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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스투프 가문 : 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

폴란드를 통치한 가문....일곱번째

by 엘아라

1034년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가 죽었을 때 폴란드 상황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후에 그의 뒤를 이어 폴란드를 통치하게 된 카지미에시 1세는 겨우 18살이었으며 이전에 미에슈코 2세에게 반발했던 이들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했으며 결국 권력을 뺏기고 심지어 폴란드를 떠나야했었습니다. 이렇게 애매한 상황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이 시기에 미에슈코 2세가 죽고난뒤 바로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이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Kazimierz_I_Odnowiciel_(274971).jpg 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 19세기 작품


다른 곳에서는 어디에도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14세기의 한 연대기에서 미에슈코 2세가 죽을 당시 미에슈코 2세의 후계자는 장남이었던 볼레스와프였으며 아버지가 죽은뒤 그는 폴란드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폭군으로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학대했는데 심지어 어머니인 리체차마저 박대했고 리체차는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버릴 정도였다고 합니다.(또다른 의견으로는 잊혀진 볼레스와프는 사실 미에슈코 2세의 첩의 아들이기에 정실 왕비였던 리체차를 박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볼레스와프에 대해서 사람들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를 살해했으며 이후 카지미에시가 군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볼레스와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악행에 대해서 사람들이 너무나 분노했기에 그에 대한 모든 기록을 말살하기로 결정해서였다고 연대기에서는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고 합니다.


이 잊혀진 볼레스와프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연대기를 제외한 어떤 폴란드 기록에도 볼레스와프에 대해서 등장하지 않으며 몇몇 외부의 기록들이 존재하지만 그것 역시 명확한 증거가 되기에는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에슈코 2세의 죽음과 카지미에시 1세의 즉위 사이의 공백기를 이 볼레스와프 통치기로 해석한다면 매우 그럴듯해보였기에 역사적으로 오래도록 이 잊혀진 볼레스와프가 실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역사학자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폴란드 역사학계에서는 대부분 이 잊혀진 볼레스와프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 허구적 인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미에슈코 2세의 죽음과 카지미에시 1세의 즉위사이의 공백기는 폴란드내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의 후계자인 카지미에시 1세는 후에 “재건자, 복구자”이라는 뜻의 오드노비치엘Odnowiciel이라는 별명이 붙는 인물로 아마도 그가 아버지가 죽고 난뒤 한동안 혼란해졌던 폴란드를 다시 통합하는데 노력을 했기에 이렇게 이름 붙여졌습니다. 카지미에시 1세는 피아스투프 왕가에서 첫 번째로 출생기록이 정확히 있는 인물로 1026년 7월 25일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와 그의 아내인 로트링기아의 리체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교육을 잘받았는데 10살 무렵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서 공부했을 정도였습니다. 당대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기관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을수 있는 교육기관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역시나 교육을 잘 받았다고 알려진 미에슈코 2세는 후계자가 될 아들에 대한 교육에 신경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재미난 사실은 그가 이렇게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 때문에 군주들의 경우 장남이 아버지의 영지를 잇고 차남 이후가 종교에 귀의하는 식의 전형적인 중세 유럽의 통치 가문의 형태를 언급하면서 한때 카지미에시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 “잊혀진 볼레스와프”존재의 증거로 추정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대 카지미에시처럼 교육을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경우 역시 존재했기에 이것은 확고한 증거가 될수 없다고 반박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카지미에시가 수도원에 간 것은 단순히 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Mieszko_II_Lambert_(274963).jpg 카지미에시 1세의 아버지, 미에슈코 2세


1031년 미에슈코 2세가 폴란드에서 쫓겨나서 보헤미아로 도망치고 이후 베스프림이 군주가 되었을 때 그는 리첸차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때 리첸차는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카지미에시 역시 이때 어머니와 함께 독일로 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애매한데 일단 리첸차는 독일로 간 뒤 남편과 함께 지내지 않았기에 남편이 있는 폴란드로 가지 않았습니다. 카지미에시 역시 아버지가 사망할때까지 독일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어쩌면 당시 상황이 애매했기에 미에슈코 2세는 후계자인 카지미에시를 좀 더 안전한 곳에 머물도록 했으며 나라가 좀 더 안정되면 돌아오도록 하려했을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에슈코 2세의 장녀인 리첸차는 1033년 당시 폴란드로 망명해서 미에슈코 2세의 보호아래 있던 헝가리의 벨러 1세와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폴란드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Richenza_of_Poland.jpg 리체차, 카지미에시의 어머니


하지만 1034년 미에슈코 2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아마 이런 상황은 폴란드의 혼란을 야기시키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카지미에시가 독일에서 돌아와서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매우 교육을 잘 받았으며 후에 스스로도 뛰어난 기사임을 입증했던 카지미에시였지만 이때는 매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카지미에시의 아버지인 미에슈코2세는 간신히 폴란드를 다시 하나로 묶어놓은 상태였는데, 이제 막 폴란드로 돌아온 18살의 카지미에시가 나라를 완전히 장악하기는 힘들었을뿐만 아니라 결국 나라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폴란드의 곳곳에서 반란의 물결이 일어납니다.각 지역의 기득권 세력이나 미에슈코 2세 시절에 권력을 얻었던 인물들이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결국 반 기독교라는 목표로 군주에 대한 반란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폴란드는 기독교화한지 반세기도 되지 않았으며 또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주변의 여러지역을 장악해나갔었습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종교적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런 이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하는 군주에 대한 반기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폴란드 자체는 분열했는데 이를테면 마조프셰(마소비아)지역은 미에슈코 2세가 신임하는 신하중 한명이었던 미에츠와프Miecław가 독립적 나라를 세우기도 했었습니다. 포메른 지방 역시 폴란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나라가 되었습니다.


Panstwo_mieclawa.svg.png 1037년경 폴란드 상황 ©Hoodinski


카지미에시는 헝가리로 가서 도망치게 됩니다만 헝가리 내에서 그의 처지는 좀 애매했습니다. 당시 헝가리 국왕이었던 이슈트반 1세(스테판 1세)가 통치했었는데 카지미에시의 매형이었던 벨러는 후계자 문제로 이슈트반 1세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숙청당했다고 알려진 이슈트반 1세의 사촌인 바줄의 아들이었습니다. 카지미에시는 결국 다시 헝가리를 떠나서 어머니가 있는 독일로 갑니다.


이러는 사이 폴란드의 혼란한 상황은 주변 국가의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1039년 보헤미아의 공작이었던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폴란드를 공격합니다. 그는 폴란드를 공격해서 특히 당시 수도였던 그리에즈노를 약탈하고 포즈난 같은 중요한 도시를 파괴했는데 수많은 교회들이 파괴되었으며 폴란드에서 신성시되던 수많은 유물들, 이를테면 볼레스와프 1세가 이교도들로부터 시신의 무게만큼의 금을 지불하고 가져왔다던 성 아달베르트의 성유해같은 중요한 유물등을 약탈해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폴란드에 뺏꼈던 보헤미아의 일부를 다시 되찾기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은 폴란드 사람들에게 큰 타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나라가 분열되었다고는 하더라도 소규모 분쟁정도만 있었을 뿐었지만,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공격으로 수도가 황폐하고 폴란드의 자랑이었던 유물마저 뺏긴 것은 폴란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Josef_Matyáš_Trenkwald_-_Přenesení_ostatků_biskupa_Vojtěcha_do_Prahy.jpg 성 아달베르트의 성유해를 모시고 귀환하는 브르제티슬라프 1세


이 브르제티슬라프 1세의 공격은 카지미에시에게 도리어 좋은 기회가 됩니다. 폴란드 사람들은 외적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게 되었기에 쫓아냈던 카지미에시가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 도리어 좋은 감정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황제였던 하인리히 3세는 보헤미아의 힘이 커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하게 되었으며 보헤미아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기에 카지미에시가 황제에게 폴란드로 돌아가서 권력을 되찾을수 있게 기사들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이를 승낙하게 됩니다. 황제에게 빌린 병력을 데리고 카지미에시는 폴란드 남서부지역으로 들어갑니다. 이 지역은 상대적으로 폴란드 내에서 안정적이었고 독립의 기운도 적었고 좀 더 기독교화 한 지역이었기에 외적이나 이교도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군주인 카지미에시가 돌아온 것에 대해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Wojciech_Gerson-Kazimierz_Odnowiciel.jpg 카지미에시의 귀환, 19세기 작품


폴란드로 돌아온 뒤 카지미에시는 조각난 폴란드를 하나로 다시 묶기 위한 시도를 합니다. 그는 바로 이웃의 키예프 루스의 통치자였던 야로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게 됩니다. 이 동맹의 결과로 카지미에시는 야로슬라프 1세의 여동생이었던 마리야 도브로녜바와 결혼을 했습니다. 이 동맹은 오래 유지되는데, 후에 카지미에시는 자신의 여동생인 게르트루트를 야로슬라프 1세의 아들인 이자슬라프 1세와 결혼시키기도 했습니다. 카지미에시가 폴란드로 돌아와서 남서쪽에서 자리를 잡고 키예프 루스와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와 손을 잡고 폴란드의 나머지 지역들을 차례로 점령해나갑니다. 황제 하인리히 3세 역시 폴란드를 동맹으로 두고 보헤미아를 공격해서 브르제티슬라프 1세를 굴복시킵니다.


Michał_Stachowicz_-_Maria_Dobroniega_of_Kiev.jpg 키예프의 마리야 도브로녜바, 카지미에시 1세의 아내, 19세기

황제가 보헤미아를 견제해주면서 카지미에시는 이제 키예프 루스와 손을 잡고 폴란드 내 분열했던 다양한 지역에 대한 통합을 시작합니다. 먼저 그는 폴란드 남부 국경지방으로 혼란했던 다른 폴란드 지역에 비해서 안정을 누리고 있던 크라쿠프로 수도를 이전합니다. 아마 이 지역은 번영하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안정적이었기에 수도로 적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1047년에는 독립했던 마조프셰 지역은 물론 포메른 지역까지 다시 되찾게 됩니다.

Heinrich_III._(HRR)_Miniatur.jpg 황제 하인리히 3세


이렇게 폴란드의 지역 하나하나를 수복하고 다시 하나의 나라로 묶어간 카지미에시는 이제 어느정도 내부가 정리되자 국경지방과 이전에 잃었던 지역에 대한 수복을 계획합니다. 황제 하인리히 3세는 외부 세력이 너무 강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폴란드와 보헤미아등 주변 세력의 균형을 맞추려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카지미에시에게 폴란드 국왕 지위를 인정해주지 않은것도 포함되는데 아마도 카지미에시 역시 나라 상황 때문에 이를 받아들였고 그는 공식적으로 “폴란드 공작”으로만 인정받았습니다. 비록 폴란드 공작으로 황제에 종속될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폴란드의 위치는 황제의 봉토가 아닌 애매한 상황이었기에 카지미에시는 이익을 위해서 이것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이때 황제는 폴란드가 보헤미아에 뺏긴 슐레지엔 지방에 대한 권리를 보헤미아쪽에 인정해줬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카지미에시는 슐레지엔 지방에 대한 야먕을 드러냈으며 결국 1050년에는 슐레지엔 지방 대부분을 다시 점령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황제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황제는 이에 대해서 화를 냈지만 결국 보헤미아와 폴란드를 중재해서 슐레지엔에 대한 폴란드 영위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매년 폴란드가 보헤미아에 댓가를 지불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상황은 이후 보헤미아와 폴란드가 슐레지엔 지방을 두고 계속 분쟁을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Polska_1039_-_1058.png 카지미에시 1세 통치기의 폴란드 영토,©Poznaniak


나라를 하나로 묶은뒤 카지미에시는 이제 폴란드 내부 문제에 집중합니다.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체제를 개편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봉건제 형태의 기사단 제도를 도입하고 정착시킨것이었습니다. 폴란드의 군대는 이전의 친위대로 해석될수 있는 “드루지나Druzhina” 중심의 군 체제로 이들은 용병 느낌의 군대였기에 혼란한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이 되는 곳으로 자유롭게 옮길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토지를 바탕으로하는 봉건제도의 기사들은 토지 소유권이 중요하기에 자신의 영지를 하사한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거기에 얽매여 있었기에 좀 더 안정적 제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Monomakh's_hunting.jpg 드루지나와 함께 있는 키예프 루스 대공


카지미에시는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통치 군주였으며 또한 기사이자 군주로 자신의 군사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교육과 능력에 걸맞는 군주로 조각난 폴란드를 다시 하나로 묶었습니다. 물론 그는 “국왕”지위를 얻지는 못했지만 당시 강력한 제국에 도전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조각난 나라를 하나로 묶는 것이 더 중요했을 것입니다.


Casimir_I_of_Poland_(89920101).jpg 카지미에시 1세, 19세기


카지미에시 1세는 아내인 키예프의 마리야 도브로녜바와의 사이에서 적어도 다섯아이를 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장남인 볼레스와프와 차남인 브와디스와프 삼남인 미에슈코와 사남인 오토 그리고 딸인 시비엥스토와바가 있었습니다. 이중 오토는 어려서 사망했으며 네 명의 자녀가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1058년 카지미에시 1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은 장남인 볼레스와프로 그는 아버지가 조각난 나라를 다시 하나로 만들었다면, 뺏겼던 폴란드 국왕 지위를 다시 되찾은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Boleslaw_II_Szczodry_(274986).jpg 볼레스와프 2세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1037년 지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nstwo_mieclawa.svg

- 카지미에시 통치기 영토 지도 https://en.wikipedia.org/wiki/File:Polska_1039_-_1058.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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