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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07. 2023

부르고뉴 가문 : 가문의 내분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다섯번째 

디니스의 통치 말기는 이전의 태평했던 시기와는 조금 다른 시기로 흘러가게 됩니다. 왜냐면 디니스의 후계자였던 아폰수와 디니스가 갈등을 빚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니스에게는 아내인 아라곤의 이사벨 사이에서 딸인 콘스탄사와 아들인 아폰수 둘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들을 얻었으며, 디니스는 이렇게 태어난 자녀들 역시 매우 아꼈었습니다. 특히 이렇게 태어난 사생아 자녀들을 아내인 왕비에게 키우도록 강요했고, 늘 선량하고 순종적이었다고 알려진 이사벨 왕비는 남편의 사생아 자녀들을 받아들여서 왕궁에서 키웠었습니다. 


아라곤의 이사벨, 포르투갈의 왕비, 포르투갈의 성 이사벨, 자비로운 여성이었던 이사벨은 "장미의기적"으로 유명했고 16섹기 시성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디니스는 자신의 적자 아들인 아폰수보다 사생아 아들이었던 아폰수 상셰스를 더 좋아합니다. 사실 아폰수는 행정가이자 문학과 예술을 선호했던 디니스와는 달리 다른 선조들처럼 전사기질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렇기에 디니스가 아폰수보다 아마도 문학등에 재능이 있어서 자신을 더 닮았다고 생각했을 아폰수 상세스를 더 좋아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디니스는 점차 더 아폰수 상셰스를 적자로 인정해서 왕국의 계승권리를 부여했으며 심지어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주려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디니스


이런 상황은 당연히 적자이자 왕국의 계승권리를 가지고 있던 아폰수가 견딜수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부자간에 내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전은 누군가 하나가 큰 힘을 가지고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1324년 디니스의 아내이자 아폰수의 어머니인 이사벨 왕비가 중재를 해서 부자간에 화해를 하게 됩니다. 


부자간의 전쟁을 말리는 이사벨 왕비


1325년 디니스는 사망했으며 포르투갈의 왕위는 아폰수가 이어받아서 아폰수 4세가 됩니다. 아폰수 4세가 즉위하자마자 한 일이 바로 자신의 경쟁자였던 아폰수 상셰스를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폰수 상셰스는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뒤 카스티야로 갔으며 포르투갈과 경쟁관계였던 카스티야는 아폰수 상셰스가 포르투갈의 국왕에게 도전할수 있게 지원을 해줬습니다. 이들은 몇 번 포르투갈을 침공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아폰수 4세의 어머니이자 역시 아폰수 상셰스를 길렀던 이사벨 왕비의 중재로 화해하게 됩니다.


아폰수 4세


디니스 통치기 말기에 내전이 문제가 되었다면 아폰수 4세의 통치기는 카스티야와의 복잡한 통혼관계를 통한 외교적 문제가 포르투갈 내에서 영향을 미쳤습니다. 포르투갈과 카스티야는 이웃나라로 늘 마찰을 빚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통혼을 자주했었습니다. 아폰수 4세 역시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와 결혼했고, 아폰수 4세의 누나인 콘스탄사는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의 오빠인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4세와 결혼했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간의 이익이 달린 일에서 결혼으로 친척관계가 된다고 해서 갈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고 이런 관계는 다시 한번 결혼으로 관계를 강화하려합니다.  아폰수 4세는 자신의 딸인 마리아를 조카이기도 했던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와 결혼을 시킵니다. 재미난 사실은 한 세기전에 이렇게 결혼했을 때는 교회에 의해서 결혼무효가 되어서 강제로 헤어져야했지만 이때는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마리아, 카스티야의 왕비


마리아와 알폰소 11세의 결혼은 포르투갈의 정치상황을 폭풍우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원인이 됩니다.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는 포르투갈의 마리아와 결혼하기 위해 이전의 아내였던 빌렌나의 콘스탄사 마누엘과 이혼을 했었는데 이혼과정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내전을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알폰소 11세는 마리아와 결혼한 뒤 마리아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정부인 레오노르 데 구스만과 함께 살았습니다. 레오노르 데 구스만은 왕비인 마리아보다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고 이것은 마리아는 물론 마리아의 아버지인 아폰수 4세도 모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그는 알폰소 11세에 적대적이었던 빌렌나 공과 협력관계가 되었으며 빌렌나공의 딸이자 알폰소 11세의 전 약혼녀였던 콘스탄사 마누엘을 아들인 페드루와 결혼시켰습니다. 


여기까지는 이베리아 반도의 흔한 정략결혼형태였습니다만, 문제가 페드루가 아내의 시녀인 이녜스 데 카스트로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페드루의 아내인 콘스탄사 마누엘은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이후 페드루는 아버지가 원하는 재혼을 거부하고 이녜스 데 카스트로와 대놓고 함께 살았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형제들이 페드루와 친해지면서 카스티야의 내부문제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늙은 아폰수 4세는 적자 손자인 페르난두가 병약한 반면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자녀들은 매우 건강해서 결국 포르투갈이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자녀들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카스티야와의 복잡한 정치 관계가 더 복잡해질 것이기에 이녜스 데 카스르로를 살해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페드루와 이녜스, 19세기말또는 20세기 작품


이 상황은 페르루가 아버지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게다가 이전에 아폰수 4세와의 관계가 좋았지만 이제 관계가 소홀해진 북부 귀족들 역시 페드루를 지원해주게 됩니다. 또한 이때는 유럽에 흑사병이 막 지나간 시기였고 포르투갈 역시 큰 피해를 입은 뒤 였습니다. 아마도 이런 불안한 상황은 페르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된 원인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1357년 아폰수 4세와 페드루는 화해를 했으며 화해직후 아폰수 4세는 사망하고 아들인 페드루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페드루는 국왕이 된 뒤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형했었습니다. 하지만 페드루는 아버지보다 귀족들과 더 잘 지냈었으며 또한 아버지보다 훨씬 다른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덕분에 내전 없이 포르투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수 있었으며 그가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페드루는 총애하는 귀족들에게 영지와 작위를 부여했으며 이녜스 데 카스트로와의 자녀들은 물론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형제들에게도 역시 많은 부와 권력을 부여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또다른 사생아 아들인 주앙에게도 아비스 기사단 단장지위를 부여해주면서 그에게도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이렇게 페드루에게서 권력을 받은 이들은 페드루의 후계자인 페르난두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포르투갈의 페드루 1세, 17세기


1367년 페드루가 사망한뒤 왕위는 페드루의 적자 아들이자 장남인 페르난두가 이어받아서 페르난두 1세가 됩니다. 페르난두 1세는 이전의 아버지 시절의 권력자들과 유대가 컸으며 이들은 더욱더 권력을 강화합니다. 페르난두 1세는 이시기 카스티야의 내전상황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당시 카스티야는 내전상황으로 페르난두 1세의 사촌이었던 카스티야의 페드로와 알폰소 11세와 레오노르 데 구스만의 아들이었던 엔리케가 왕위를 두고 내전을 벌였고 엔리케가 페드로에 승리를 거두고 카스티야의 국왕 엔리케 2세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엔리케는 알폰소 11세의 사생아 아들이었으며 왕위계승의 명분이 약했었습니다. 이에 할머니가 카스티야의 인판타로 역시나 카스티야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던 페르난두 1세는 이에 자극을 받습니다. 게다가 사실 카스티야 내전은  백전 전쟁이 시작된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대리전 같은 분위기였기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엔리케 2세에 대해서 당연히 잉글랜드 측에서는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통해서 카스티야를 공격하는데 일조하려했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카스티야의 갈등은 랭카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위를 원하게 되면서 끝나게 됩니다. 페르난두 1세는 카스티야와 평화협정을 체결했으며 자신의 유일한 적자인 베아트리스를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1세와 결혼시켰으며, 이것은 페르난두 1세가 죽은뒤 후안 1세가 아내인 베아트리스의 권리를 통해서 포르투갈을 통치할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페르난두 1세


1383년 페르난두 1세는 남성후계자 없이 사망합니다. 카스티야의 후안 1세는 페르난두 1세의 적자 딸과 결혼한 자신이 자연스럽게 포르투갈의 왕위를 이어받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250여년전 독립한 이래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웃의 카스티야와 계속해서 싸워왔는데 이런 카스티야의 국왕을 자신들의 국왕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포르투갈 부르고뉴 왕가의 가계도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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