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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ug 31. 2023

부르고뉴 가문 : 국가 체제의 확립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네번째 : 상슈 2세부터 디니스까지

아폰수 2세의 아들이었던 상슈 2세는 즉위하면서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우선 그의 아버지인 아폰수 2세는 교회와의 갈등 끝에 파문당한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당연히 중세시대 파문당한 것은 큰 문제였으며 상슈 2세 역시 아버지가 파문당한 것은 그의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샹슈 2세의 문제는 그것뿐만 아니었습니다. 상슈 2세의 부모인 아폰수 2세와 카스티야의 우라카 역시 교회법상 근친 결혼으로 볼 수 있었기에 결혼무효의 요소가 되었으며 이것은 상슈 2세의 상속권리에 대한 의문으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특히 상슈 2세의 고모인 마팔다와 상슈 2세의 외삼촌이었던 엔리케 1세의 결혼이 근친 결혼으로 결혼 무효가 되었기에 상슈 2세에게는 더욱더 빌미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상슈 2세가 즉위했을 때 그는 미성년자였으며 이것은 이전의 아폰수 2세 시대의 갈등을 조정하는데 상슈 2세에게 불리한 점이었습니다.

 

상슈2세


시작부터 불안했단 상슈 2세의 통치기는 지속적으로 불안정합니다. 즉위초 상슈2세는 많은 것을 양보해야했는데 교회는 물론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던 고모들의 권리 또한 인정해야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상슈 2세가 포르투갈의 내정을 등한시 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상슈 2세는 아버지 아폰수 2세시기에 중단했던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를 재개했으며 여기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포르투갈 내정을 흔들리게 만들었으며 귀족은 물론 상인들이나 다른 계층에서도 상슈 2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았으며 또 교회와의 관계도 좋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은 기독교 세계 사람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이었습니다만, 상슈 2세의 상황은 그의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마저도 호의적 평가를 받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포르투갈 국왕의 상위군주인 교황은 상슈 2세가 포르투갈의 국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으며, 이에 포르투갈 귀족들은 상슈 2세의 동생으로 볼로뉴 여백작과 결혼해서 볼로뉴 백작이 되었던 아폰수를 국왕으로 추대합니다. 이렇게 1245년부터 상슈 2세와 아폰수 사이에서 내전이 시작되었으며 1247년말 상슈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나야했고, 다음해초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왕위는 동생인 아폰수가 이어받아서 포르투갈의 아폰수 3세가 됩니다.


아폰수 3세


아폰수 3세는 1238년 볼로뉴의 여백작 마틸다와 결혼해서 볼로뉴 백작이 되었습니다만 포르투갈의 왕위를 잇기 위해서 1248년 볼로뉴 백작 지위를 포기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폰수 3세는 아마 아내인 볼로뉴의 마틸다와 갈등을 빚었으며 부부는 거의 멀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폰수 3세는 포르투갈의 국왕이 된 뒤 정치적 목적은 물론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카스티야 국왕의 딸과 결혼합니다.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사이에서는 영토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폰수 3세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의 딸과 결혼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전 아내인 볼로뉴의 마틸다와 정식으로 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강행했기에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마틸다는 이 결혼에 대해서 교황에게 호소했으며 교황은 아폰수3세가 잘못했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만 이 직후 마틸다가 사망하면서 아폰수 3세에게는 다행히도 상황은 흐지부지 되었다고 합니다. 

    

볼로뉴의 마틸다(왼쪽)과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오른쪽)



아폰수 3세는 형인 상슈 2세가 포르투갈의 내전을 등한시했기에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는 포르투갈의 내정에 매우 신경을 쓰게 됩니다. 특히 귀족과 성직자 뿐만 아니라 상인등 다른 계급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의회cortes를 열었고 이들 모두가 국정에 참여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아폰수 3세는 포르투갈의 내부 조직들을 개편해나가면서, 역시나 교회와 마찰을 피할수 없게 됩니다. 특히 아폰수 3세는 아버지 아폰수 2세처럼 교회의 특권을 뺏으려했는데 성직자들이 범죄 혐의가 있을 때 고위성직자의 허가 없이 체포한다던가 교회에 세금을 부여한다던가하는 일을 하려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당연히 교회는 반발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7년 아폰수 3세를 파문하고 포르투갈 왕국에서 성무를 금지하게 됩니다. 아폰수 3세는 아버지 아폰수 2세와 같은 상황에 처했는데 그 역시 아버지처럼 죽어가면서 10대의 아들인 디니스가 왕위에 오르면 어려움을 겪을 것을 예상했고 교회와 화해를 시도했고 1279년 사망한 뒤 파문을 풀수 있었습니다.



아폰수 3세의 장남인 디니스는 즉위했을 때 10대 후반이었으며 아버지가 파문당한 상태였기에 이미 시작부터 어려움에 직면해있었습니다. 하지만 디니스는 이미 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인 아폰수 3세가 국정에 참여하도록 했었으며 왕위에 올랐을 때는 국정을 운용하는데 이미 익숙해져있었습니다. 디니스는 먼저 교회와의 화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아버지의 파문을 해제하기 위해서 교회와 협상을 진행했고 교회의 이익을 보호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즉위직후 어려움에 직면하는데 바로 동생인 아폰수가 왕위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디니스는 동생인 아폰수에게 후하게 대해줬는데 아버지가 줬었던 특권을 그대로 인정해줬었습니다. 하지만 아폰수는 포르투갈 왕위는 자신 잇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디니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인 아폰수 3세는 전처인 볼로뉴의 마틸다와의 결혼이 해소되기 전이었고 이럴 경우 적자 신분이 애매해지기 때문에 아폰수는 형이 사생아로 왕위계승권리가 없다고 생각했었고 결국 형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물론 디니스는 이 반란을 금방 진압했고 아폰수는 이웃나라인 카스티야로 도망갔습니다. 디니스는 어머니와도 마찰을 빚는데 디니스는 왕위에 올랐을 때 10대 후반이었지만 이미 성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는 아들의 섭정으로 국정을 이끌어나가려했으며 당연히 디니스는 이에 반발했습니다. 결국 베아트리스는 고향인 카스티야로 돌아갔고 디니스는 국왕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디니스


디니스는 이웃의 레온이나 카스티야와의 관계를 어느정도 평온하게 유지합니다. 포르투갈은 독립한 이래로 이 두 나라와 늘 마찰을 빚어왔었으며 디니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디니스는 전쟁보다 외교적 관계를 잘 이용했는데, 이를테면 카스티야와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 과감하게 영지를 포기하기도 했었습니다. 영지를 포기하는 것은 큰 문제이긴 했지만 그 결곽 그의 통치기 내내 카스티야와 평화를 유지하게 됩니다. 또 디니스는 아라곤의 공주였던 인판타 이사벨과 결혼을 하면서 아라곤과의 우호를 유지했습니다. 이사벨과의 결혼은 매우 성공적이었는데 아름답고 지적이었으며 신앙심이 깊었고 후에 시성되는 이사벨의 개인적 성품은 물론, 아라곤 왕가 출신이자 더불어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후손이기도 한 이사벨과의 결혼은 디니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아라곤의 이사벨, 성 이사벨


대외적인 성공과 더불어 디니스는 내정에서도 매우 힘을 얻었습니다. 이전에 동생이나 어머니와의 마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자신을 반대하는 귀족들 상당수를 숙청할수 있었으며 또한 권력을 자신을 중심으로 재편할수 있었습니다. 또한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교회의 특권을 제한하려는 법률 역시 마련합니다. 하지만 디니스의 시기는 이전의 시기와는 달랐고 교황 이를 바탕으로 디니스는 이전보다 더 훨씬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를 통치할수 있게 됩니다. 


디니스의 통치기 내부의 안정과 외부의 평화를 누리면서 포르투갈은 더욱더 발전합니다. 특히 디니스는 포르투갈의 발전에 매우 집중했는데 농업발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에 “농부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또 강력한 왕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포르투갈 전역을 쉬지않고 여행하면서 수도는 물론 지방 구석구석까지 왕권이 미칠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포르투갈의 문화적 발전도 이루어지게 되는데 디니스 과학과 예술등에 관심이 많았기에 과학이나 문학에 대한 글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거나 쓰도록 했었으며, 스스로도 여러편의 시를 썼고 현재도 이 시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디니스는 17살에 즉위해서 63살에 죽을때까지 40년 넘게 포르투갈을 통치했습니다. 디니스의 오랜 통치기간동안 포르투갈은 평화와 번영을 누렸으며 이 시기를 통해 완전한 국가 체제를 확립하면서 이제 비상할수 있는 바탕을 마련합니다.


동 디니스, 포르투갈의 국왕, 18세기 작품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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