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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스투프 가문 :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와 형제들

폴란드를 통치한 가문...여섯번째

by 엘아라

1025년 폴란드의 첫 번째 국왕이 대관했다고 알려진 그해, 또 다른 폴란드의 국왕이 대관합니다. 바로 볼레스와프 1세의 아들이었던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였습니다.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후계자로 키워졌으며 여러 가지 정치적 군사적 기술을 닦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들의 정적들을 물리치고 결국 폴란드 국왕으로 대관하기 까지한 아버지와 달리 그의 정적들을 물리치지 못했으며 이것은 대내외적으로 폴란드의 혼란한 상황은 물론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의 지위 역시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ㅡ19세기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는 볼레스와프 1세와 그의 세 번째 아내인 엠닐다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의 아버지인 볼레스와프 1세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미 두 번의 결혼을 했다가 정치적으로 힘이 사라진 아내들과 헤어졌었는데, 이전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인 베스프림Bezprym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1세는 후계자로 헤어진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 아닌 엠닐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미에슈코를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습니다. 미에슈코 람베르트라는 이름은 할아버지인 미에슈코 1세의 이름과 리에주의 주교로 후에 성인으로 시성된 성 람베르투스의 이름은 딴것이라고 추정합니다만, 볼레스와프 1세가 계모인 할덴슬레벤의 오다의 영향을 받아서 이 이름을 준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오다의 아들중 람베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었는데, 어쩌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했던 볼레스와프 1세는 계모가 선호해서 아들의 이름을 딴 성인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아들 이름에 붙여서 계모에게 잘 보이려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볼레스와프 1세는 왕위에 오른뒤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이 이복동생들을 모두 추방하지만 말입니다.

헤르스탈의 피핀과 그의 중혼한 아내인 알파이다를 비난하는 성 람베르트,피린과 알파이다는 샤를 마르텔의 부모로, 샤를마뉴의 증조부모이기도 합니다.


볼레스와프 1세는 미에슈코 람베르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으며 훌륭한 교육을 받게 했으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여러 가지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 때문에 미에슈코 람베르트는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했을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대리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었습니다.


볼레스와프 1세


1013년 미에슈코 람베르트는 황제 하인리히 2세에게 가서 충성을 맹세하게 됩니다. 이어서 그의 아버지 볼레스와프 1세 역시 갈등을 빚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때 미에슈코 람베르크는 황제에게서 영지를 하사받았으며, 이 댓가로 그는 황제가 이탈리아로 가는 동안 그를 돕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쯤 미에슈코 람베르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략결혼을 하는데 그의 결혼 상대는 바로 황제 오토 3세의 조카였던 로트링기아의 리체차(리헨차, 릭사)와 결혼하게 됩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오토 3세와 매우 긴밀한 관계였으며 아마도 둘 사이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서 가문사이의 정략결혼을 하려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오토 3세에게는 정략결혼을 시킬만한 자녀가 없었기에 누나 마틸데의 딸이었던 리체차를 볼레스와프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미에슈코 람베르트와 결혼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1002년 황제 오토 3세가 죽고, 오토 3세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2세와 볼레스와프 1세가 갈등을 빚으면서 결혼은 흐지부지 되는듯했습니다. 그러나 하인리히 2세가 역시나 갈등을 빚던 리체차의 아버지와 평화를 체결하고 이후 볼레스와프 1세와 평화를 체결한뒤 두 가문의 혼담을 다시 중재하면서 결혼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결혼은 미에슈코 람베르트의 지위를 높이는 것으로 그는 황제의 조카로 황실의 혈통과 계승권을 주장할수 있는 리체차와 결혼하면서 그 역시 황실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제국내에서 훨씬 더 높은 지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그의 상황은 이후 그의 행적에 큰 도움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로트링기아의 리체차(리헨차)


1014년 미에슈코 람베르트는 당시 보헤미아의 공작이었던 올드르지흐에게 반 하인리히 2세 동맹에 가담해달라는 사절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미에슈코 람베르트는 보헤미아 공작을 설득하는데 실패했으며 그는 미에슈코 람베르트를 사로잡아서 황제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제는 폴란드쪽과 오랜 연결고리가 있는 작센쪽 영주들의 반발과 미에슈코 람베르크와 연결고리가 있는 친척들의 반발 때문에 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미에슈코 람베르트는 황제와의 전투에서 승승장구 했으며 폴란드가 힘을 얻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마 이런 상황은 그의 아버지인 볼레스와프 1세가 국왕으로 대관하는데도 큰 힘을 줬을 것이며 후계자로 미에슈코 람베르트의 힘을 완전히 굳힐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1025년 볼레스와프 1세가 사망한 뒤, 미에슈코 람베르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통치권을 얻었으며, 특히 1025년 크리스마스에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국왕으로 대관식까지 치루면서 공식적인 폴란드의 국왕이 됩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가 통치하게 된 지역은 중부 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이었으며 이 때문에 제국은 그를 무시할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상황은 아마도 주변에서 그와 폴란드를 견제하고 약화시키기 위해 내분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에슈코 2세에게는 두명의 형제가 있었습니다. 먼저 이복형인 베스프림과 동복 동생인 오토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죽은뒤 전통에 따라 아버지로부터 영지를 얻을수 있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볼레스와프 1세는 스스로 형제들을 모두 쫓아냈으며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기에 아마도 아들들에게 영지를 나눠주는 것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미에슈코 2세 역시 형제들과 영지를 나눌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미에슈코 2세는 아버지처럼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형제들을 나라에서 추방했으며 베스프림은 키예프로 오토는 제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미에슈코 2세는 곧 아버지처럼 제국의 복잡한 상황에 휘말리게 됩니다. 아마도 그 역시 아버지처럼 제국내의 힘을 강화하려는 요인이었을 것입니다만 이런 상황은 그가 곤경에 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시작은 1026년 황제 콘라트 2세가 대관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가면서였습니다. 황제가 자리를 비우자 콘라트 2세에 반대세력들이 제국내에서 힘을 키우려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이웃의 강력한 폴란드 국왕인 미에슈코 2세와 동맹을 원하게 됩니다. 황제 하인리히 2세가 죽은뒤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였던 오토 1세의 남성 후손들이 단절되었으며, 여러 사람들이 여러 명분을 통해서 황제위에 오르려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된 인물이 콘라트 2세였습니다만, 콘라트 2세의 의붓아들인 슈바벤의 공작 에른스트 2세나 콘라트 2세의 처제인 슈바벤의 마틸다는 명분을 통해서 자신이나 자신의 후손들이 제위에 올라야한다고 생각했고, 특히 황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힘을 확장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슈바벤의 마틸다는 미에슈코 2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엄청난 선물들을 했는데 거기에는 officiorum Liber quem ordinem Romanum apellant 라는 기도서도 있습니다. 이 기도서에는 이 책을 미에슈코 2세에게 헌정하는 마틸다의 모습으 묘사되어 있으며 미에슈코 2세를 이상적 기독교 국왕으로 언급하면서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미에슈코가 결국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로 결정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황제가 돌아오기전 이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1027년 황제가 돌아와서 이들을 물리칩니다. 하지만 미에슈코 2세는 자신의 약속을 지켜서 동맹을 돕기 위해서 왔으며 1028년 폴란드 군은 이웃의 늘 노려왔던 작센 지역을 공격했고 작센지역은 폴란드에 의해서 크게 황폐화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황제와 미에슈코 2세는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황제는 이 굴욕을 잊지 않았으며 폴란드에 대한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에게 기도서를 헌정하는 슈바벤의 마틸다


1029년 콘라트 2세는 명분을 가지고 다시 한번 폴란드를 공격합니다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1030년에는 미에슈코 2세는 도리어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작센을 공격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황제 역시 그저 손놓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황제는 헝가리와 동맹을 맺어서 남부 지방에 대한 안전을 확보했으며 또 키예프쪽과 동맹을 맺어서 1031년 다시 폴란드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미에슈코 2세는 이런 황제의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내부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황제 콘라트 2세


미에슈코 2세가 즉위했을 때 형인 베스프림은 키예프쪽으로 망명했으며 동생인 오토는 제국쪽, 특히 매형이 있는 작센쪽으로 갔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결국 이 둘은 각각 제국과 키예프의 힘을 빌려서 폴란드로 돌아갈 기회를 잡으려했고, 특히 볼레스와프 1세의 장남이었던 베스프림은 좀 더 명분이 컸기에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베스프림은 볼레스와프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로 헝가리쪽 공주로 알려진 여성의 아들이었습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아내를 맞고 헤어졌던 볼레스와프 1세는 당연히 처가가 힘을 잃게되자 베스프림이 태어났음에도 헝가리 공주인 아내를 버렸고 세 번째 아내인 엠닐다를 얻으면서 또한 베스프림이 아닌 엠닐다의 아들인 미에슈코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볼레스와프 1세는 생전에 베스프림이 교회에서 일하도록 하려했으며 이것은 아들을 아예 후계자에서 배제하는 것과 동시에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할수 있을 것입니다. 베스프림은 아버지가 국왕으로 대관식을 했을 때 그곳에 참석했다고도 알려져있으며 아마도 아버지가 죽은뒤 영지의 일부를 분할 상속받길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에슈코 2세는 형제들을 쫓아냈으며 베스프림은 키예프쪽으로 가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미에슈코 2세의 동복 동생인 오토는 제국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1031년 황제와 키예프의 아로슬라프가 동시에 폴란드를 공격했으며 미에슈코2세는 여기에 패배해서 보헤미아로 쫓겨갔으며 보헤미아의 공작이었던 올드르지흐에 의해서 감금당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베스프림은 자신이 볼레스와프 1세의 장남임과 키예프의 힘을 내세워서 권력을 뺏고 자신이 군주의 지위에 오릅니다. 특히 그는 제수였던 리헨차와 그녀의 아이들을 폴란드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해줬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에게 유리한 것으로 그의 경쟁자가 될만한 미에슈코 2세의 자녀들과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황제와 혈연관계로 이어진 리체차를 내보낸 것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만한 사람들을 제거한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키예프의 야로슬라프 1세의 인장


베스프림은 점차 폴란드 내에서 자신의 힘을 굳히려했을 것입니다만 당연히 반발이 컸으며, 특히 미에슈코 2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추방하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은 베스프림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점차 더 많아졌는데, 특히 독일에서 자신의 땅을 원하던 오토는 큰형인 베스프림이 다른 형인 미에슈코 2세처럼 자신이 권력을 독점하고 영지를 나눠주려하지 않는것에 불만을 품었다고 합니다. 결국 베스프림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이들이 너무 많았고 베스프림은 1032년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베스프림



베스프림이 죽은뒤 미에슈코 2세는 다시 폴란드로 돌아올수 있었지만, 황제는 미에슈코 2세가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폴란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에슈코 2세는 황제와의 평화를 위한 제안을 했으며 황제는 폴란드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폴란드를 분할하도록 합니다. 미에슈코 2세와 그의 동생인 오토 그리고 둘의 사촌이었던 디트릭Dytryk이 폴란드를 분할해서 통치하기로 합니다. 디트릭은 미에슈코 2세의 아버지인 볼레스와프 1세가 쫓아낸 이복동생의 아들이었는데 아마도 폴란드를 분할해서 힘을 나누려는 황제의 명목과 더불어 할머니가 작센쪽 인물이었기에 제국쪽 인물이었기 때문일듯합니다.


미에슈코 2세는 이렇게 국왕의 이름을 버리는 것과 폴란드를 분할하는 것을 동의해서 일단 제국의 위협을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오래도록 두고보지는 않았습니다. 1032년 이후 사실 미에슈코 2세는 폴란드의 국왕이라는 지위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폴란드에서 국왕으로 언급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분할된 영지를 되찾기 위한 노력했는데 동생인 오토가 1033년 살해당하자 그의 영지를 다시 얻었으며 이후 폴란드에서 기반이 약한 디트릭을 추방하면서 영지를 모두 다시 얻어냅니다.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19세기 작품


이렇게 미에슈코 2세는 다시 자신의 모든 것을 되찾았습니다만, 이전의 실패는 그의 권력기반을 흔들었으며 이에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이 있긴했지만 그를 반대하는 인물들을 억눌러야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미에슈코 2세의 노력은 얼마가지 못하는데 1034년 5월 갑자기 사망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일반적으로는 자연사로 알려져있지만 일부에서는 그가 베스프림의 지지자에 의해서 살해당했다고도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에슈코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후 혼란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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