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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스투프 가문 : 볼레스와프 1세

폴란드를 통치한 가문...다섯번째 이야기 : 폴란드의 첫 대관한 국왕

by 엘아라

볼레스와프 1세는 미에슈코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보헤미아의 두브라브카의 첫째아이로 태어났습니다. 볼레스와프라는 이름은 외할아버지였던 보헤미아의 공작 볼레스라프 1세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는 아버지와 달리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재미난 사실은 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가 개종을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서는 애매한 상황인데 기록에 따라 미에슈코 1세가 개종한 뒤에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미에슈코 1세가 개종하기 전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로 나뉘는데 이 때문에 볼레스와프 1세의 출생년도가 966년 내지 967년 경으로 추정하게 됩니다. 볼레스와프 1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거의 없지만 몇몇 기록들에 따르면 그가 성년의식을 치루고 그의 머리카락을 로마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미에슈코 1세가 교황청이 아들을 보호하길 원해서였다는 추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미에슈코 1세가 교황청의 지지를 원했던 이유는 볼레스와프를 신성로마제국의 궁정에 인질로 보내야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1세가 인질로 간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 역시 존재한다고 합니다.


볼레스와프 1세, 19세기


볼레스와프의 어머니인 두브라브카는 977년 사망했고, 그의 아버지인 미에슈코 1세는 제국의 영주의 딸이었던 할덴슬레벤의 오다와 재혼했습니다. 이시기 볼레스와프는 마워폴스카(소폴란드)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가 통치자가 된 경위에 대해서는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는 이야기와 지역 귀족들이 볼레스와프를 지지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두브라브카의 죽음으로 인해서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던 볼레스와프의 외삼촌인 보헤미아의 공작 볼레슬라프 2세가 볼레스와프를 지지해서 통치자가 되었다는 등의 추정을 한다고 합니다. 당대 복잡한 정치 외교 상황에서 아마도 여러 가지 추정을 할수 있는 듯하지만 확실한 점은 이때 볼레스와프가 소폴란드 지역에서 힘을 얻었다 것입니다.


992년 미에슈코 1세가 사망하자 상속문제가 발생합니다. 미에슈코 1세는 아들들에게 영지를 나눠주라고 했다고 합니다만, 볼레스와프는 이를 거부하고 “여우같은 교활함으로” 나라를 차지하고 계모와 이복 동생들을 폴란드에서 추방했으며, 이복동생들을 지지하던 영주들을 잡아서 눈을 멀게하는 벌을 내렸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바로 끝나지 않았기에 아마도 볼레스와프 1세가 나라를 완전히 장악하는데는 수년이 걸렸다고 추정합니다. 특히 볼레스와프 1세는 995년경에 처음으로 자신의 동전을 발행하는데 아마도 이때쯤 볼레스와프 1세가 폴란드를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995년경 발행된 폴란드 동전 © Gabinet Numizmatyczny D. Marciniak


볼레스와프 1세는 폴란드의 통치자가 되면서 신성로마제국과의 연대를 강화했습니다. 그는 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폴란드 군을 파견했는데 특히 995년이후 더욱더 활발하게 군대를 보냈으며 이것을 통해서 그가 995년 경에 폴란드 내부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을 추정할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지원을 통해서 볼레스와프 1세는 황제 오토 3세를 만났으며 그와의 유대를 강화합니다. 또한 볼레스와프 1세는 교황과의 연대 역시 강화했는데, 특히 프로이센 지역의 선교를 위해서 교황은 프라하의 주교 아달베르트(보이테흐Vojtěch)를 보냈는데 볼레스와프 1세는 그를 환대했으며 또한 그를 지원했습니다. 특히 아달베르트가 보헤미아에서 보헤미아의 공작이자 볼레스와프 1세의 외삼촌이었던 볼레슬라프2세와 마찰을 빚고 프라하를 떠나왔었기에 아마 보헤미아를 경쟁 상대로 봤던 볼레스와프 1세는 더욱더 그를 환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997년 아달베르트가 이교도에게 살해당하자, 볼레스와프는 금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아달베르트의 유해를 모셔와서 그가 폴란드의 수도로 강조하고 싶었던 그리에노즈에 아달베르트를 묻었습니다.


성 아달베르트의 시신을 금을 주고 사오는 볼레스와프 1세, ©Mathiasrex, Maciej Szczepańczyk


아달베르트의 순교는 볼레스와프 1세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황제 오토 3세는 아달베르트와 그 가족의 친구였으며 자신의 세력이었던 아달베르트의 시성을 추진했습니다. 오토 3세는 아달베르트가 성인으로 시성된뒤 그가 묻혀있는 폴란드로 순례여행을 옵니다. 볼레스와프 1세는 황제가 오는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황제는 볼레스와프 1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볼레스와프 1세는 자신의 영향력을 어필해서 황제에게 좀 더 동등한 관계로 만들었으며 폴란드가 제국의 영토가 아니라 제국의 연방에 일부로 여겨졌으며 좀 더 자유로운 관계로 여겨지는 바탕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볼레스와프 1세는 황제 오토 3세와의 관계를 통해서 정치 외교적으로 좀 더 큰 이익을 추구하려했을수 있습니다만, 1002년 오토 3세가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이런 야망은 끝이 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당대 기록에서는 “황제의 죽음을 볼레스와프보다 더 애도한 이는 없었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황제 오토 3세


황제 오토 3세가 갑작스럽게 죽은뒤 황위를 두고 세명이 경쟁합니다. 한명은 오토 가문 출신의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4세였으며 다른 두명은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 에카르트 (에케하르트)와 슈바벤의 공작 헤르만 2세였습니다. 황위계승을 두고 에카르트가 반대 세력에 암살당하고, 이후 바이에른 공작이 슈바벤 공작을 제압하면서 결국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4세는 황제 하인리히 2세로 즉위합니다.


제국이 혼란한 상황임을 본 볼레스와프 1세는 자신의 길을 찾게 됩니다. 그는 황제 오토 3세와는 매우 돈독한 관계였지만 새롭게 유력한 황위계승자였던 바이에른 공작과는 뜻이 맞지 않았고, 차라리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와 바이에른 공작을 두고 저울질했으며 에카르트가 죽자 하인리히 2세를 지지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혼란한 상황을 이용해서 볼레스와프는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령을 장악했으며 이것은 황제와의 갈등을 초래합니다. 게다가 보헤미아 지방의 정치문제도 관여해서 사촌인 볼레슬라프 3세가 쫓겨자나 이에 볼레스와프 1세는 보헤미아를 압박해서 자신의 사촌을 다시 돌아오게 했는데, 당시 보헤미아는 제국의 보호아래있었기에 이것은 황제와의 갈등을 더욱더 심화시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황제 하인리히 2세


1002년 오토 3세의 죽음이후 시작된 폴란드와 제국과의 갈등은 1018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집니다. 황제 하인리히 2세는 볼레스와프 1세가 장악한 지역을 되찾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폴란드를 공격하거나 제압하려했지만 번번이 성공하지 못했으며 결국 1018년 바우첸 조약을 통해서 볼레스와프 1세가 장악했던 루사티아 지방의 통치권을 인정해줬으며 볼레스와프 1세는 하인리히 2세를 황제로 인정하면서 충성을 맹세하는데 이것은 사실상 하인리히 2세의 패배이자 볼레스와프 1세의 승리나 다름없었습니다. 이해 볼레스와프 1세는 키예프 대공 계승문제에 개입해서 이쪽에서 원하던 영토 역시 합병합니다.


키예프에 입성하는 볼레스와프 1세,19세기


1018년이후 1025년 볼레스와프 1세가 죽을때까지 그의 통치기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아마도 이시기 그의 통치는 안정되었으며 또한 이웃의 나라들과의 갈등도 거의 없었기에 기록이 별로 없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시기 볼레스와프 1세는 그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합니다. 바로 국왕으로 대관한 것입니다. 대관한 날짜에 대해서는 역사가들마다 의견이 다른데 일반적으로는 황제 하인리히 2세가 죽은뒤 제국의 공백기가 되었을때를 노려서 그가 죽기 직전인 1025년에 대관식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견으로는 1000년 볼레스와프 1세가 황제 오토 3세를 만났을 때 황제가 왕실 예복을 수여하면서 대관식을 거행했다는 의견도 있다고 합니다. 보통은 1025년 부활절 일요일인 3월 27일 거행되었다고 이야기되지만, 1024년 12월 24일날 거행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폴란드 첫번째 대관식, 19세기


볼레스와프 1세가 국왕으로 대관한 것은 그와 폴란드가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완전히 독립된 나라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그나 이후 폴란드 통치자가 황제를 상위군주로 머리를 숙이지 않고 동등한 관계로 대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볼레스와프 1세의 대관이 스스로 대관으로 끝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1세의 대관은 교황에게 인정받았는데, 일반적으로는 당시 새로 선출된 교황 요한 19세에게 뇌물을 주고 인정받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 로마에서는 교황령을 위협하는 세력을 막기 위한 동맹이 필요했으며 이 때문에 폴란드를 인정해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게다가 황제 하인리히 2세의 후계자였던 황제 콘라트 2세가 이를 묵인했기에 가능하다는 의견 역시 있고 이것은 결국 교황과 황제 그리고 볼레스와프 1세간의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볼레스와프 1세, 16세기


볼레스와프 1세는 네 번 결혼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첫 번째 아내는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의 딸이었던 딸(오다 또는 후닐다)와 결혼했다고 합니다. 이 결혼은 작센지역에서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아버지 미에슈코 1세의 뜻이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후에 볼레스와프 1세는 자신의 첫 번째 아내를 “후에 쫓아내 돌려보냈다”라고 합니다. 아마도 정략결혼이었기에 장인이 죽은뒤 정치적 가치가 없어진 아내를 버린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첫 번째 아내와 헤어진뒤 두 번째로 헝가리 여성과 결혼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아마도 헝가리쪽 통치자의 딸로 추정되며, 폴란드에서는 헝가리의 유디트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고 합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이 두 번째 아내가 헝가리의 통치자였던 게저의 딸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완전히 인정되는 의견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 결혼에서 볼레스와프 1세는 아들인 베스프림Bezprym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1세는 이 두 번째 아내도 쫓아냈으며, 장남인 베스프림 역시 좋아하지 않았으며 후계자로 여기지 않았기에 세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인 미에슈코를 정치적으로 강조했던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있지 않다고 합니다.

헝가리의 유디트, 19세기

볼레스와프 1세의 세 번째 아내는 슬라브 계열의 여성이었던 엠닐다였습니다. 엠닐다의 아버지는 아마도 작센 지역이나 그 일대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이 때문에 볼레스와프 1세와 그녀의 결혼이 성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전에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했고 아내들을 쫓아냈던 볼레스와프 1세는 엠닐다와의 결혼생활은 매우 잘 유지했는데 엠닐다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다섯 아이를 낳았을뿐만 아니라 현명하고 매력적이며 변덕스러운 남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여성으로 이야기합니다. 특히 그녀의 장남이었던 미에슈코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의 후계자로 여겨졌었습니다. 엠닐다는 1017년이나 그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왜냐면 볼레스와프 1세는 1018년 마이센의 오다와 네벌째 결혼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볼레스와프 1세의 마지막 아내는 마이센의 오다로 오다의 아버지는 황제 하인리히 2세와 황위를 두고 경쟁했던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 에카르트였습니다. 이 결혼 역시 정치적 목적이 강했는데 이전부터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들과 유대를 했던 볼레스와프 1세의 외교의 연장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볼레스와프 1세는 자신의 딸을 오다의 형제인 마이센의 마르크그라프 헤르만 1세와 결혼시켰었습니다. 그리고 볼레스와프 1세는 연결고리를 더욱더 강화하기 위해서 오다와의 결혼을 결정했을 것입니다. 이 결혼은 1018년 황제와 볼레스와프 1세와의 평화조약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다의 삶에 대해서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올케의 아버지와 결혼한 것은 당대에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있어보였을 것이며 또한 정략결혼에 장성한 전처 자식들이 있는 남자와의 정략결혼은 오다에게 쉽지 않은 결혼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이때문인지 둘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부정적 이야기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또한 둘의 자녀는 딸인 마틸다만이 알려져있지만 부모의 관계 때문에 약혼자와의 결혼이 거부되었다는 정도의 기록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마이센의 오다, 19세기


볼레스와프 1세는 대관한 뒤 얼마되지 않은 1025년 6월경 사망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자 생전에 이미 후계자로 지정되었던 미에슈코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미에슈코 2세, 19세기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동전사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00995_coin_bolizlavo_dvx_(oldest,_-995).jpg

- 성 아달베르트의 시신을 사는 볼레스와프 1세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oles%C5%82aw_I_the_Brave_buys_the_corpse_of_Saint_Adalbert_of_Prague_from_the_Prussians,_Gniezno_Door_ca._1170.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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