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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스투프 가문 : 볼레스와프 2세

폴란드를 통치한 가문...여덟번째

by 엘아라

카지미에시 1세가 죽었을 때, 카지미에시의 뒤를 이은 인물은 바로 장남이었던 볼레스와프 2세였습니다. 물론 둘째아들인 브와디스와프는 영지를 나눠받았으며 아마 그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군주로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은 인물은 볼레스와프 2세였습니다. 카지미에시 1세 생전에 나라를 다시 하나로 묶는데 성공했기에 카지미에시의 뒤를 이은 볼레스와프 2세는 이런 나라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외교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전에 폴란드의 분열은 제국과 키예프가 동맹을 맺어서 폴란드를 공격했으며, 주변 다른 국가들 역시 제국을 지지하면서 이런 폴란드에 대해서 손을 놓고 있어서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에 그는 활발한 대외활동과 외교정책을 펼쳐서 폴란드 주변 국가들 모두를 폴란드와 우호적인 나라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런 그의 생각은 꽤나 성공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 국가들에 대한 내정 간섭이 커지면서 반발하는 세력들이 생겨나면서 결국 권력을 잃게 됩니다.


Boleslaw_II_Szczodry_(274986).jpg 볼레스와프 2세


볼레스와프 2세 시미아위Bolesław II Śmiały(대담한 볼레스와프 2세) 또는 볼레스와프 2세 슈초트리Bolesław II Szczodry(관대한 볼레스와프 2세)로 알려진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2세는 폴란드 공작이었던 카지미에시 1세와 그의 아내인 키예프 공주 마리야 도브로녜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볼레스와프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야 도브로녜가는 “대왕the Grea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1세의 딸이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애매한데, 학자들은 어머니가 슈바벤 공작의 딸이자 황제 오토 1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1042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렇기에 볼레스와프 2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폴란드의 군주가 되었을 때 그는 16살 정도이며 동생인 브와디스와프는 더 나이가 어린 14살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Kazimierz_I_Odnowiciel_(274971).jpg 카지미에시 1세, 볼레스와프 2세의 아버지


볼레스와프 2세가 즉위했을 때 폴란드는 다시 안정화된 상황이었습니다. 볼레스와스프 2세의 아버지인 카지미에시 1세는 분열된 폴란드를 통합해서 안정화시키는데 모든 힘을 다 쏟아부었고 이 때문에 그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기에 볼레스와프 2세가 즉위했을 때 폴란드는 안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2세는 늘 폴란드와의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경계했던 제국에 대해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폴란드의 분열은 사실 황제가 폴란드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경계했던것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볼레스와프 2세는 군주가 된 뒤, 폴란드 주변 국가들을 폴란드의 동맹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강력한 힘으로 폴란드를 위협하는 제국을 막을수 있다고 여겼으며 실제로 아버지가 외가인 키예프와 동맹을 맺고 난뒤에 폴란드에서 자리를 잡을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컸을 것입니다.


볼레스와프 2세의 첫 번째 주변 국가에 대한 개입은 바로 헝가리였습니다. 당시 헝가리 상황은 매우 복잡한 상황이었는데, 특히 헝가리의 국왕 언드라시 1세와 그의 동생이자 볼레스와프 2세의 고모부이기도 했던 벨러 사이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언드라시 1세와 벨러의 아버지였던 버줄은 사촌이었던 이슈트반 1세와 계승권을 두고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슈트반 1세는 후계자가 될 유일한 아들이 죽은 뒤, 후계자로 누이의 아들이었던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지명하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가문 내에서 이슈트반 1세의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이었던 버줄은 반발했다가 결국 이슈트반 1세에 의해서 갇혀서 눈이 멀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모두 헝가리에서 도망가서 보헤미아와 폴란드로 이동합니다. 이 세형제중 막내였던 벨러는 미에슈코 2세의 딸과 결혼해서 폴란드에 정착했으며, 나머지 두 형은 키예프로 가서 정착했습니다. 이슈트반 1세가 죽고 그의 조카인 오르세올로 페테르가 왕이 됩니다만 그의 헝가리 내 정책에 대해서 헝가리 귀족들이 반발했으며 결국 오르세올로 페테르는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버줄의 아들들이 다시 헝가리로 돌아왔으며 그중 둘째아들이었지만 기독교를 믿었던 언드라시가 왕위에 올라 언드라시 1세가 되었습니다. 언드라시 1세는 아직 아들을 얻지 못했을 때 형이 죽자 동생인 벨러를 폴란드에서 불러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아마도 언드라시 1세가 후계자 문제를 어느정도 안정적으로 가져오려는 것이었을 듯합니다. 하지만 1053년 언드라시 1세의 아들인 셜러몬이 태어나면서 형제는 이제 정적이 됩니다. 아들이 태어나자 언드라시 1세는 이제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확고히하려했습니다. 그렇기에 아들이 4살 무렵이었던 1057년 아들의 대관식을 치렀으며 다음해에는 황제 하인리히 3세의 딸이자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여동생이었던 슈바벤의 유디트와 셜러몬을 약혼시키기까지 합니다. 언드라시 1세는 동생인 벨러에게 충성을 강요했는데, 이미 성인이었던 벨러는 형의 이런 압박에 머리를 숙이는척했지만 결국 헝가리를 떠나 처가인 폴란드로 갑니다.


Andrew_I_of_Hungary_on_his_death_bed_(crop).jpg 동생인 벨러를 시험하는 언드라시 1세


아마 이런 상황은 볼레스와프 2세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견제중이던 제국이 폴란드 이웃 국가인 헝가리로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것처럼 여겨졌으며 결국 친폴란드 세력인 고모부 벨러를 헝가리 국왕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1060년 벨러는 폴란드의 군사들과 함께 헝가리로 돌아갔으며, 동시에 제국의 군대 역시 헝가리의 언드라시 1세와 그의 아들인 셜러몬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쪽은 벨러와 폴란드 세력이었습니다. 언드라시 1세는 전투 도중 입은 중상으로 사망했으며 셜러몬은 어머니와 함께 제국으로 도피했고 벨러는 헝가리의 국왕 벨러 1세가 됩니다.


Béla_elnyeri_a_koronát.jpg 조카인 셜러몬이 도망가고 난뒤 헝가리 국왕이 되는 벨러 1세


볼레스와프 2세는 벨러 1세를 돕는 것과 동시에 보헤미아 지방 역시 공격합니다. 보헤미아를 공격한 것은 복합적인 문제였는데 이때 보헤미아는 제국의 동맹이었고 아마도 헝가리 문제에서 보헤미아가 제국과 함께 셜러몬을 지지할 것을 우려해서와 또한 슐레지엔 지방에 대한 애매한 문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공격은 매우 큰 실패였습니다. 볼레스와프 2세 스스로도 거의 죽을뻔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으며 보헤미아와의 정책은 두가지 방향으로 바뀌게 됩니다. 보헤미아의 브라티슬라프 2세와의 관계 역시 애매해지는데 그와 평화를 위해서 누이동생이었던 시비엥토스와바를 브라티슬라프 2세와 결혼시켰지만, 또한 브라티슬라프 2세와 갈등을 빚던 브라티슬라프 2세의 동생이자 형과 갈등을 빚던 야로미르를 지지하기도 했으며 또 1063년 제국이 헝가리의 벨러 1세를 공격하려했을 때 제국과 제국의 동맹인 보헤미아를 고려했기에 헝가리를 돕지는 않다고 합니다. 이때 벨러 1세는 제국의 침공 직전 사망했고 제국군은 셜러몬을 헝가리 국왕으로 복귀시켰고, 벨러 1세의 세아들들은 도망쳐야했는데 볼레스와프 2세는 사촌들인 이들을 받아줬다고 합니다.



Vratislav_II.png 보헤미아의 공작, 후에 보헤미아의 국왕 브라티슬라프 2세


볼레스와프 2세는 1069년 키예프에 관여합니다. 볼레스와프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야 도브로녜가는 키예프 공주로 당시 키예프를 통치했던 야로슬라프 1세의 아들들은 모두 볼레스와프 2세의 사촌이었으며 또한 이자슬라프 1세는 볼레스와프 2세의 고모인 게르트루드와 결혼했었기 때문입니다. 1054년 키예프의 야로슬라프 1세가 사망하고 난 뒤 그의 세아들들이 함께 키예프를 통치했습니다만,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해서 가문내 다른 분가쪽 사람들이 키예프 대공 지위를 노렸으며 키예프는 분열합니다. 특히 1068년 중앙 아시아에 있던 유목민중 하나인 쿠민족들이 쳐들어왔는데, 키예프 내에서 이들에 대한 대처에 불만을 품고 결국 이자슬라프와 그의 형제들을 몰아냅니다. 이자슬라프는 처가인 폴란드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며, 이에 볼레스와프 2세는 이를 도와줬고 키예프에서는 다시 이자슬라프와 그의 동생들이 돌아왔습니다.


Seal_of_Iziaslav_I_of_Kiev_1052–1054.svg.png 키예프의 야지슬라프 1세의 씰 ©Лобачев Владимир


볼레스와프 2세가 키예프를 도왔을 때 어느정도 군사적 행동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1068년 폴란드로 망명했던 막내동생 야로미르가 프라하 주교가 되길 원했는데 이미 동생과 갈등을 빚었던 블라티슬라프 2세는 이를 원하지 않았기에 거부했습니다만, 다른 동생들이 이 막내동생을 지지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볼레스와프 2세는 야로미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하려했습니다만, 블라티슬라프 2세가 야로미르를 프라하 주교로 받아들이면서 잠시 평화가 유지됩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2세는 보헤미아를 극히 경게하고 있었기에 보헤미아와의 갈등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볼레스와프 2세가 보헤미아를 경게한 가장 큰 이유는 보헤미아가 제국의 동맹으로 폴란드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평화도 잠시 1071년 볼레스와프 2세는 다시 보헤미아를 공격했고 영토를 장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블라티슬라프 2세는 황제이자 자신의 동맹이기도 한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제소했고 황제는 이 둘을 중재해서 이들은 평화협정에 합의했습니다. 물론 그 다음해인 1072년 볼레스와프 2세는 평화협정을 깨고 다시 보헤미아를 공격했으며 슐레지엔 지방에 대한 조공 역시 거부합니다. 이런 상황에 황제는 하인리히 4세는 화가나서 폴란드를 정복하기 위해서 기사들을 소집했지만, 이 전쟁에 대해서 영주들이 부정적이었을뿐만 아니라 1073년 작센지방에서 반란까지 일어나면서 하인리히 4세는 아무런 힘을 쓸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 1074년 헝가리에서 문제가 생겨서 셜러몬이 쫓겨났을 때 다시 도와줄수도 없었습니다.

Heinrich_4_g.jpg 황제 하인리히 4세

이렇게 헝가리,키예프,보헤미아까지 볼레스와프 2세는 주변국들에 관여하면서 폴란드의 안전과 이익을 지키려했습니다만, 많은 지역에 대한 참견은 폴란드의 또 다른 변경지역에 대한 소홀함으로 이어졌고 이에 포메른 지방이 폴란드의 통치에서 떨어져나가게 된다고도 합니다.


1073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에 오르면서 정치적 상황이 복잡해지게 됩니다.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서임권을 두고서 갈등을 빚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사실 그레고이로 7세가 교황이 되었을 때 하인리히 4세는 작센 지방의 반란을 평정하기 바빴기에 교황과의 관게는 좋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1075년 반란이 진압된후, 황제는 이제 교황의 권위에 도전을 했으며 이런 황제에 대해서 교황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황제와 교황이 서임권을 두고 다투는 동안, 당연히 황제의 적이었던 볼레스와프 2세는 교황을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교황 역시 자신을 지지한 볼레스와프 2세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대접합니다. 이런 관계는 볼레스와프 2세가 다시 폴란드 왕위를 얻을 좋은 기회였습니다. 미에슈코 2세 이후 폴란드의 군주들은 폴란드 국왕으로 대관하지 못하고 “폴란드 공작”으로만 남았고 이것은 황제의 눈치를 더욱더 많이 보는 원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볼레스와프 2세는 황제와 교황간의 갈등을 이용해서 왕위를 다시 얻으려 했으며 결국 1076년 크리스마스에 교황대사가 참석한 상황에서 대관식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1077년 카놋사의 굴욕이후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볼레스와프의 폴란드 국왕 지위를 인정했다고 합니다.


Gregorius_(Vita_Gregorii_VII).jpg 교황 그레고리오 7세


볼레스와프 2세는 젊은 시절부터 폴란드 내 기독교 재건에 힘을 쏟았었습니다. 미에슈코 2세가 죽고난 뒤 폴란드 내에서는 내분이 일었고 이교가 성행한 것은 물론 보헤미아의 침공으로 교회등이 파괴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볼레스와프 2세는 이런 교회등을 재건하고 교회 조직을 개편하는 등의 일을 하게 됩니다. 특히 그는 폴란드 국왕이 되기 위해서 교황에게 잘보여야했기에 기존의 여러 수도원들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베네딕도 수도회를 받아들여서 폴란드 곳곳에 새롭게 수도원을 짓기도 했었습니다.


볼레스와프 2세가 폴란드의 국왕으로 대관하면서 그의 권력이 정점에 이른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도리어 그의 몰락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폴란드 내에서는 볼레스와프 2세의 힘이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우려하는 영주들과 귀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볼레스와프 2세가 중앙집권체제를 너무 강화해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고 또한 볼레스와프 2세가 헝가리와 키예프등에 너무 자주 관여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볼레스와프 2세에게 불만을 품은 인물의 중심인물은 바로 크라쿠프의 주교였던 스타니스와프였습니다.

Stanisław_Samostrzelnik,_Św_Stanisław.jpg 크라쿠프의 주교 스타니슬라우, 성 스타니슬라우


사실 스타니스와프와 볼레스와프 2세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크라쿠프의 주교는 교황청에 특사로 파견되어서 볼레스와프 2세가 국왕으로 대관할수 있게 도움을 줬을뿐만 아니라 볼레스와프 2세에게 베네딕도 수도회를 받아들이도록 한 인물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시점에선과 국왕과 주교 사이는 틀어졌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2세가 다른 외국 세력에 관여하러 떠났다가 아무런 이익없이 돌아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국왕은 짜증이 났고, 돌아와서 자신의 기사들의 아내가 귀족들과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그는 이들을 잔인하게 처벌했는데, 크라쿠프의 주교는 이들을 자비롭게 대하라고 충고했지만 국왕은 말을 듣지 않았고 이에 결국 화가난 주교가 국왕을 파문했다고 합니다.


Boleslaw_and_Wives.jpg 기사의 아내와 귀족들을 혹독하게 대하는 볼레스와프 2세와 이를 꾸짖는 성 스타니슬라우


아마도 주교와 국왕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와중에서 결국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주교가 국왕을 파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만, 정확한 상황은 애매하다고 합니다. 어쨌든 볼레스와프 2세의 파문은 큰 문제였는데 특히 수도 크라쿠프의 주교가 국왕을 파문한것이어서, 볼레스와프 2세가 크라쿠프 대성당에 와서 예배에 참석할 경우 예배등이 모두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중세시대에 이런 일들은 개인의 종교적 타격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국왕 역시 가만히 있지 않고 주교를 반역자로 고발했고 주교는 세속 법정에서 반역자로 판결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주교는 1079년 국왕의 손에 살해당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볼레스와프 2세는 원래 부하들을 보내서 주교를 처단하려했지만 부하들이 주교를 죽이길 주저하자 자신이 직접 주교를 죽였다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국왕은 미사중인 주교를 끌어내서 살해했다고 이야기하는데 미사중인 주교를 끌어내서 죽이는 것은 거의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는 절대 용납할수 없는 일이기에 그것은 아닐 가능성이 클듯합니다. 또한 다른 지역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 역시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은 주교의 시신을 조각내서 야수들에게 먹이로 주기까지 했다는 이야기 역시 전해져오며 심지어 조각난 주교의 시신이 버려졌을 때 독수리들이 주교의 시신을 지켰으며, 시신들이 기적적으로 한데 스스로 모이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고 합니다.


Józef_Peszka_-_Death_of_Bishop_Stanisław_Szczepanowski_-_MNK_II-a-474_-_National_Museum_Kraków.jpg 크라쿠프 주교를 살해하는 볼레스와프 2세, 후대 그림


주교의 살해에 대해서 폴란드 전역이 경악했으며 안그래도 볼레스와프 2세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은 이 기회를 틈타 볼레스와프 2세를 몰아내고 그의 동생인 브와디스와프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고 합니다. 볼레스와프 2세는 가족과 함께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도움을 줬던 사촌인 헝가리의 라슬로 1세에게 몸을 의탁했다고 합니다. 이후 볼레스와프 2세의 삶에 대해서는 애매한데, 그가 헝가리에 저질렀던 죄악 때문에 헝가리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독살당했다는 이야기와 그가 죄를 뉘우치기 위해서 수도사로 평생 은거하면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합니다. 볼레스와프 2세는 1069년 이전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성과 결혼해서 1069년 아들 미에슈코를 얻었습니다. 이 미에슈코는 아버지를 따라 헝가리로 망명생활을 했다가 다시 폴란드로 돌아왔으며 계승권리도 있었다고 합니다만 애매한 상황에서 독살당하게 됩니다.


Boleslaw_Smialy_(76848573)_(cropped).jpg 볼레스와프 2세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볼레스와프 2세가 죽고 그의 동생인 브와디스와프가 군주가 됩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군주가 된 브와디스와프 1세는 당연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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