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락방 Sep 11. 2020

《조용한 아내》

그 신뢰는 어디 갔을까

《조용한 아내》, A.S.A.해리슨 지음, 엘릭시르, 2020



조디와 토드는 이십 년간 부부로 함께 살고 있다. 토드는 수시로 바람을 피우는데 조디는 이를 알고 있지만  그냥 넘긴다. 조디가 토드의 바람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토드도 안다. 토드가 바람을 피우긴 하지만 이들의 부부생활에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다. 조디는 조디 나름대로 토드에게 소심하게 복수를 하면서 이 시간들을 잘 버텨왔다. 이를테면 그의 사무실  열쇠를 빼내어 사무실에 오전 내내 들어갈 수 없게 한다든가 하는 식.


그러나 이십 년이 지난 지금,  토드는 조디에게 헤어짐을 말한다. 이번에야 말로 중독적인 사랑에 빠진 까닭이다. 선정적이고 성적 매력이 가득 찬 21세의 여성  나타샤, 친한 친구인 '딘'의 딸. 토드는 친구의 딸과 사랑에 빠졌고 심지어 그녀가 임신까지 했다. 토드는 항상 자식을 갖고  싶어 했지만 조디와의 관계에선 그것이 불가했다. 그들 부부는 자녀 대신 '프로이트'란 이름의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나이  많은 여자라고 해서 반드시 성숙함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젊고 어린 여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육감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는 어쨌든 어린 여성 나타샤는 몹시 흥분하고, 선정적인 여성을 상징하고 있고 조디는 언제나 차분하고  안정적임을 상징하고 있다. 토드는 조디와 불만 없이 살아왔으면서도 그러나 나타샤에게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전화하면서 지금 뭘 입고  있는지 묻고 그녀를 상상한다. 그녀를 만나고 싶고 안고 싶고 그녀가 임신을 했다니 또 좋은 아빠도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조디와  관계가 나빴던 게 아니라서 차근차근 이혼 얘기를 하고 싶지만, 나타샤는 기다려주려 하질 않는다. 빨리빨리. 아내에게 말했어?  어서 말하란 말이야. 우리 살 집을 구해야지, 결혼식도 해야 해.


결혼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전까지는  토드가 나타샤에게 매달렸는데, 결혼이 진행되어가고 같이 살 집을 마련하고 그렇게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토드는 나타샤로부터 엄청난  구속을 느낀다. 조디랑은 이십 년간 살면서 크게 소리 질러본 적도 없는데 나타샤와 보내면서는 분노하고 감정을 조절할 수 없게 된다.  나타샤랑 함께 살면서부터는 조디와의 관계에서 가졌던 그 안정감이 자꾸 그립다. 조디라면 이럴 때 차분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한마디로 빌어먹을 한심한 놈이다.



인간이란 이렇게 한없이 어리석어서 꼭  경험해야만 깨닫게 되기도 한다. 조디가 자신에게 주었던 게 무엇이었는지, 잃고 나서야 안다. 이십 년간 고요한 일상을 누릴 수  있었던 것, 안정적인 생활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 선정적인 젊은 여성과 함께 하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거다. 분명 사랑에 빠져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나타샤의 옆으로 온 건데, 그는 스트레스에 익사할 것 같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다른 여자에게 접근한다. 바람을 피워서 그 결과 이렇게 스트레스의 늪에 빠져버렸으면서 그는 또다시 바람피울 생각을 하는  거다.


바람피우는  이들은 잘만 산다. 그들 다수가 그렇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왜인가 하면, 대체로 사람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강한 동기나 지속적 노력 없이는 변하지 않는다. 개인의 기본 특질은 인생 초기에 발달하고 시간이 흐르면  침범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경험으로부터 별로 배우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려 들지 않으며,  문제는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나 발생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쁘든 좋든 간에 하던 일을 계속한다.  낙천주의자들이 끝까지 낙천주의자이듯이, 바람을 피우는 이들도 계속 바람을 피운다. 낙천주의자들은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서 두 다리가  부서지고 병원비를 대느라 집을 저당 잡힌 후에도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다. "운이 좋았어. 죽을 수도 있었잖아." 낙천주의자들에게  이런 유의 진술은 합리적이다. 바람을 피우는 이들에겐 이중생활을 하면서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p.36)




바람피운  남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아내의 이야기인데, 이 책은 되게 독특하다. 책 뒤표지에는 '아들러 심리학으로 샅샅이 파헤쳐 쓴  가정 스릴러'라고 되어있는데, 심리학으로 샅샅이 파헤쳤기 때문에 독특하다기보다는 그 문체가 굉장히 가만가만한 거다. 조용한 아내  라더니 정말 조용하네... 하고 책을 몇 장 읽지도 않고 생각하게 됐다니까? 스릴러가 가져오는 흥분이라든가 초조함이 느껴지기보다는  계속된 차분함이 있다. 또한 '바람피운 남편을 죽이려는 아내'라는 큰 타이틀 속에는 그 아내의 개인적 삶이 있다. 어린 시절과  대학시절 그리고 자신 안의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노력, 비로소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게 되는 때까지.

인간이란 매우  복잡한 존재이고 어느 한순간으로 그 사람을 파악할 수도 없으며 이십 년간 옆에 있었다 해도 마찬가지. 토드는 자신의 전 아내가  자신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걸 짐작이나 했을까? 조디는 남편이 헤어지고 나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우리 좋았는데, 다정했는데, 안정적이었는데, 그런데 나한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들 사이에 이십 년간 함께 해 쌓아 왔던  신뢰라는 것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신뢰라는 건, 어쩌면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고.



이것은 아내가 바람피운 남편을 죽이고자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전에 분명 사랑했던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토드가 조디에게 반했던 것, 조디와 있으면서 안정적인 기분을 느꼈던 것, 그리고  나타샤가 결코 줄 수 없는 것들을 조디로부터 받았던 것-사랑과 격려와 칭찬-을 나타샤의 옆에 가서야 깨닫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고, 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는 데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었는데.



그즈음  조디는 그의 인생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으나 여전히 신비의 기운이 감돌았고, 그로서는 확실히 가늠할 수 없는 원천에서 광휘를  내뿜고 있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제까지 그녀처럼 좋은 인상을 주고 싶었던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갖는 기대에 맞추어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 싶었다. 빛을 발하는  어스름 속, 지나는 차도 하나 없는 작은 시골 동네의 다른 세계 같은 고요 속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향긋한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고, 마음을 달래는 이 목욕물 같은 공기 속에서 그는 자신의 삶이 마침내 시작되었다고, 그녀야말로 자신이 숭배할  신이며 좋은 결과를 불러 울 부적이라고 느꼈다.(p.175)


다른  사람의 규칙에 따라 나의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디는 그를 높이 평가한다. 그의 성공, 그리고 약속을  실천하고 꿈의 영역을 걸어가는 그의 능력을 찬탄한다. 그는 조디에게 칭찬받는 게 좋다. 그녀의 칭찬은 몇 년간이나 그를 두둥실  떠오르게 하고 용기를 주었다. 또한 칭찬에는 그 자신을 약간 조절하고 궤도를 유지하게 해주는 엄격한 훈육 같은 것이 따라왔다.  그녀가 없었어도 그는 자기 길을 갈 수 있었을 테지만 그녀의 존재는 일종의 윤활유가 되어주었다. 모든 남자들이 그렇게 사랑받지는  않는다. (p.284)


조디 역시 마찬가지. 조디도 토드를 사랑했다. 토드에게만큼은 자꾸만 더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한 번 잘못하면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고, 백 번 잘못하면 백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에게  맞섰을 때, 그가 사과했을 때, 두 사람이 눈물을 흘렸을 때, 그들의 사랑을 재확인했을 때, 몇 번이고 이를 반복하면서도 그녀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단념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그는 토드였고, 그가 그녀에게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의 난동, 자기 본능에  충실하겠다는 방식까지도 소중했다. 그는 잔인하지도, 불친절하게 굴지도 않았다. 토드가 비열하거나 심술궂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토드는 자기를 언짢게 해도 또 한 번의 기회를 줄 사람이었고 백 번을 언짢게 하면 백 번의 기회를 줄  사람이었다. 그러나 토드는 반드시 자기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그러기로 결심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p.201)


이랬던  그들이었는데, 왜 토드는 나타샤에게 '사랑에 빠져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됐을까. 이랬던 그들이었는데 왜 조디는 결국  남편을 죽이고 싶어 지게 된 걸까. 이 감정들 모두 흔히 찾아드는 감정도 아니고 그 자체로 소중한 건데, 이 소중함과 사랑이 어떻게  이렇게 변질되어 버린 걸까. 사람은 뭐고 사랑은 뭘까. 너무 바보 같잖아. 토드가 바람을 피우지 않고 지금까지처럼 조디 옆에서 조디의  남편으로 살았다면, 이들은 서로가 처음에 가졌던 그 감정들을 소중한 감정으로 간직한 채 계속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사람은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더 큰 걸 갖고 싶어 하다가 추락해버리는 게 아닐까.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게 뭔지 자꾸만 제대로 들여다보려고 해야 하는 것인가. 사랑이 뭔지 제대로  느꼈으면서, 그리고 그렇게 느끼게 해 준 사람과 함께 살기까지 했으면서, 그러면서 추락하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인생 너무 부질없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긴데..... 조디..... 좀 더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 남편이 올 때, 친구가 찾아올 때 상차림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걸 자신을 위해 좀 차리고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보드카만 깡으로 마시지 말고 안주 좀 푸짐하게 해서 잘 좀 먹고 살 좀 쪘으면.....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작가의 이전글 《여자는 인질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