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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Aug 24. 2023

부르고뉴 가문 : 포르투갈의 건국 그리고 내정 정비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 : 세번째-아폰수1세에서 아폰수2세까지

1128년 어머니인 레온의 테레자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포르투갈 백작령에 대한 통치권을 장악한 아폰수 엔히크는 이제 포르투갈을 독립적 국가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아폰수의 어머니인 테레자 시절의 독립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상위군주인 레온과 카스티야의 군주였던 우라카가 테레자의 포르투갈 백작령을 뺏을만큼 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포르투갈에서 아폰수가 권력을 이어받은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은 우라카의 아들이자 아폰수의 사촌이었던 알폰소 7세였습니다. 그리고 알폰소 7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아폰수였습니다. 아마도 알폰소 7세의 아들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폰수 엔히크는 포르투갈 백작일 뿐만 아니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폰수는 사촌에게 후계자가 없을때는 포르투갈의 독립에 대해서 적극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포르투갈은 물론 레온과 카스티야를 이어받을수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알폰소 7세에게 후계자들이 태어나면서 이제 아폰수는 다시 독립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알폰소 7세 역시 상위군주로 아폰수의 포르투갈 백작령을 바로 뺏을 만한 압도적인 군사적 힘이 없었기에 아폰수는 더욱더 독립을 생각할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폰수 1


아폰수는 독립을 원했고 그만한 군사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레온과의 직접적 전투보다는 주변의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를 선택합니다. 아폰수가 먼저 이슬람 세력을 공격했던 이유는 당대 상황과 맞물려있었기 때문일 듯합니다. 포르투갈이 독립을 시도할 무렵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뒤였고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에서는 무슬림에 대항해서 기독교 세력을 보호하는 최전선의 나라들에 호의적이었습니다. 아마도 아폰수는 영지를 넓히는 목적 외에도 포르투갈의 독립을 위해서 명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그 명분을 쌓기 위해서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1139년 7월 코르도바의 총독이 이끄는 무슬림 군대와 아폰수가 이끄는 포르투갈 군대가 맞붙게 됩니다. 오우리크Ourique 전투에서 아폰수는 승리를 거뒀고, 이슬람세력을 물리진 아폰수는 이제 독립적인 국왕이 될 명분을 얻었으며 결국 포르투갈의 국왕 아폰수 1세가 됩니다.


오우리케 전투, 전설에 따르면 아폰수 1세는 전쟁때 승리의 징표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봤다고 합니다.


물론 이 상황을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7세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으며 결국 아폰수 1세와 알폰소 7세의 군대는 서로 맞붙게 됩니다. 1140년이나 1141년경 일어난 발데베스 전투였습니다. 여기서 아폰수 1세가 승리를 거뒀으며 이 전쟁 이후 알폰소 7세는 1143년 사모라 조약을 통해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아폰수 1세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군사활동을 했는데 특히 기독교 세계 내에서 독립한 포르투갈의 위상을 높이 세울수 있는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를 주로 했습니다. 이런 활동중 하나가 1147년 리스본 함락이었습니다. 현재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이때도 대도시였으며 당시에는 이슬람 세력하에 있던 지역이었습니다만 포르투갈이 건국되던 시기에 이렇게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또 이 리스본 함락은  2차 십자군전쟁중 기독교 세력에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런 활동이 더해져서 결국  1179년 교황은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을 독립 국가로 인정해주기에 이릅니다. 


리스본 공성전, 19세기작품


아폰수 1세는 포르투갈을 독립된 왕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군사적 활동은 물론 외교적 활동도 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보이의 마팔다(마팔다 디 사보이아)와 결혼한것이었습니다. 아폰수가 사보이 백작의 딸과 결혼한 것은 마틸다의 고모가 프랑스 왕비였고 마틸다의 사촌이 프랑스의 국왕 루이 7세였기 때문일듯합니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 내 왕가는 모두 아폰수 1세와 혈연관계로 교회에서 정의한 “근친결혼”범위에 들어갔기에 이것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수 있었으며 또 막 독립한 포르투갈에 다시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가가 관여할 것을 두려워했던 점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폰수 1세는 레온과의 평화를 위해서 딸인 우라카를레온의 국왕 페르난도 2세와 결혼시켰고 우라카는 후계자가 될 아들까지 낳았었지만 교회에서 친족관계임을 들어서 결혼무효를 선언했고 우라카는 남편과 헤어져 포르투갈로 돌아와야했었습니다.


마팔다 데 사보이아, 아폰수 1세의 왕비


비록 1160년대 이후 아폰수 1세는 레온과의 전쟁에서 패배해서 레온의 국왕에게 사로잡혀서 몸값으로 독립하면서 장악했던 갈리시아지방을 레온에게 넘겨줘야하기도 했었습니다만, 1185년 아폰수 1세가 죽었을 때 포르투갈은 확고한 독립국가였습니다. 그리고 아폰수 1세의 뒤는 아폰수 1세의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었던 상슈Sancho가 이어받게 됩니다. 


상슈 1세는 사실 처음에 태어났을때는 슈라는 이베리아식 이름이 아닌 마르치노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었습니다. 왜냐면 그생일이 투르의 성 마르티노의 축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중세시대 이런식으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흔했었으며 그의 위로 형이 있었기에 아마도 정치적으로 이베리아식 이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듯합니다. 하지만  그의 형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던 아폰수 엔히크가 사망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왕위계승자가 되었으며 이후 아마도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더 친숙한 이름인 상슈라는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일듯합니다.  


상슈 1세


상슈1세는 아버지인 아폰수 1세가 전투중 부상으로 인해서 통치 행위가 불가능해지면서 아버지의 섭정으로 일하면서 통치를 시작합니다. 그는 누나였던 테레자와 함께 섭정으로 일을했었는데 아폰수 1세는 테레자에 의지를 많이 했으며 결국 테레자에게 상슈와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상슈에게는 득이 될수도 해가 될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로 확고한 왕위계승자였는데 이제 누나가 경쟁자가 될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슈와 테레자는 경쟁보다는 좀 더 협력관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여전히 이웃나라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으며 군사적 활동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갓 세워진 포르투갈의 내정 역시 정비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 두가지중 상슈는 군사활동에 집중하고 테레자는 내정을 집중하면서 둘은 경쟁이 아닌 협력적인 관계로 나가압니다. 이후 테레자는 상슈가 국왕이 되기전 외국으로 시집갔고 1185년 상슈가 국왕이 되었을때는 그와 경쟁할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상슈는 국왕이 된 뒤 군사활동과 내정을 정비해야했습니다. 상슈 1세 역시 북쪽의 레온과의 다툼보다는 남쪽의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를 더 집중했으며 역시나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내정 역시 안정적으로 개편되었는데 이슬람 세력과의 승리를 바탕으로 영지를 넓혔고 이런 영지를 안정적으로 경영하기 위해서 상업등을 장려했고 이것은 포르투갈의 부에 기여하게 됩니다. 


포르투갈의 테레자, 플랑드르 백작부인, 아폰수 1세의 딸


1211년 상슈 1세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은 장남인 아폰수 2세였습니다.  아폰수 2세가 즉위했을때 그는  아버지나 할아버지와는 다른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아폰수 2세는 평생 병으로 고통받았고 병약했기에 군사적 활동을 할 수가 없었고 이것은 그가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강력한 군사활동을 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아폰수 2세는 내정에 좀 더 집중하게 됩니다만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달리 내정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폰수 2세


아폰수 2세가 왕위에 올랐을때, 사슈 1세는 이전의 전통에 따라서 딸들에게도 영지와 재산을 분할해줬으며 이것은 딸들이 아들인 아폰수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원인이 됩니다. 결국 아폰수 2세의 누이들과 이 누이들을 지지하는 귀족들은 아폰수 2세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요구하는데 아폰수 2세는 이들 받아들일수 없었습니다. 만약 이들의 권리를 인정한다면 왕권은 약화될 것이고 심지어 포르투갈은 여러개의 지방으로 분리될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폰수 2세는 즉위초부터 누이들과 누이들을 지지하는 귀족들과 내전을 해야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상샤, 상슈 1세의 딸이자 아폰수 2세의 누이, 그녀와 자매들은 아폰수 2세와 유산으로 받은 영지에 대한 권리를 두고 전쟁을 했었습니다. 


게다가 이전 국왕들은 포르투갈을 독립적 국가로 인정받기 위해서 교회나 협력한 귀족들에게 많은 특권을 줬었으며 이것은 아폰수 2세가 왕위에 오른뒤 부정적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아폰수 2세는 누이들은 물론 특권을 내놓지 않으려는 귀족들이나 힘이 너무 커진 교회와도 갈등을 빚었습니다. 특히 아폰수 2세는 교회에 세금을 물리길 원했으며 이런 재정적 문제에 대해서 교회도 양보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아폰수 2세가 파문당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건강이 늘 좋지 않았던 아폰수 2세는 이때 죽어가고 있었으며 파문당한채 죽는 것이 그의 영혼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아폰수 2세의 아들들 모두가 미성년이었기에 더욱더 문제가 될 것이었습니다. 아폰수 2세는 결국 교회와 화해하려 했습니다만, 파문이 철회되기전인 1223년 사망합니다. 


아폰수 2세의 아들인 상슈 2세는 14살의 미성년으로 국왕이 되었습니다만, 아버지가 떠안았던 수많은 문제들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그의 치세는 더욱더 혼란하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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