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를 통치한 가문...네번째 : 폴란드의 첫 기독교 통치자
폴란드가 역사 세계에 들어온 때는 바로 미에슈코 1세와 그의 신하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폴란드가 기독교화되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미에슈코 1세가 개종했을 때 그는 이미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미에슈코가 이전에 어떻게 태어나고 자랐으며 권력을 잡고 폴란드를 통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개종전의 삶에 대해서는 몇몇 이야기들로부터 추론하거나 전해지는 다양한 전설등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미에슈코 1세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920년대부터 945년 이전의 언제가로 추론하고 있습니다. 미에슈코라는 이름 또한 어떻게 나타난 이름인지에 대해서 애매한 상황입니다. 미에슈코라는 이름 자체가 매우 희귀한 이름이고 특히 피아스투프 가문을 제외하고는 슬라브 계열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어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여전히 어디서 기원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미에슈코라는 이름 자체가 노르드인들과의 연결고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기에 당연히 미에슈코 1세가 기독교로 개종하기전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미에슈코 1세가 사실 어린시절 눈이 멀었다가 어느 순간 눈을 떴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 이 이야기가 우화라고 여기는데 미에슈코 1세가 기독교로 개종한것과 연결이 되는데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봤고 이전의 이교도 시절이 깜깜한 눈이 멀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미에슈코 1세는 950년대에서 960년대 사이 어느어느 때에 아버지에게서 권력을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에슈코 1세의 증조부로 여겨지는 시에모비트가 이전의 통치자를 대신해서 통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분명히 미에슈코 1세의 가문은 그 일대를 장악하고 통치하던 가문임을 알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에슈코 1세 시절이나 그의 아버지 시절 강력한 군사적 세력을 가지고 영토를 확장해나갔었으며 이것은 아마도 이웃의 신성로마제국과 맞부딪히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에슈코 1세는 주변의 여러 기독교 국가들, 보헤미아나 신성로마제국등과 국경을 맞닿으면서 아마도 기독교화가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이미 미에슈코 1세는 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다고도 합니다만, 그것보다는 차라리 같은 기독교 세력이 되어서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얻을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화의 시작은 아마도 965년경 이웃의 보헤미아의 공작 볼레스와프 1세의 딸인 두브라브카와의 결혼이 확정되면서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이전부터 미에슈코 1세는 주변의 기독교 세력과의 갈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등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그중 하나로 보헤미아 통치자의 딸과 결혼으로 동맹을 맺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브라브카는 이교도와의 결혼을 거부했고 결국 미에슈코가 개종하면서 그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미에슈코 1세가 보헤미아와 결혼협상을 하고 있는 와중에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듯합니다. 사실 미에슈코 1세는 이미 주변 기독교 국가들과의 갈등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기독교로 개종할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헤미아의 공작과 협상은 물론 그의 기독교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을 것입니다. 두브라브카와 미에슈코의 결혼은 오래도록 폴란드의 기독교화에 중요한 계기로 여겨졌으며 특히 두브라브카가 미에슈코를 설득해서 기독교로 개종할수 있도록 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미에슈코는 이전부터 마음이 있었을 것이며 두브라브카와의 결혼 때문에 개종을 결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브라브카는 결혼하면서 주변의 기독교인들을 데려왔고 이것은 미에슈코의 궁정에 더욱더 빨리 기독교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미에슈코 1세가 자신의 궁정사람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연도나 어디서 세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있지 않습니다만 일반적으로 두브라브카와의 결혼이 확정된 이후인 966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애매한 상황이긴하지만 이 결정은 그는 물론 후대의 폴란드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줬습니다.
미에슈코 1세는 개종후에도 활발한 군사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포메른 지방에 대한 공격을 묵인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포메른 지방에 대한 공격은 성공적이었을수 있지만 이곳을 완전히 통치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었습니다. 게다가 이런 상황은 주변의 다른 제후들을 자극했고, 972년 루사티아의 마르크그라프인 오도 1세가 그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루사티아의 마르크그라프는 아마도 포메른 지방을 공격하는 미에슈코 1세에게 위협을 느꼈을 것이며 이 때문에 황제의 승인없이 그를 바로 공격했을 것입니다. 미에슈코 1세는 이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었지만, 둘다 황제에게 소환당해서 해명해야했을 때 황제나 제국에서는 미에슈코 1세보다는 루사티아의 마르크그라프에게 더 유리한 판단을 했으며 이것은 아마도 미에슈코 1세가 독일내 외교적 세력을 키우려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973년 황제 오토 1세가 죽고난 뒤 그의 아들인 오토 2세가 제위를 이었습니다만, 사촌인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와 갈등을 빚게 됩니다. 하인리히는 오토에게 슈바벤 공작령을 원했지만 오토는 바이에른과 슈바벤등을 대놓고 원하는 사촌 하인리히가 너무 야망이 크다고 여겼으며 이를 거절합니다. 이런 상황은 결국 오토와 하인리히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미에슈코 1세는 그의 처남이었던 보헤미아 공작과 함께 하인리히를 지원합니다. 물론 승리한쪽은 황제 오토 2세였으며, 이후 오토 2세는 자신에게 대항했던 인물들에게 차례로 보복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보헤미아를 공격해서 978년 보헤미아를 굴복시킵니다. 그리고 다음해에 폴란드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승리한 쪽은 미에슈코 1세로 여겨집니다. 둘사이의 평화협정은 980년경 체결된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때 아마도 미에슈코 1세의 두 번째 아내인 할덴슬레벤의 오다(노르드마르크의 마르크그라프 디트리히 폰 할덴슬레벤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오다가 수녀원에서 서원한 여성이었기에 미에슈코가 그녀를 납치해서 결혼했다는 이야기나 교회에서 항의했다는 이야기(수녀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가 전해져오지만, 둘의 결혼뒤 포로교환등이 이루어진 것으로 봐서 아마 정치적 목적으로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 결혼으로 미에슈코 1세는 제국내에서 지위가 더 커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에슈코 1세는 이후에도 북부 지역과 제국내의 외교관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이를테면 포메른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기 위해 위협이 되는 덴마크를 견제하려고 했고 스웨덴의 국왕과 딸인 시비엥토스와바Świętosława를 결혼시켰다고도 합니다.(재미난 사실은 시비엥토스와바는 이후 스베인 튜크스케그와 재혼했고 이 재혼으로 태어난 아들중 한명이 바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를 정복했던 크누트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에슈코 1세는 여전히 제국내 정치에도 관여합니다. 983년 황제 오토 2세가 죽은뒤 그의 미성년 아들인 오토 3세가 즉위하면서 섭정 권한을 두고 갈등이 벌어집니다. 미에슈코 1세는 이전에 지지했던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를 섭정으로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미에슈코 1세는 정확히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980년대 언젠가 편을 바꿔서 오토 3세와 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테오파뉴를 지지했다고 합니다.
이런 복잡한 관계는 이웃의 보헤미아와의 갈등으로 이어집니다. 미에슈코 1세는 첫 번째 아내가 죽은뒤 보헤미아와의 관계가 서서히 약화되고 있었으며 이웃의 국가들이었기에 영토를 두고 갈등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은 보헤미아의 공작이자 미에슈코의 처남이었던 볼레슬라프 2세과 미에슈코 1세의 사이를 점차 멀어지게 했으며 특히 볼레슬라프 2세가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2세를 지지한반면, 미에슈코 1세는 황제와 그의 어머니를 지지하면서 갈등을 고조되었고 결국 두 나라간의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먼저 공격한 쪽은 볼레슬라프 2세였지만 승리한쪽은 미에슈코 1세였으며 미에슈코 1세는 아마도 이때 슐레지엔 지방을 완전히 손에 넣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미에슈코 1세는 죽기전까지 황제의 충실한 동맹으로 남았으며, 992년 아마도 자연사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미에슈코 1세는 폴란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폴란드가 폴란드라는 하나의 나라로 묶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습니다. 미에슈코 1세는 군사적 능력이 뛰어났고 이 때문에 폴란드의 중요한 영토를 장악했으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외교적인 노력도 했었습니다. 게다가 미에슈코 1세는 영토적인 면은 물론 사상적인 면에서도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이것은 폴란드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는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에슈코 1세가 죽은뒤 그의 뒤를 잇는 인물은 바로 볼레스와프로 그는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