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를 통치한 가문 : 첫번째 이야기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나라중 하나입니다. 폴란드 왕국이 성립된 뒤 폴란드는 한동안 유럽의 강대국으로 군림했었습니다. 하지만 중부 유럽에 있던 폴란드는 주변의 여러 국가들인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힘이 커지면서 이들과의 경쟁에 밀려서 서서히 국력이 약화되었고 결국 이들 나라에 의해서 나라가 분할되는 비극을 맞기도 했습니다. 세 개의 나라로 분할된 이들은 비록 각각의 나라에 편입되었지만 오랜 국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폴란드 사람들은 늘 자신들이 폴란드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어떻게든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으려 노력했고 결국 1차 세계대전이후 다시 폴란드라는 나라를 되찾게 됩니다. 이런 폴란드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폴란드를 통치한 첫 번째 왕가는 피아스투프 왕가로 이 이름은 가문의 선조인 피아스트 코워지에이Piast Kołodziej의 이름을 딴것이기도 합니다. 피아스트 코워지에이의 후손인 미예슈코 1세Mieszko I 는 첫 번째 기독교로 개종한 폴란드 통치자이자 강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와 그의 신하들의 기독교 개종은 폴란드가 기독교 세계에 편입되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또한 폴란드라는 나라의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본이 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미예슈코 1세의 아들이었던 볼레스와프 1세Bolesław I는 폴란드 왕국을 성립했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은 폴란드 국왕으로 폴란드를 통치했습니다. 사실 “왕국”으로 인정받는 것 역시 11세기에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이런 일을 해낸 인물인 볼레스와프 1세는 대단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폴란드는 기독교와 왕국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피아스투프 왕가의 통치기에 성장해나갔습니다.
물론 피아스투프 왕가가 폴란드를 통치했던 시절은 안정적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12세기 피아스투프 왕가의 국왕이었던 볼레스와프 3세는 죽으면서 나라를 네명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했습니다. 이것은 아들들과 그 지지세력의 다툼을 피하려는 것이었습니다만 분할로 인해서 폴란드는 오래도록 혼란한 상태에 빠졌고 100년이 훨씬 넘는 세월동안 이 분열은 지속되었습니다. 왕위를 두고 피아스투프 가문 사람들이 다툼을 하는 동안 외국 세력이었던 보헤미아의 국왕이 잠시 폴란드 왕위에 오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비록 14세기가 되면서 다시 피아스투프 가문 출신이었던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를 통합하지만, 그의 아들대에 피아스투프 왕가는 단절되게 됩니다.
피아스투프 왕가가 단절된뒤 어머니가 폴란드 공주였던 헝가리의 국왕 라요시가 폴란드의 국왕이 됩니다. 특히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두 딸들이 각각 헝가리와 폴란드를 이어받게 됩니다. 이렇게 라요시의 딸인 야드비가가 폴란드의 첫 번째 여성 군주가 됩니다. 야드비가는 이웃의 리투아니아를 통치하던 인물이었던 요가일라와 결혼해서 둘은 함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통치하게 됩니다. 이 요가일라가 바로 야겔로노프 가문의 첫 번째 국왕인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였습니다. 요가일라는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폴란드 여왕과 결혼하면서 기독교로 세례를 받으면서 브와디스와프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왕명에 기독교 세례명과자신의 원래 이름을 합쳐서 “브와디스와프 야기에우워”라는 이름으로 통치했습니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야기엘로누프 라는 가문명을 쓰게 됩니다.
특히 브와디스와프 2세는 원래 리투아니아 대공이었기에 그가 폴란드 국왕이 된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점차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이것은 폴란드의 힘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강력해진 폴란드에 대해서 당연히 주변 여러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고 이것은 왕가들간의 결혼동맹으로 이어졌는데, 결국 이런 혼인관계를 통해서 야기엘로누프 가문은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얻을 정도의 강력한 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많은 왕가들처럼 이 가문 역시 남성 직계 후손이 단절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특히 야기엘로누프 가문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적자 후손없이 사망하면서 계승문제가 발생합니다. 지그문트 2세 시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그리고 이전에 복속했던 프로이센 공작령 같은 지역을 하나로 묶었고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이제 하나의 연합국가가 됩니다. 이렇게 통합을 위해서 군주를 선출하는 권한을 이 두나라의 귀족들에게 부여했는데 지그문트 2세가 죽으면서 야기엘로노프 가문은 사라지게 되었고 이제 선출제 국왕들이 나오게 됩니다.
사실 국왕을 선출하는 것은 좋은 점과 나쁜점 모두를 가지고 있었는데 초반에는 폴란드 주변의 국가들을 견제할수 있는 강력한 인물을 국왕으로 뽑을수 있다는 장점이 유효했고 폴란드는 계속해서 힘을 과시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왕이 되기 위한 경쟁과 귀족들간의 알력이 커지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특히 폴란드 주변의 국가들이 점차 더 강력해지고, 반면 폴란드 국내의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와중에서 무능력한 인물을 정치적 이유로 군주로 선출하면서 더욱더 폴란드의 처지가 위태롭게 됩니다. 결국 이런 상황은 18세기 후반 세 번에 걸친 폴란드의 분할로 폴란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서 분할되었으며 거대한 폴란드의 영토는 이렇게 세 나라에 의해서 분할 합병됩니다.
폴란드 사람들은 이 시기를 거치면서 여전히 폴란드를 되살릴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자 폴란드를 분할했던 기존 강대국들을 무찌를수 있는 나폴레옹에 열광하고 그를 지지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폴란드 역시 이전의 상황과 같아졌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는 러시아가 장악한 폴란드 왕국, 오스트리아가 장악해서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로 불린 갈리치아와 로도메리아 왕국 Kingdom of Galicia and Lodomeria, 프로이센이 장악한 포센 대공국 으로 나뉘게 됩니다. 비록 각각의 나라들로 구성되었지만 사실상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영토로 나뉜것이었습니다. 분할후 폴란드 사람들은 여전히 다시 자신들의 폴란드를 되찾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봉기를 일으켰었습니다.
폴란드가 다시 독립국가가 될수 있었던 것은 제 1차 세계 대전이후였습니다. 전쟁때 폴란드는 자신들을 점령한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과 전쟁을 했었는데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동맹이었으며 러시아 역시 혁명이후 독일과 평화협정을 체결했기에 결국 이들과 전쟁을 했던 폴란드에 대해서 승전국들인 연합국들은 독립을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폴란드는 폴란드 공화국을 성립했으며 이제 다시 하나의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후 폴란드의 운명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폴란드는 여전히 하나의 독립국가로 남을수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독립국가로 유지하게 됩니다.
폴란드의 역사에서 군주가 독립적으로 통치했던 시기는 18세기중반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폴란드라는 나라가 시작되고 황금기를 누리던 시절은 군주제 시절이었으며 폴란드가 몰락해가던 시기도 결국 군주제 시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폴란드를 통치한 왕가와 그 왕가의 군주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은 폴란드 역사를 알 수 있는 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