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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Sep 28. 2023

아비스 가문 :  두아르테와 아폰수 5세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여덟번째

 1433년 주앙 1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명성은 엄청나게 올라가 있었으며 주앙 1세가 적자가 아니기에 포르투갈의 국왕이 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극 소수였습니다. 특히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기독교 세력이 기념할만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주앙 1세의 아들이었던 두아르테가 즉위했을 때 아비스 가문의 통치는 확고해보였습니다.      


주앙 1세의 아들인 두아르테는 즉위했을 때 30대후반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전투에 참가했었으며 또 국정을 배웠었습니다. 이것은 두아르테가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기본 바탕이 되었습니다. 두아르테는 포르투갈 내정에 대해서 열성적이었는데 특히 포르투갈의 중앙 집권화에 집중을 합니다. 두아르테는 국왕을 제외한 귀족들이 봉건영주로 하위 영주를 임명하는 것을 막았고 오직 국왕만이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왕실 영지에 대한 상속권리를 장자상속제도로 바꾸고 여성이나 방계 친척들의 상속을 막았습니다. 이것은 국왕의 형제들이 영지를 상속받더라도 남성후계자가 없는 경우에는 그 영지가 왕실로 되돌아오는 효과를 낳았으며 포르투갈의 왕권을 강화하는 일이기도 했었습니다.      


두아르테, 그의 이름은 증조할아버지 중 한명인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이름을 딴것입니다.


두아르테는 이렇게 내정에는 왕권강화를 위한 효과적 정책을 폈습니다만 대외정책은 짧은 그의 치세에 오점으로 남게 됩니다. 두아르테는 역시 아버지의 대외정책을 이어받아서 여전히 엔히크를 지원해서 아프리카 탐럼을 하게 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만 곧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우타를 점령한 것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효과가 떨어졌습니다. 세우타를 이용하던 무슬림 낙타상인들이 기독교도들이 점령한 세우타가 아닌 인근의 탕헤르를 이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인판테 엔히크와 페르난두는 형인 두아르테를 설득해서 탕헤르를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두아르테의 형제들은 의견이 나뉘게 됩니다. 동생들중 인판테 페드루와 주앙은 이 공격을 반대합니다. 결국 엔히크와 페르난두는 탕헤르를 공격합니다만 공격을 실패했으며 포르투갈 군은 패배했습니다. 엔히크는 포르투갈군이 무사히 떠나는 대신 세우타를 넘기겠다고 약속했으며 이 약속의 증표로 동생인 인판테 페르난두가 인질로 남게 됩니다.      


두아르테의 형제와 후손들이 그려진 판넬 그림, 이걸 의뢰한 인물은 두아르테의 동생인 엔히크라고 알려져있습니다.


포르투갈군이 돌아왔을 때 다시 형제인 페드루와 주앙은 페르난두의 석방을 위해서 세우타를 넘겨줘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엔히크는 조약을 어기고 다른 방법을 찾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두아르테는 결정을 내릴수 없었으며 코르테스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세우타를 주는 것을 거부합니다. 결국 인판테 페르난두는 1443년까지 인질생활을 하다가 사망합니다. 두아르테는 코르테스가 열린 얼마뒤인 1438년 병으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왕위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이었던 아들 아폰수가 이어받게 됩니다.     


두아르테의 아들이었던 아폰수 5세가 즉위할 당시 포르투갈은 내정에서 혼란한 상황이 됩니다. 두아르테는 죽기전 아들의 섭정으로 아내인 아라곤의 레오노르를 선택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포르투갈에서는 의견이 나뉘는데 국왕의 뜻을 존중해서 왕비를 섭정으로 내세워야한다는 쪽과 외국인인 왕비가 포르투갈의 내정에 관여할 것을 우려하게 됩니다. 특히 레오노르는 아라곤의 국왕의 딸이었지만 사실 카스티야 국왕의 손녀였습니다. 게다가 레오노르의 형제 자매들은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물론 나바라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나라의 통치자나 통치자의 배우자가 되었으며 이들은 전 이베리아 반도를 자신의 가문의 손아래 넣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아마도 안그래도 카스티야와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포르투갈에서 레오노르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코르테스가 열린뒤 레오노르 뿐만 아니라 국왕의 동생이었던 코임브라 공작 인판테 페드루가 레오노르와 공동 섭정으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공동섭정은 실패했었으며 레오노르는 페드루에 반기를 들었지만 실패했고 추방되어서 친정인 카스티야로 가야했다고 합니다.      

아라곤의 레오노르, 아폰수 5세의 어머니



인판테 페드루는 섭정이 된 뒤 이복형이자 레오노르를 지지했던 아폰수를 회유를 했었습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보였고, 아폰수는 이복동생 페드루에게서 브라간사 공작 지위를 받는것으로 마무리 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권력을 장악한 쪽은 페드루였으며 아폰수는 이에 대해서 불만이 점차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아폰수는 자라면서 숙부가 섭정으로 권한을 휘두르는 것에 점점 더 불만을 품고 있던 국왕 아폰수 5세에 접근했고 아폰수 5세와 브라간사 공작은 점차 더 페드루를 경계합니다.     



아폰수 5세가 친정을 시작하게 되면서 페드루의 권력은 약해졌으며, 브라간사 공작의 국왕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해집니다. 아폰수는 장인이자 숙부였던 페드루에 대해서 경계했으며 그의 정책을 무효하면서 그와 대립하게 됩니다. 결국 아폰수 5세는 인판테 페드루를 반역자로 몰았으며 페두르와 아폰수 5세는 내전에 이르게 됩니다.결국 인판테 페드루는 전쟁중 사망하고 아폰수 5세가 승리를 했으며 인판테 페드루의 아들들인 사촌들을 모두 추방했었습니다. 이후 아폰수 5세는 시간이 지난뒤 인판테 페드루를 복권시키긴 했었지만, 아폰수 5세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이간질을 했던 브라간사 공작은 평생 권력을 누렸었습니다. 


코임브라 공작 인판테 페드루로 추정되는 그림

     

국내정치를 자신의 마음대로 할수 있게 된 아폰수 5세는 이제 눈을 해외로 돌리게 됩니다. 1470년대초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아프리카쪽을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합니다.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탕헤르는 여러번 뺏고 뺏기게 되지만 주변의 다른 지역은 아폰수 5세가 장악했으며 이것은 아프리카쪽의 포르투갈 영지를 확고히 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역시 교황에게서 아프리카쪽에서 잡은 포로를 노예로 팔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으며 이것은 이후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의 정당성 중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아폰수 5세는 사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책에서 더 나아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였는데, 이를테면 종조부인 인판테 엔히크의 탐험을 여전히 지원해주긴 했지만 엔히크가 죽은뒤 그의 뒤를 이어 계속 해서 포르투갈의 이익을 줄수 있는 탐험을 발굴하거나 지원하지는 않았었습니다.

 

"항해왕자" 엔히크로 추정되는 초상화


아프리카를 어느정도 정리한 아폰수 5세는 이제 이베리아 반도 내 문제에 개입하려합니다. 1474년 12월 카스티야의 국왕 엔리케 4세는 딸인 후아나만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하지만 이때 후아나는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했었을분만 아니라 엔리케 4세 역시 당시 반대파 귀족들의 압력으로 딸이 아닌 여동생인 이사벨을 왕위계승자로 선택했었습니다. 하지만 국왕이 죽을 무렵 정치 상황은 급작스럽게 바뀌었으며 카스티야 내에서 이사벨을 지지하는 쪽과 후아나를 지지하는 쪽으로 나뉘게 됩니다. 특히 후아나의 어머니이자 아폰수 5세의 여동생이었던 포르투갈의 후아나는 오빠인 아폰수 5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후아나는 딸을 오빠와 결혼시켜서 딸에게 카스티야 왕위를 잇게 만들려했습니다. 그리고 아폰수 5세는 이를 수락해서 조카와 결혼한뒤 아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카스티야를 침공합니다. 

    

 

카스티야의 후아나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카스티야 왕위를 두고 아폰수 5세와 아들 주앙은 군대를 이끌고 카스티야로 갔으며 이에 카스티야에서는 이사벨과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를 중심으로 둘을 지지하는 알바공작과 멘도사 추기경등이 맞서 싸우게 됩니다. 둘의 전투는 애매하게 끝났는데 둘다 서로의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어쨌든 아폰수 5세는 카스티야의 왕위를 얻지 못했고 결국 이사벨과 페르난도 2세의 승리였습니다. 이 둘은 승리를 통해서 카스티야 왕위를 완전히 이사벨의 소유로 만들었으며 이들은 후에 “가톨릭 공동군주”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사실 카스티야의 왕위계승문제는 매우 아리송하면서도 재미난데, 이를테면 엔리케 4세의 총신이자 궁정에서 엔리케 4세의 딸인 후아나의 친아버지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벨트란 데 라 쿠에바는 이사벨을 지지해서 아사벨쪽에서 전쟁을 했었습니다. 또 엔리케 4세 시절 이사벨의 동생인 아스투리아스 공 알폰소를 지지해서 엔리케 4세를 압박했던 후안 파첸코의 경우 알폰소가 일찍 사망하자 알폰소의 누나인 이사벨을 지지해서 역시 엔리케 4세에게 압박을 가해서 이사벨을 왕위계승자로 삼게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사벨이 왕위계승자가 된 뒤 후안 파첸코는 이사벨과의 관계가 틀어졌으며 이후에는 엔리케 4세의 딸이었던 후아나를 지지하게 됩니다. 

반면 엔리케 4세 시절의 국왕 측근이었던 멘도사 가문 전체는 엔리케 4세 시절에는 여전히 국왕의 측근으로 있었지만 엔리케 4세가 죽은뒤 가문 전체가 엔리케 4세의 딸인 후아나가 아니라 이사벨을 지지했었습니다.

(사실 이때 카스티야 정치 이야기가 진짜 재미난데 말입니다. 편을 이리저리 마구 바꾸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특히 자신의 우방이라고 믿었던 프랑스가 자신이 아닌 카스티야를 지원한것에 낙담했고,1477년 아들인 주앙에게 왕위를 물려준뒤 순례여행을 떠나려고 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왕위에 복귀했으며 1481년 사망했습니다. 

아폰수 5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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