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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스투프 가문 : 즈비니그에프

폴란드를 통치한 가문...열번째

by 엘아라

1102년 브와디스와프 1세가 사망했을 때 폴란드는 그의 두 아들인 즈비니그에프와 볼레스와프가 폴란드를 나눠서 통치하게 됩니다. 볼레스와프는 남서쪽 지역이었던 마로폴스카Malopolska 지역을 받았으며 즈비니그에프는 북동부 지역이었던 베일코폴스카Weilkopolska 지역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형제는 곧 패권을 두고 다툼을 하게 됩니다.


Zbigniew_(112832610).jpg 즈비니그에프, 후대의 그림


즈비니그에프는 브와디스와프 1세의 장남으로 브와디스와프 1세가 보헤미아의 유디트와 결혼하기전 폴란드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기독교 식으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고 알려져있는데, 이런 이유로 후에 그의 지위가 애매해지게 됩니다. 아마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폴란드의 통치자가 아니었고 일부 지방의 통치권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애매한 결혼을 했어도 이 결혼은 정식 결혼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며, 브와디스와프의 궁정에서 즈비니그에프는 장남으로 인정받고 후계자로 여겨졌습니다.


즈비니그에프의 지위가 흔들리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의 통치자가 되면서 였습니다. 즈비니그에프는 브와디스와프 1세의 장남이긴했지만 부모가 기독교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이전에 볼레스와프 2세가 주교를 살해해서 쫓겨났고, 당연히 즈비니그에프의 부모의 결혼 상태 역시 인정받지 못했으며 이에 즈비니그에프의 지위 역시 인정받기 어렵게 됩니다. 게다가 브와디스와프 1세는 영주들의 강압으로 쫓겨났던 형의 아들인 미에슈코를 다시 데려오고 심지어 계승자로 삼으라는 압박을 받았는데 이것 역시 즈비니그에프가 적자로 인정받지 못해서던 것도 이유가 될수 있을 것입니다.


즈비니그에프의 처지는 동생인 볼레스와프가 태어나면서 더욱더 곤궁해집니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기독교식으로 정식 결혼한 보헤미아의 유디트와의 사이에서 아들 볼레스와프가 태어났고, 브와디스와프 1세는 명분이 분명한 볼레스와프를 확고한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애매한 지위의 장남은 교회로 보내서 그의 지위를 포기하게 만들기로 합니다.


Wladislaus_I_Herman_(99007392).jpg 즈비니그에프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내인 보헤미아의 유디트는 아들을 낳은 얼마뒤 사망했고, 브와디스와프 1세는 황제의 누이였던 슈바벤의 유디트와 재혼합니다. 일반적으로 슈바벤의 유디트는 야망이 컸던 여성으로 알려져있는데 특히 브와디스와프 1세의 총신이자 권력자였던 시에치에흐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와 함께 피아스트 가문을 파멸시키는 음모에 적극적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디트는 브와디스와프 1세의 적자 아들인 볼레스와프를 제외한 다른 계승자들을 제거하는데 시에치에흐와 공모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가장 위협적인 후보였던 볼레스와프 2세의 아들이자 브와디스와프 1세의 조카로 폴란드내 영주들의 지지가 컸던 미에슈코를 시에치에흐가 독살할 때 이 음모에 관여했으며 또한 브와디스와프 1세의 장남인 즈비니그에프를 자신의 언니가 수도원장으로 있는 크베들린부르크 수도원으로 보내서 폴란드의 세력과 단절시켰으며, 이후 사제로 서품받게 해서 속세로부터 단절시켜서 상속권을 포기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물론 유디트의 이런 행동은 어쩌면 언젠가 생길수 있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걸림돌이 될 인물들을 제거한것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디트는 딸만 낳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남편의 후계자가 될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할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남편인 브와디스와프 1세의 뜻일 가능성도 커보입니다. 미에슈코와 즈비니그에프를 제거한 것으로 이익을 얻은 인물은 브와디스와프 1세와 그의 후계자인 볼레스와프였기 때문입니다.

Hase_Quast_1877_S_12_Nr_3_Adelheid_II.jpg 슈바벤의 아델하이트, 크베들린부르크 수녀원의 통치 수녀원장, 슈바벤의 유디트의 언니


이렇게 즈비니그에프는 폴란드의 군주 지위와 멀어지는듯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내 정치적 상황은 즈비니그에프가 폴란드로 돌아올 기회를 만듭니다. 시에치에흐는 브와디스와프 1세의 궁정에서 점차 더 큰 힘을 가졌고 자신을 반대하는 영주들을 몰아내게 됩니다. 시에치에흐의 정적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브와디스와프 1세의 권위를 대리해서 자신에게 이익을 줄 인물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즈비니그에프였습니다. 비록 폴란드에서 멀리 떨어져있었으며 명분 역시 약했지만, 즈비니그에프는 어쨌든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들이자 피아스트 가문 출신으로 폴란드를 통치할 명분이 있었고 이들 영주들은 즈비니그에프를 크베들린부르크에서 폴란드로 데려옵니다.


즈비니그에프의 처지는 이때부터 매우 극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실 반 시에치에흐파 영주들은 브와디스와프 1세를 압박하기 위해서 즈비니그에프를 데려왔을 것입니다만, 시에치에흐와 브와디스와프 1세는 이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규정했으며 공격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상황은 복잡하게 흐르는데 처음에는 브와디스와프 1세에게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그는 즈비니그에프를 자신의 적자이자 장남으로 인정해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다시 브와디스와프 1세와 시에치에흐가 반격을 했고 결국 두 세력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브와디스와프 1세가 승리했고 즈비니그에프는 체포당했으며 시에치에흐의 포로로 혹독한 처우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잠시간의 승리는 폴란드 전역에서 브와디스와프 1세와 시에치에흐에 대한 반감이 너무나 커졌기에 결국 마르친 대주교의 중재로 폴란드는 세부분으로 나뉘어 브와디스와프 1세와 그의 두 아들인 즈비니그에프와 볼레스와프 이렇게 세명이 통치하게 됩니다. 이때 브와디스와프 1세는 즈비니그에프를 적자로 인정한 것을 다시 확인해줬는데 그래야만이 즈비니그에프의 통치권에 대한 정당성이 보장되며, 즈비니그에프를 지지하는 영주들을 달랠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Denar_rys_sieciech2.png 시에치에흐가 주조한 동전

이렇게 합의되는듯했지만 시에치에흐는 이런 상황을 위협으로 봤으며 결국 브와디스와프 1세의 아들들, 특히 볼레스와프를 견제하고 그를 살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볼레스와프가 즈비니그에프보다 명분이 더 컸기에 그를 먼저 살해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당연히 즈비니그에프에게도 위협으로 느껴졌을 것이며 결국 그는 동생인 볼레스와프와 함께 시에치에흐와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이때 형제의 아버지인 브와디스와프 1세는 아들들이 아닌 시에치에흐를 지지했는데 왜 이랬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도 합니다. 결국 두 세력은 부딪혔고 승리한 쪽은 아들들이었으며 시에치에흐는 추방당하게 됩니다.


이 승리이후 형제의 아버지인 브와디스와프 1세가 사망했고, 이제 폴란드는 형제에 의해서 분할되게 됩니다. 처음에 둘은 서로의 통치 영지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행동합니다. 하지만 장남이었던 즈비니그에프는 적자로 인정받은 이상 자신이 동생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상황은 두 지역의 각기 다른 외교 정책을 펼치면서 형제간의 갈등이 심해지게 됩니다. 포메른 지방에 대해서 동생인 볼레스와프 3세는 이전의 폴란드 군주들처럼 점령의 대상으로 봤습니다만, 형인 즈비니그에프는 포메른 지방과 잘 지내길 원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볼레스와프 3세가 포메른 원정을 떠나려했을 때 즈비니그에프는 기사단들에게 이를 만류합니다만, 결국 기사단들은 볼레스와프 3세의 원정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에 포메른은 즈비니그에프가 한편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공격합니다. 이런 상황은 외교문제로 형제간의 갈등이 더욱더 확대되는 요인이 됩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와 키예프와 동맹을 맺었으며 특히 키예프 대공의 딸인 즈비슬라바와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즈비니그에프는 이 결혼이 자신의 영지를 위협하는 행동이라고 여겼기에 결혼식에 참석을 거부했을뿐만 아니라 보헤미아를 끌어들여서 동생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볼레스와프 3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형의 통치 지역을 공격했을뿐만 아니라 역으로 보헤미아에 형과의 동맹을 끝내도록 했습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포메른 지방을 공격해서 포메른과 즈비니그에프와의 관계를 완전히 파탄내기도 했습니다.


Boleslaus_III_of_Poland_(89920380).jpg 즈비니그에프의 동생, 볼레스와프 3세


결국 1105년 형제는 모여서 중재안을 가지고 타협을 하려했습니다. 하지만 포메른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가 너무 컸기에 포메른 지방에 대한 합의는 실패합니다. 이후 볼레스와프 3세가 다시 포메른 지방을 공격하려 했을 때 즈비니그에프는 이를 돕길 거부했고,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와 헝가리의 도움을 받아서 형의 영토를 공격하기에 이릅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형의 영지를 거침없이 점령해나갔으며 특히 즈비니그에프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그니에즈노의 대주교 마르친 1세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쿠라쿠프의 주교 발드빈의 중재로 결국 즈비니그에프는 동생에게 항복을 했으며 볼레스와프 3세를 폴란드 전체의 통치군주로 인정했으며 영지 대부분을 뺏기고 마조셰프(마조비아)지방만을 유지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107년부터 즈비니그에프는 이제 동생에 대한 반란을 조직하려했고, 볼레스와프 3세 역시 자신의 경쟁자이기도 한 형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빌미를 잡으려했습니다. 결국 1107년과 1108년 겨울 사이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헝가리 동맹군과 함께 형의 영지인 마조셰프 지역을 공격했고 즈비니그에프는 동생에게 영지 권리를 이양하고 보헤미아로 망명했습니다.

Marcin.png 그니에즈노의 대주교 마르친 1세, 마르친은 늘 즈비니그에프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1109년 폴란드와 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황제 하인리히 5세는 볼레스와프 3세에 대한 공격 명분으로 즈비니그에프의 명분을 내세우게 됩니다. 황제는 볼레스와프 3세에게 즈비니그에프에게 폴란드 지역의 절반을 양도하고 황제를 상위군주로 인정하며 경제적 보상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 충돌의 승리는 볼레스와프 3세였는데 즈비니그에프는 이때 참전했는지에 대해서는 애매하다고 합니다.


이후 1110년에 볼레스와프 3세는 보헤미아를 공격하는데 이때 볼레스와프 3세는 보헤미아의 통치를 주장하던 소베슬라프 1세를 보헤미아의 통치자로 세우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비록 전투에서는 결국 승리하긴 했지만 정치적 상황은 소베슬라프 1세가 보헤미아의 통치자가 되기 애매했고 결국 1111년 볼레스와프 3세와 보헤미아의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와의 평화협정이 체결됩니다. 이때 둘은 서로가 보호하고 있던 경쟁자들인 즈비니그에프와 소베슬라프를 서로의 나라로 돌려보내기로 했고 즈비니그에프는 폴란드로 돌아왔습니다.


폴란드에 돌아온 즈비니그에프는 작은 영지를 하사받았지만, 폴란드에는 여전히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있었으며 이에 동생에게 동등한 영주권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당연히 볼레스와프 3세는 경쟁자인 형을 제거하기로 했으며 결국 즈비니그에프는 실명하기에 이릅니다. 실명한 즈비니그에프는 정치적 능력을 상실한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아마도 볼레스와프는 형을 효과적으로 제거했기에 이후 자신의 죄에 대해서 대중에게 고백하고 뉘우치는 행동을 했으며 형에게도 용서를 받았다고도 합니다.

Boleslaw_Krzywousty_(76799306)_(cropped).jpg 볼레스와프 3세


즈비니그에프는 실명이후 삶에 대해서는 기록이 애매합니다. 실명 직후 사망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수도사로 지내다가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즈비니그에프는 아마도 부모가 비록 기독교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지만, 사실 당대에는 이런 비기독교식 결혼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며 당시 폴란드 내에서도 법률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즈비니그에프는 장남이자 후계자로의 명분이 있었습니다만 정치적 문제로 그는 이런 명분을 상실했었습니다. 후에 다시 명분을 되찾았으며 폴란드의 공동통치자가 되었지만 야심이 컸고 능력이 있었던 동생 볼레스와프 3세에게 밀려서 결국 모든 것을 뺏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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