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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아라 Oct 26. 2023

1580년 포르투갈 왕위계승문제

포르투갈을 통치한 가문들...열두번째

엔히크가 성직자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면서 당연히 엔히크의 후계자 문제가 대두됩니다. 엔히크는 이미 나이가 많았으며 서둘러 후계자를 결정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그 후손들

   

당시 왕위계승을 주장한 인물들은 다섯명정도가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마누엘 1세의 후손들로 그중 포르투갈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인물은 안토니우였습니다. 안토니우는 마누엘 1세의 둘째아들인 베자 공작 루이스의 아들이었습니다. 루이스는 평생 미혼으로 지냈지만, 비올란테 고메스라는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안토니우를 얻었습니다. 안토니우의 어머니인 비올란테 고메스에 대해서 많은 기록들에서 유대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안토니우의 부모는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안토니우는 사생아로 포르투갈의 왕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안토니우


사실 가장 강력한 왕위계승후보는 바로 이웃 에스파냐의 국왕이었던 펠리페 2세였습니다. 펠리페 2세는 마누엘 1세의 장녀인 이사벨의 아들로 아비스 왕가의 남성 직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하는데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독립한 이래로 오래도록 카스티야와 갈등을 빚었을뿐만 아니라 카스티야에 합병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에 오른다면 포르투갈이 합병당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다음으로 고려된 왕위계승후보는 포르투갈의 카타리나로 브라간사 공작부인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카타리나는 마누엘 1세의 여섯째 아들인 기마랑이스 공작 두아르테와 그의 아내인 브라간사의 이사벨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사촌이었던 브라간사 공작 주앙 1세와 결혼했으며 브라간사 공작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포르투갈에서 권력을 잡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주앙 1세는 아내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이어받아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이에 적극적으로 왕위계승문제에 관여하게 됩니다만, 카타리나는 여성이었고 남편인 주앙 1세는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기에 당연히 적들도 많았었습니다.     


기마랑이스의 카타리나, 브라간사 공작부인


사실 포르투갈 왕위계승문제에서 가장 강력한 계승 명분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파르마 공작의 알렉산드로스 파르네세의 장남이었던 라누치오 파르네세였습니다. 라누치오 파르네세의 어머니는 포르투갈의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 역시 마누엘 1세의 손녀로, 위에서 언급한 브라간사 공작부인 카타리나의 언니였습니다. 당연히 남성 계승권리가 여성의 계승권리보다 앞선 포르투갈에서 어떤 후보자들보다 가장 높은 계승권리를 가진 사람은 라누치오 파르네세의 어머니인 마리아였습니다만 마리아는 1577년 사망했으며 결국 마리아의 계승권리는 마리아의 장남인 라누치오 파르네세가 이어받았던 것입니다.     


라누치오 파르네세, 파르마 공작


이들 외에도 마누엘 1세의 딸인 베아트리스의 아들이었던 사보이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역시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리가 파르마 공작의 아들인 라누치오 파르네세나 에스파냐의 국왕인 펠리페 2세보다 명분에서 뒤쳐졌기에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리 주장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마누엘 1세와 이후 포르투갈 국왕들 그리고 1580년 왕위계승문제의 후보들


이런 후보자들에게는 모두 약점이 있었고 이것은 엔히크가 자신의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는 원인이 됩니다. 포르투갈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고 포르투갈 사람들 대부분이 국왕이 되길 바랬던 안토니우는 사생아였기에 포르투갈 왕위에 대한 상속권리가 없었습니다. 안토니우는 부모가 비밀결혼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사생아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부모가 비밀결혼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었습니다. 물론 그를 지지해서 그냥 왕위계승자로 만들수도 있었지만 그럴 경우 이웃의 펠리페 2세와 전쟁을 해야할수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펠리페 2세는 안토니우보다 왕위계승에 대한 명분이 더 명확했으며 무조건 안토니우를 국왕으로 만든다면 펠리페 2세가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아비스 가문의 첫 번째 국왕이었던 주앙 1세 역시 사생아 출신으로 상속권리가 없었기에 이웃의 명분을 가지고 있던 카스티야의 국왕과 전쟁을 해서 승리를 거두고 나서 확실한 국왕으로 인정받을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때 에스파냐는 강력한 나라였기에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 전쟁해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펠리페 2세에 대해서는 당연히 포르투갈의 많은 사람들이 반발했습니다. 물론 펠리페 2세에게는 명분도 있었으며 또한 강력한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는 펠리페 2세가 국왕이 될 경우 포르투갈의 독립성이 상실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포르투갈은 독립이후 줄곧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카스티야와 투쟁을 했었으며, 이 때문에 당연히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이어받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펠리페 2세의 정당성은 물론 이베리아 반도가 하나로 묶이는 것은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 역시 존재했었기에 펠리페 2세를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카타리나는 남편인 브라간사 공작 주앙 1세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습니다. 사실 카타리나는 마누엘 1세의 아들의 후손으로 조카인 라누치오 파르네세 다음으로 계승권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포르투갈에서 오래도록 살았었으며 또한 주앙 1세 역시 마누엘 1세의 누나의 후손이었기에 역시 약하지만 포르투갈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할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포르투갈 내에서 강력한 후보중 한명으로 떠올랐습니다. 펠리페 2세 역시 카타리나와 그녀의 남편인 브라간사 공작을 경계했으며 카타리나의 남편을 회유하려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서는 이때까지 여성 계승자의 권리를 인정하긴했지만 “여왕”이 즉위한 적은 없었으며 당연히 여성이 군주가 되는 것에 대해서 당대 사람들은 어느정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포르투갈의 왕위계승권리에 대한 명분이 가장 강했던 라누치오 파르네세는 정치적 문제로 계승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는 외국인이었기에 포르투갈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라누치오 파르네세에 대해서 어느정도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라누치오 파르네세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로스 파르네세는 펠리페 2세와 동맹관계였습니다. 알렉산드로스 파르네세의 어머니가 바로 펠리페 2세의 이복누나로 황제 카를 5세의 사생아 딸이었던 마르게리타로 마르게리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성들처럼 합스부르크 가문을 위해 네덜란드 섭정으로 일하기도 했었으며,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역시 펠리페 2세를 위해 일했었습니다. 이런 관계는 알렉산드로 파르네세가 당시 미성년자였던 아들 라누치오의 포르투갈 계승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원인이됩니다. 


    

알렉산드로 파르네세, 파르마 공작, 라누치오 파르네세의 아버지 , 펠리페 2세의 조카로 자녀들의 포르투갈 왕위계승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 후보는 안토니우, 카타리나 그리고 펠리페 2세 이렇게 좁혀지게 됩니다.  엔히크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펠리페 2세를 무시할 경우 강력한 에스파냐와 전쟁을 해야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엔히크와 펠리페 2세는 계속해서 협상을 진행했지만 1580년 1월 엔히크가 죽을때까지 후계자 문제를 결론내지 못합니다.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왕위를 얻기 위해서 정치적 공작을 시도합니다. 그는 포르투갈 귀족들을 포섭했으며 특히 포르투갈이 에스파냐와 연합한다면 더 큰 경제적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특히 펠리페는 엔히크가 죽은뒤 포르투갈을 통치하고 있던 섭정단의 귀족들을 포섭합니다.     


이렇게 되자 안토니우는 자신의 불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펠리페 2세와 경쟁하기 위해서 선조인 주앙 1세와 자신을 비교합니다. 주앙 1세 역시 사생아였지만 결국 외국 세력을 몰아내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지켜낸 인물이었으며 주앙 1세 이후 포르투갈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바탕을 마련했기에 주앙 1세와 자신을 동일시 했으며 포르투갈에서 광범위하게 지지받게 됩니다.      


1580년 7월 24일 안토니우는 스스로를 자신을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선포했으며, 안토니우를 지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펠리페 2세는 이를 좌시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와 에스파냐 군대를 보내서 포르투갈을 장악하게 합니다. 그리고 1580년 8월 25일 알칸타라 전투에서 알바공작이 이끄는 에스파냐 군이 안토니우를 지지하는 포르투갈군에 대해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은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를 얻는 결정적 전투였으며 결국 안토니우는 1581년 포르투갈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안토니우는 에스파냐의 적이었던 프랑스나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동맹인 잉글랜드의 도움을 얻으려 노력했었으며 특히  1583년에는 에스파냐 군이 아직 장악하지 못했던 포르투갈의 영토인 아조레스 제도로 가서 이곳을 거점으로 자신의 왕위를 주장하려했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에스파냐 해군에 막혀서 이 시도는 실패했었으며 다른 도발 역시 성공하지 못하고 파리에서 살다가 사망합니다. 


알칸타라 전투


에스파냐 군이 알칸타라 전투에서 승리를 한뒤 펠리페 2세는 결국 포르투갈 왕위를 얻게 됩니다. 그는 1580년 9월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대관식을 했으며 1581년 코르테스의 정식 승인으로 포르투갈의 국왕 필립 1세가 됩니다. 이렇게 포르투갈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되었으며 이후 60년간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국왕들의 통치를 받게 됩니다.


1580년 경의 펠리페 2세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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