕위계승권리를 더욱더 확고히하기 위해서 카스티야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양날의 칼로 카스티야가 포르투갈에 관여하거나 심지어 카스티야가 포르투갈을 합병할수 있는 빌미이기도 했었습니다. 특히 카스티야가 포르투갈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면 크게 포르투갈 내 귀족들이 크게 반발할수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카스티야의 왕비


1383년 5월 베아트리스는 카스티야의 후안 1세와 결혼해서 카스티야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해 10월 베아트리스의 아버지인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합니다. 페르난두 1세가 죽고 난뒤 그의 후계자는 베아트리스였으며,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후안 1세 역시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포르투갈을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들은 일단 카스티야에 있었으며 이 때문에 페르난두 1세의 왕비이자 베아트리스의 어머니였던 레오노르가 딸과 사위의 이름으로 섭정이 됩니다. 특히 레오노르가 섭정이 되면서 레오노르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앙데이로가 전면에 부상하게 됩니다. 그는 레오노르의 연인으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왕비와 앙데이로가 국왕이 살아있을 때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마저 파다하게 퍼져갑니다.      


레오노르 텔레스, 패르난두 1세의 왕비,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이것은 카스티야의 국왕이 포르투갈을 통치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던 많은 이들을 자극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레오노르와 앙데이로에 대해서 반대하던 인물인 아비스의 주앙을 중심으로 모이게 됩니다. 아비스의 주앙은 역시 페르루 1세의 아들로 페르난두 1세의 이복동생이긴했지만 그는 적자가 아니었기에 왕위계승권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으로 주앙은 포르투갈 내에서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레오노르와 앙데이로는 그를 이미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은 점차 더 혼란해지게 되었는데, 카스티야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여러 지역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무력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특히 레오노르와 앙데이로의 섭정에 불만이 컸던 아비스의 주앙은 이들을 몰아내기로 결심했으며 레오노르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1383년 12월 앙데이로를 죽이기에 이르게 됩니다.


     

앙데이로를 살해하는 아비스의 주앙,19세기 작품


이 사건으로 인해서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이제 포르투갈로 오게 됩니다. 그는 아내인 베아트리스의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 포르투갈의 국왕임을 선언하고 포르투갈을 통치하려합니다. 이것은 당연히 포르투갈내 사람들의 반발을 사는 것이었으며 이미 반 정부 투쟁을 하고 있던 아비스의 주앙을 중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카스티야 군과 카스티야를 지지하는 도시들을 공격합니다. 당연히 후안 1세는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려했었으며 포르투갈 곳곳에서 무력 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비스의 주앙은 카스티야에 비해서 자신들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외교적 노력을 집중합니다. 바로 잉글랜드를 끌어들어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백년전쟁이 극한의 상황으로 이르던 시기였습니다. 카스티야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동맹관계였으며 이것은 카스티야를 반대하기 위해서 아비스의 주앙이 잉글랜드를 끌어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은 여전히 카스티야 왕위예 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욱더 카스티야의 적이었던 아비스의 주앙이 곤트의 존과 협력관계를 이룰수 있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포르투갈의 주앙 1세와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 15세기 작품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후안 1세를 국왕으로 받아들이기 거부한 지역중 하나였습니다. 포르투갈의 국왕은 리스본에서 대관해야했기에 후안 1세는 리스본을 장악해야했습니다. 그래서 1384년 5월부터 리스본 포위공격을 시작합니다. 아비스의 주앙의 군대는 카스티야 군대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했고 리스본 포위공격을 풀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포위공격은 리스본 사람들뿐만 아니라 카스티야군에도 큰 피해를 입혔으며 결국 후안 1세는 1384년 9월 포위를 풀어야했습니다.     


아비스의 주앙은 이제 힘을 얻었지만, 포르투갈 내에서 카스티야의 국왕을 지지하는 도시들 역시 많았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정당한 후계자였으며,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카스티야의 후안 1세 역시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385년 잉글랜드에서 군대를 파견합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이들은 백년전쟁으로 단련된 전사들이었으며 이들은 매우 효율적으로 전투를 했기에 아비스의 주앙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카스티야의 후안 1세


주앙은 이런식으로 전투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합니다. 1385년 4월 6일 의회인 코르테스를 열었고, 코르테스는 카스티야의 후안 1세가 아니라 아비스의 주앙이 포르투갈의 국왕임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아비스의 주앙이 포르투갈을 통치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이에 크게 반발했으며 다시 한번 포르투갈에 들어와서 리스본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1385년 8월 14일 포르투갈의 중부 알쥐바로타Aljubarrota에서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1세가 이끄는 카스티야 군대와 이제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1세가 된 아비스의 주앙이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가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는 카스티야 측으로 참전한 프랑스 군과 포르투갈 측으로 참전한 잉글랜드 군 역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는 포르투갈의 대승으로 끝나게 됩니다. 카스티야인들의 시신이 작은 언덕을 이룬 것을 본 포르투갈의 주앙 1세는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카스티야 인들을 자비롭게 보내주겠다고 제안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알쥐바로타 전투


알쥐바로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아비스의 주앙은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완전히 인정받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피해가 너무 컸기에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비록 이후에도 간혹 포르투갈의 국경지방에서 무력 분쟁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포르투갈에 위협이 될만한 군사 행동을 할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아비스의 주앙이 포르투갈의 주앙 1세가 되었으며, 주앙 1세는 아비스 기사단의 단장이었고 이 때문에 주앙 1세 이후 포르투갈을 통치한 그의 남성 직계 후손들을 “아비스 가문”으로 부르게 됩니다.


알쥐바로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성모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고 있는 포르투갈의 주앙 1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이전 05화 부르고뉴 가문 : 가문의 내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