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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Sep 11. 2020

《여자는 인질이다》

아주 틀려먹었어.

《여자는 인질이다》, 디 그레이엄 ·에드나 롤링스 ·로버타 릭스비 지음, 열다북스, 2019


폴란드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로 불린다는 영화 《365》를 보았다. 줄거리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포스터만으로 야한 영화일 거라 기대하고 본 내가 나에게 잘못했다..


'라우라'는 오래 사귄 남자 친구가 있다. 대머리의 배 나온 남자 친구인데 그 남자는 여자 친구인 라우라에게 딱히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고 인생에 있어 여자 친구가 우선순위도 아니다. 그렇게 남자 친구에게 지칠 때쯤 납치를 당하는데, 납치범은 키 190센티에 식스팩을 가지고 있고, 툭하면 헐벗고 다니고, 엄청 잘생겼고, 악마가 빚은 좆을 갖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그녀가 납치된 집은, 벽난로만 해도 성인 남자 대여섯 명을 품을 만큼 커다란 어마어마한 저택이다.



납치된 라우라는 당연히 자기를 풀어달라 하는데, 납치범 '마시모'는 5년 전부터 너를 알게 됐고 너를 찾아 전 세계 방방곡곡을 헤맸다고 한다. 미친놈의 망상에 다름 아닌데, 그는 그녀에게 '네 남자 친구에게 너는 과분했'다고 말하며 그녀의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랑 섹스하는 사진을 건넨다. 네 남자 친구는 널 찾지 않아. 마시모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가 한 것은 불법 촬영이었고 그 촬영물에 대한 유포였다. 개새끼 아닌가 진짜. 그리고는 그녀에게 자신을 사랑할 기회를 주겠다고 한다. 널 속박하지 않아, 네가 나를 원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나를 사랑할 시간을 365일 주겠어,라고 해서 영화의 제목이 365일인데. 아니 미친놈이 납치를 했는데 무슨 속박하지 않아야. 게다가 이 남자는 마약을 밀수하는 폭력배다. 첫날 탈출하려던 라우라는 이 조직들이 살인하는 것도 목격한다. 그런 조직의 우두머리 남자가 ‘나는 너에게 강요하지 않을 거야, 네가 나를 원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너를 강제로 갖지 않아’,라고 한다. 이게 무슨 미친 소리냐. 납치해서 감금해놓고 강요하지 않는다니....




남자가 오래전부터 그녀를 우연히 본 적이 있어 찾아 헤맸다는 건 그 남자의 개인적 사정이다. 너무 다시 보고 싶고 그 여자의 애인이 되고 싶어서 그녀를 찾는 것 역시 그의 사정이다. 그리고 남자는 이탈리아에서 너무나 큰 부자이고 범죄 조직의 우두머리이니 그녀를 찾는 게 보통의 다른 사람들보다 쉬웠을 터. 어쨌든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져 꿈에 그리던 그녀를 만났다면, 납치 대신 다른 식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도 충분했을 거다. 왜냐하면, 위에도 언급했지만, 그는 보통의 다른 남자들보다 훨씬 우월한 조건들을 너무나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 엄청 잘생겼지, 키 190이지, 악마가 빚은 좆, 어마어마한 부자. 그러면 그녀를 찾았을 때 그녀 앞에 나타나서 다른 식으로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말을 다정하게 들어주고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준다면, 다른 남자가 6개월 걸릴 거, 이 남자는 6주면 됐을 거란 말이다. 그런데 왜 굳이 납치를 해서는 '너를 강제로 갖지 않겠어'라고 하는가. 이미 납치가 강제 아닌가.




여자는 당연한 반응을 보인다. ‘이런 식으로 나를 소유할 수 없어, 난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야’,라고 한단 말이다. 납치되어 있는 동안 그는 옷과 선물을 가득 안기고 자상하게 대해준다. 하루는 요트를 타고 바다에 나갔는데 뜬금없이 이 여자가 바다에 빠져버린단 말이야? 그때 이 남자가 구해주는데, 그 요트 위에서 "당신이 내 생명을 구해줬어" 하고는 감사해하며 그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우리는 ‘디 그레이엄’의 《여자는 인질이다》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인질로 잡힌 사람들이 인질범보다 오히려 구해주러 오는 경찰을 원망한다는 사실을. 애당초 인질로 잡히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에 대해 혹여라도 경찰들이 인질범들을 화나게 해 자기들이 잘못될까 봐 경찰을 원망한다는 것을. 잡혀 있는 동안 잘해주었다면서 인질범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을.



마시모가 라우라를 납치하지 않았다면 그 바다에 요트 타고 가서 빠질 일도 없었는데, 납치된 동안 빠져서는 '네가 나를 구했어'라며 사랑에 빠진다니! 라우라여, 그거 아니야!



여자는 남자가 보호해준다는 데에 감격해서 애초에 보호가 필요한 이유가 남자의 폭력 때문이라는 점을 잊는다. (『여자는 인질이다』, 디 그레이엄, p.190)



"아직도 왜 신호가 안 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리에만 쏘겠다니 올손은 너무나 친절하다고 감격했던 게 아직도 떠오른다. 당연히 올손은 강도였고,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목숨을 위협했던 범법자였으며, 언제든 우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 자꾸 그 사실을 잊게 됐다." (『여자는 인질이다』, 디 그레이엄, p.53)



스톡홀름 증후군 일반화 상황 2는 피지배 집단에 속한 개인이 지배 집단에 속한 친절한 특정 개인에게 보이는 반응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배 집단-피지배 집단은 예컨대 부자-빈자, 백인-흑인, 남자-여자, 이성애-동성애 집단이 맺는 관계다. 개인은 소속된 집단에 따라 특정한 종류의 트라우마를 겪거나, 친절을 베푸는 처지가 된다. 이건 예측 범위 내에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친절한 지배 집단 일원과의 접촉 자체는 무작위적이다. 즉, 피해 집단의 특정 일원이 지배 집단의 특정 일원과 접촉하게 될지 아닌지는 우연이 결정한다.


    예를 들어 남성이라는 집단이 여성이라는 집단에게 폭력적인 상황에서 특정 남자가 특정 여자에게 친절을 보인다면, 여자 개인은 이 친절한 남자 개인에 대해 스톡홀름 증후군 일반화를 겪게 된다. '남자는 안 믿는다', '남자는 믿을만한 족속이 못 된다'라고 말하는 여자가 내 남편이나 남자 친구는 예외라고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런 경우다. (『여자는 인질이다』, 디 그레이엄, p.124)



영화 《365》는 범죄를 미화한다. 납치, 감금이라는 잔인한 범죄를 ‘잘생기고 돈 많고 자상한’ 남자를 가해자로 만들면서 그 범죄에 명분을 준다. 잘생긴 남자라면 여자들이 납치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납치범과 사랑에 빠질 거라는 걸 영화로 만든다는 건 어떤 상상력이 가능하게 한 걸까.


분명히 말하는데 그 상상은 틀렸다. 아주 틀려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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