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다닐 때는 출근하면 커피부터 내리는게 루틴이었다. 스타벅스나 다른 커피점에 가서 커피를 사갈 때도 있었지만, 일찍 출근하는 나에게 맞춰 오프한 커피점이 별로 없어 주로 내려마시곤 했는데, 내려마시는 게 나쁘지 않았다. 세상 편하니까.
그래서 나는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한참후에야, 아주 나중에야, 내가 사실은 커피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커피가 나에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전에 마시면 나의 섬세한 방광이 카페인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려야 했고, 오후에 마시면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했다. 카페인이 가져오는 모든 부작용-이뇨작용과 불면-이 나에겐 그대로 와서 꽂혔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게 삶의 질을 좀 더 높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회사를 다니면서는 화장실 다니는 것이 다소 귀찮지만 못할 것도 아니고, 오후만 커피를 피해서 잠자는데에 무리가 없도록 하자, 하며 살아왔다.
싱가폴에 와서는 커피를 마시는 일이 확 줄었다.
무엇보다 수업시간에 자꾸 화장실 가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 아침에 커피를 마시던 루틴을 확 없앤건데, 그래봤자 금단현상이나 그런게 하나도 없어서, 하 뭐야, 커피 없이 이렇게나 잘 살다니.. 했다. 공부를 위해 까페에 갈 때면, 디카페인 커피를 시키거나 캐모마일 차를 주문했다. 역시, 삶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커피 따위, 나에게 없어도 되는거였어.
그러나 사람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얼마나 모르는게 많은가. 나이가 들어도 나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는게 많은가.
싱가폴에 와서 달리기를 하고난 후, 하루는 카야토스트를 먹으러 가자, 하고 샤워후 바로 카야토스트를 먹으러 갔다. 카야토스트는 예의 카야잼과 버터를 바른 바싹 구운 토스트와, 수란, 그리고 커피가 함께 나온다. 카야토스트를 말레이시아에서도 먹었었고, 싱가폴에 여행와서도 먹었었는데, 아, 나는 잊고 있었다. 커피가 달다는 것을. 무방비 상태로 주문한 커피를 마셨는데, 와, 엄청 스윗한거다. 그런데 좋아! 놀랄만큼 좋아! 와, 이거 뭐지? 눈물이 날 것도 같고 웃음이 날 것도 같은 놀랍고 행복한 달콤한 맛이었다. 동네에 프랜차이즈가 아닌 저렴한 카야토스트 집이었는데, 하 여기 또 와야지, 하고 마음먹고 다음날도 또 가서 주문해 먹었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도... 나는 카야토스트가 좋았고, 수란이 좋았고, 커피가 좋았다! 나 단 커피 좋아하는 사람이었네!
한국에서는 아메리카노만 마셨더랬다. 어쩌다, 아주 어쩌다 캬라멜마끼아또를 마시기도 했지만, 아메리카노가 제일 좋았다. 그런데, 나 단 커피 좋아했네!!
이 단 맛이 너무 좋아서 나는 마트에 인스턴트 커피를 사러 갔다. 매대에 가득한 커피들을 사진 찍어서 챗지피티에게 카야토스트 먹을 때 나오는 달콤한 커피랑 제일 비슷한 거 찾아줘, 해서 챗지피티의 추천을 받고 커피믹스를 사왔다. 그래서 타먹었는데, 카야토스트랑 함께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아.. 역시 직접 가서 먹어야 하는건가. 그 후엔 가끔, 불쑥 이 단 커피가 생각나서, 배가 부른 어떤 날은 커피만 사서 마시기도 했다. 아, 내가 이렇게 달콤한 커피를 사 마시는 날이 오다니!!
그리고 바샤커피가 있다.
바샤커피의 이름이야 익히 들어 알고있었지만, 비싼 커피여서 별로 염두에 두질 않았더랬다. 나는 사실 커피맛이나 향을 잘 구분하는 사람도 아니고, 네스프레소 내려도 맛있다고 잘 먹는 사람이라서, 게다가 커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굳이 비싼 돈 주고 바샤 먹을 일이 뭐야, 해던거다. 그러다 싱가폴에 놀러온 친구가 바샤 한 번 가보고 싶다해서, 싱가폴에 거주하면서도 가볼 생각도 않던 바샤커피를 친구와 함께 갔다.
바샤커피에 들어가서는 일단 제일 위에 있는 싱글오리진 '시다모' 를 주문하고, 친구가 블로그를 찾아봤는데 좋다더라 하는 플레이버를 주문했다. 그런데 시다모 커피가 너무 맛있는거다!! 플레이버는 그냥 그랬는데 시다모가 너무 맛있어! 친구도 나랑 같은 의견이었다. 게다가 함께 주문한 피스타치오 크로아상도 맛있었다. 바샤커피가 크로아상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는데, 오, 너무 맛있어!
그 후로 싱가폴에 친구들이 오면 바샤커피를 함께 갔다. 여기까지 온 친구들이 대체적으로 바샤에 한 번 가보고 싶어하기도 했고, 시다모 커피의 맛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한 번은 시다모가 솔드아웃 이라 해 다른 싱글 오리진을 마셨고, 다른 한 번은 시다모를 함께 마셨는데, 친구는 나만큼 인상적으로 마시진 않은 것 같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가끔 그 시다모 커피가 생각나는거다. 너무 마시고싶어지는 거다. 그런데 바샤커피는 우리 집에서 멀고, 게다가 비싸고, 게다가 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줄 서서 기다리는 거야 할 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 대기하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책을 읽으며서 혼자 즐기며 마실 수가 있을까. 하 귀찮다. 시다모가 막 마시고 싶어지다가도 너무 멀다, 하는 귀찮음이 언제나 시다모를 마시고 싶은 욕망을 이겼다. 그래서 여태 못마시고 있었는데,
오늘은 생리를 시작하려고 했는지 세상 의욕이 없고 우울하고 다 귀찮고 짜증이나서, 수업 시간에 돌아다니면서 질문하고 답하는 것도 의욕을 보이질 못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아 하기 싫다.. 하다가 '바로 오늘, 시다모를 마시자!' 했다. 학교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바샤커피가 있는데, 여기는 테이크아웃만 된다. 그래, 테이크아웃 해서 공원에 앉아서 마셔야지, 하고는 큰 마음 먹고 하교후에 바샤커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바샤커피에 도착하자, 딱히 테이크아웃해서 마실만한 공간이 안보이고, 들고 바로 지하철을 타면 음료 마시는게 불법이라 마실 수도 없어, 게다가 내게는 따뜻하게 유지할 텀블러도 없어, 그런데 나는 시다모를 꼭 마시고 싶어... 그래서,
드립백을 샀다! 세상에, 알라딘에서 드립백 사면 7천원인가? 하여간 모르겠다, 나는 싱가폴 달러로 32불이나 하는 드립백을 샀다. 아 휴먼이여, 이게 그렇게 돈들일 일인가.. 총 12개입 이라고 했다. 드립백 하나에 3천원 꼴인가.. 하여간 시다모 드립백을 사면서, 헤헷, 피스타치오 크로아상도 샀다. 생리하느라 고생하는 나여, 먹고 마시자! 사치하자! 이국에서의 사 to the 치!!
나는 앞으로 열두번, 시다모를 마실 수 있다! 방 안에 시다모의 향이 퍼지겠지?
집에 돌아와 점심을 차려먹고 드디어 고대하던 커피타임.
그러나 드립백은 향이 퍼질만큼 나지도 않았고,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렇게나 마시고 싶어하던 그 맛이 아니었다. 하, 드립백은 어쩔 수 없는건가. 역시 직접 가서 마시는게 답인가...
그래도 아쉬운대로, 시다모가 마시고 싶어질 때면, 이제는 참지 않고 드립백을 내려마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