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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스투프 가문 :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폴란드를 통치한 가문...아홉번째

by 엘아라

1079년 야심 가득했던 볼레스와프 2세가 쫓겨난뒤 폴란드의 통치권은 그의 동생인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처럼 대담한 능력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음모를 서슴치 않았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 휘둘리기도 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아마 브와디스와프 1세 시기는 귀족들의 힘이 강했기에 브와디스와프1세가 사람들의 눈치를 볼수 바에 없었으며 또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세력과 타협하거나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이전의 폴란드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가 더욱더 나빠지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Wladyslaw_I_Herman_(274995).jpg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브와디스와프는 형의 뒤를 이어서 폴란드의 통치자인 공작이 되었지만 그는 왕위에 오를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내부적으로는 형을 몰아낸 귀족들의 눈치를 봐야했으며 외부적으로는 황제와 보헤미아의 눈치를 봐야했기에 더욱더 독립적 세력인 국왕임을 주장하기 어려웠습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머리를 숙였고 그를 상위군주로 받아들이는 한편 당시 황제의 동맹이었던 보헤미아와의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는 보헤미아의 브라티슬라프 2세의 딸인 유디트와 1080년 결혼해서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그는 이전에 애매하게 버티고 있었던 슐레지엔에 대한 조공을 보헤미아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특히 브라티슬라프 2세가 1085년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대관할 때 그는 폴란드 국왕으로도 대관했고 이에 대해서 황제 역시 수용했었지만 정작 권리가 있었던 브와디스와프는 이에 대해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고도 합니다.


Michał_Stachowicz_-_Judith_of_Bohemia.jpg 보헤미아의 유디트, 브와디스와프 1세의 첫번재 야내


브와디스와프는 결혼전 “첩”에게서 아들인 즈비니그에프Zbigniew 가 있었습니다만 보헤미아의 유디트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6년만인 1086년 유디트는 아들인 볼레스와프를 낳았습니다만 아이를 낳고 사망하게 됩니다. 이때쯤 브와디스와프는 귀족들의 압력으로 헝가리에 있던 형 볼레스와프 2세의 아들인 미에슈코를 데려왔고 미에슈코를 왕위계승자로 인정해야했다고 합니다.


1089년 브와디스와프는 슈바벤의 유디트라는 여성과 재혼합니다. 유디트는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여동생이자 이전의 헝가리 국왕 셜러몬의 왕비였습니다. 셜러몬이 1087년 전사한뒤 과부가 되었습니다. 아마 브와디스와프는 황제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황제의 여동생인 유디트와 결혼했을 것이며 이것은 실제로 황제와의 관게를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유디트는 브와디스와프에게 정치적으로 엄청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추정하는데, 일단 황제의 여동생이었기에 정치적 영향력이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해져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유디트는 브와디스와프 시절에 최고의 권신이자 실제적으로 나라를 통치했다고 이야기되는 인물인 시에치에흐Sieciech와 연인관계라고 하며, 심지어 한 연대기에는 황제가 스캔들을 일으키는 자신의 여동생을 일부러 브아디스와프와 결혼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시에치에흐는 권력자로 매우 큰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브와디스와프는 이런 그의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를 하지않았고 그는 군주를 대리해서 군주의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연대기에 따르면 시에치에흐는 점차 야망을 키워갔으며 이 때문에 피아스트 가문의 후계자들을 살해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먼저 그가 손댄 인물은 바로 볼레스와프 2세의 아들이자 브아디스와프의 후게자로 인정된 미에슈코였습니다. 시에치에흐는 미에슈코를 독살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아마도 이 사건은 브와디스와프도 개입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조카에게 지위를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며 그렇기에 조카를 제거하는 것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유디트와 시에치에흐는 브와디스와프의 장남인 즈비니그에프을 유디트의 언니가 수도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으로 보내서 그를 성직자로 만듭니다. 성직자가 되면 세속의 상속권리가 사라지기에 즈비니그에프가 볼레스와프의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고, 아마도 브와디스와프 역시 이에 대해서도 묵인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시에치에흐의 힘은 점차 더 커져갔고 궁정에서 힘을 가지면서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이들을 추방하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당연히 이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이들이 늘어가는데 특히 1090년 포메른 지방에 대한 원정을 추진했고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지만, 이 지역에 대해서 혹독한 정책을 펴서 도리어 포메른 지방 전체의 반발을 샀으며 결국 브와디스와프는 포메른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잃어버리고 포메른 지방은 폴란드의 통치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은 안그래도 불만이 많았던 폴란드내 영주들의 불만을 더욱더 크게 만들었는데 특히 1093년 슐레지엔 지방의 영주들이 불이익을 얻으면서 이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고 이들은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에 있던 브와디스와프의 장남 즈비니그에프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이 반란은 치열한 전투 끝에 브와디스와프쪽이 승리를 했으며, 즈비니그에프는 시에치에흐의 포로가 되어서 그의 성에 갇히는데 매우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Denar_rys_sieciech2.png 시에치에흐의 문장이 있는 동전, 그는 자신의 문장이 들어간 동전을 주조할 정도로 힘이 이었다고 합니다.

비록 반란을 평정하긴 했지만 폴란드 전역에서 브와디스와프와 시에치에흐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고 결국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1907년 그니에즈노의 대주교인 마르친이 나서게 됩니다. 대주교는 영주들과 브와디스와프간의 교섭을 진행했는데 이때 나라를 세 개로 나눠서 브와디스와프와 그의 두 아들인 즈비니그에프와 볼레스와프가 각각의 지역을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브와디스와프는 이때 장남인 즈비니그에프의 상속권을 인정해줘야했다고 합니다. 영주들은 이 상황을 환영했는데 이들은 지산의 지역에 중앙의 힘이 큰 것을 원치 않았고 그렇기에 이렇게 분열된다면 자신들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Marcin.png 그니에즈노의 대주교 마르친


이후 정치적 상황은 볼레스와프와 시에치에흐간의 권력 싸움으로 발전합니다. 비록 즈비니그에프가 상속권을 인정받았다고 그는 권력 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반면 아마 자신의 이름과 같았던 선조들과 비슷한 성향을 가졌던 볼레스와프는 적극적으로 권력투쟁을 했을 것이며 시에치에흐는 이런 볼레스와프를 견제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볼레스와프에게 암살을 시도 했는데 볼레스와프는 이를 피해 무사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이때 브와디스와프는 이미 건강이 매우 나빴고 아마도 이전부터 시에치에흐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힘을 쓸수 없었을 것입니다.


Boleslaw_Krzywousty_(76799306)_(cropped).jpg 볼레스와프


결국 볼레스와프는 시에치에흐를 공격하기로 했고 형인 즈비니그에프와 힘을 합치기로 합니다. 시에치에흐에 불만을 품었던 많은 이들이 볼레스와프와 즈비니그에프를 지지했고 이들과 함께 했는데 중요한 점은 브와디스와프는 아들이 진격하자 아들들과 합류하지 않고 아들을 공격했던 시에치에흐에게 갔다고 합니다. 결국 마르친 대주교가 다시한번 중재에 나섰고 브와디스와프는 시에치에흐를 추방하는데 동의했으며 1101년경 시에치에흐는 폴란드를 떠나야했습니다. 후에 시에치에흐는 다시 폴란드로 돌아왔지만 그는 이후 눈이 멀고 아무런 힘도 쓸수 없었다고도 합니다.


이미 건강이 악화되었던 브와디스와프 역시 1102년 6월 4일 사망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두 아들인 즈비니그에프와 볼레스와프 간의 계승관계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가 죽은뒤 두 아들간의 다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Wladislaus_I_Herman_(89920314).jpg 브와디스와프 1세

그림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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