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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Sep 26. 2020

《포르노랜드》

우리가 살고 있는 포르노랜드

《포르노랜드》, 게일 다인스 지음, 열다북스, 2020


'다코타 존슨' 주연의 영화 《하우 투 비 싱글》에 보면 여자 1이 여자 2와 사우나에 가서 그녀의 음모를 제거하지 않음에 대해  언급한다. 네가 거기의 털을 제모하지 않았다는 것은 연애(섹스)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인즉슨, 섹스를 위해서라면 음모를  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성인 여자가 연애를 위해서 좀 더 정확히는 섹스를 위해서 보지의 털을 밀어야 하는가.

'게일 다인스'는 그것이 세상에 만연한 포르노 때문이라고 몇 번이나 사례를 들어 언급한다.

한  대학에서 여자 대학생들이 '그건 내가 원한 거야' 혹은 '나를 위해서야'라고들 말했지만, 얘기하다 보니 '보지 털을 밀지 않으면  남자 친구가 섹스하기 싫어해'라는 대답이 나왔던 것. 그것을 마치 부수적인 것처럼 얘기했지만, 여자들이 자신의 신체를 변형하면서  포르노를 산다고 얘기하는 거다.


몸에 대해 변형을 가하는 것은 모든 게 끔찍하지만, 특히나  보지털을 미는 것에 대해서라면 나는 더 끔찍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성인 여성에게 온몸의 털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보지라고 다를  것도 없다. '게일 다인스'는 이 책에서 여러 가지 포르노를 다루면서 당연히 '아동 포르노'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자, 음모  제거에 대해 보자.



여자의  몸을 아동화 하는 또 다른 기법 하나는 음모를 전부 제거해 외음부가 사춘기 전 여자의 그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수년간 포르노에서 여자의 외음부 전체 제모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이 기법이 그 표지의 기능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로 인한 한 가지 결과는, 현재 사실상 모든 여자 포르노 배우가 아동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려스러운데, 이용자가 유사-아동 이미지를 검색할 마음이 없더라도 포르노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그런 이미지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p.291)



나는 많은  여자들이 자신이 원한다는 명목으로 음모를 제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걸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지도 얘기한다. 위생과 청결을  언급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음모 제거가 시작된 건, 포르노였다는 것을. '김이설'의 소설 [환영]을 봐도 남자가  여자에게 '거기 털을 밀어라'라고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남자와 섹스하지 않는 여자라면,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여자라면, 감히 '흐음, 보지털을 밀어볼까' 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누군가는 거기에 대해서 충분히 사인을 보냈기 때문에,  그게 반드시 내 남자 친구가 아니라도, 내 여성 친구를 통해서 그리고 이렇게 영화나 책을 통해서 남자가 여자에게 더 즐거운 섹스를  위해 보지 털을 미는 것을 요구하는 걸 보기 때문에, '자, 왁싱샵에 가볼까'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든 싸인들이  없었다면 내 성기의 털을 대체 왜 민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 '내가' 원한 것이 맞는가. 왜 여자들은 포르노를 본 적도  없으면서 포르노 속의 여자들을 닮아가는가. 예쁘게 보이고 싶고 섹시하게 보이고 싶은 그 모든 기준이, '내가 꾸미는 걸 좋아해,  이러면 기분이 좋거든요' 하면서 가꾼 내 외양이, 어째서 포르노 속의 여자들을 닮아가는가. 아이처럼 입는 것도 마찬가지.  <유사 아동 포르노>라는 포르노의 장르는 성인을 미성년자처럼 꾸며 만들어지는 포르노다. 그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은  거기에서 보여주는 내용(이랄 것도 없지만), 설정, 고통을 본다. 저 미성년자가 나이 든 남자 어른의 꼬임에 넘어가서 처녀성을  빼앗겼어! 이 자극은 좀 더 큰 자극으로 더 큰 자극으로 옮겨간다.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 감상  후기 게시판도 수시로 찾아 들어가 본다. 거기에 보면 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이 더 큰 고통과 울부짖음을 표현할 때 쾌락을 느끼고  명장면이라 일컫는 감상이 수두룩하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진짜 고통스러워 보여 그것을 보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던 남자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이제 그거야말로 명포르노다, 라고 감탄하는 것들이 바로 그 안에 있었다.


무엇보다 포르노  감상후기를 올린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건 본인이 포르노를 본다는 사실이 곧 숨겨져야 할 것이 아님을 의미했다. 포르노 감상후기  게시판에서 남자들은 서로 좋았던 포르노를 공유하고 추천한다. 그리고 '토론'한다. 한 여자에게 두세 명의 남자가 들러붙어 얼굴에  정액을 뿌려대고 그걸 먹고, 목구멍에 고추가 들어가 여자가 오바이트를 하면서 울면, 그걸 보고 좋다고 환호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야 말할 것도 없고, '사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세게 박아주는 걸 좋아해'라는 고정관념부터, 그렇게 박히고 우는 여자들이 '걸레이고 창녀'라고 말하면서  이분법을 강화하고, 미성년자 역시 순진하지만 큰 자지를 좋아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루밍이 필요하다는 것도 포르노가 알려준다.  겁먹은 미성년자가 성인 남자의 어떤 그루밍에 쭈뼛쭈볏 옷을 벗는지. 인종 차별도 마찬가지. 인종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도 포르노가  강화한다. 흑인들은 대물을 가졌고 아시아인들은 작은 고추를 가졌으며 백인은 그 중간 어디쯤. 포르노가 보여주는 여성에 대한 편견,  인종에 대한 편견은 그렇게 알게 모르게 영상을 보는 이용자들에게 침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공유된다.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광고까지. 포르노가 깔리지 않은 곳이 없다. 영화 속에서도 포르노를 이용하는 것은 공공연히 등장하고, 포르노에서 설정을  가져온 뮤직비디오들도 나온다. 포르노를 보지 않았던 여자들도 그런 영상들을 본다. 저렇게 허리를 비트는 게, 저런 옷을 입는 게,  저런 표정을 짓는 게 남자들한테 사랑받는 것이라는 걸 여자들도 습득한다. 아이들도 자신의 외모를 평가하고 괴로워하고, 나를 위한  것이라며 털을 민다.


만약 여성이 아닌 다른 대상이, 그러니까 흑인이나 유대인이 맞고 입에  이물질이 들어가 토하는 영상이 반복적으로 보인다면, 사람들은 집단으로 항의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그 일을 당하는 영상에  대해서는 환호하며 이용된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아주 많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서양  남자와 교제하는 여자들을 보며 한국 남자들이 욕했던 것, 유학이나 어학연수에 다녀온 여자들을 놀았던 여자로 표현했던 것, 어린  여자들에게 다가가 그루밍했던 것. 모두 포르노의 영향이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던 내 많은 여자 친구들은 한국에 와 교제한  남자들로부터 '너 거기 갔다 왔다며, 그럼 너도 서양 놈 좀 알 거 아냐' 하면서 큰 좆을 맛본 여자로 후려치기 했다. 아, 이게 다  포르노 영향이구나.

섹스 도중 정액을 먹으라고 했던 것도, 목구멍 깊숙이 고추를 넣는 것도, 항문에 넣고자 한 것도,  얼굴에 싸면 안 되느냐 묻는 것 모두, 포르노를 보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들이었다. 포르노를 전혀 접하지 않은 남자라면(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자의 얼굴에 정액을 뿌려댈 생각을 감히 어떻게 할까.



'조셉  고든 래빗' 주연의 영화 《돈 존》에서 남자는 포르노 중독에 걸려있다. 그는 당연히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에만 능하고,  그래서 '젊고 예쁘고 쭉빵한 여자'를 사귀게 되었을 때 뿌듯해한다. 그 여자를 집에 데려갔더니 아버지는 '니 여자 친구 귀엽다'며,  당연히 성적 대상으로만 평가한다. 그러나 이렇게 예쁘고 섹시한 여자라도 돈 존을 만족시킬 수 없다. 돈 존은 여자 친구와 섹스 후에  여자 친구가 자는 틈을 타 포르노를 본다. 포르노를 찾아봐야만 비로소 만족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일은 비단 영화에서만 보여주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게일 다인스도 이런 남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좀 더 큰 자극, 좀 더 큰 자극을 찾는 남자들.



포르노는  강간 문화를 형성한다. 여성과 인종에 대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여성이 고통을 당하면서도 좋아한다고 보기 때문에 여성에게 그렇게  고통을 가하는 것을 해보고 싶어 하게 만든다.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를 본다'는 것이 곧 '강간범이 된다'는건 당연히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포르노는 강간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유사 아동 포르노도 마찬가지. 유사 아동 포르노를 만드는 이들조차도 '아동에 대해 이러면 안 된다'라고 동참하지만, 그러나 이게 얼마나 모순인가. 여자를 아동처럼 꾸며서 딸로, 순진한 옆집  소녀로 만들고 성적 폭력을 가하는 일을 보여주는 게. 유사 아동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진짜 아동 포르노를 찾게 된다는 것도  역시 아니지만, 그러나 유사 아동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이 진짜 아동을 성학대하는 영상으로 가게 될 확률은 매우 높다는 거다.  역시, 현실 폭력으로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것. 포르노를 보는 놈이 강간범이다,라고도 말할 수도 없고 유사 아동 포르노를  보는 놈들이 아동 성학대범이 된다는 것도 아니지만, 게일 다인스는 실제 아동 성학대범 재소자들과 만나면서, '원래는 성인과 정상적  연애를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남자들의 경험에 대해서도 들려준다. 포르노는, 성학대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일전에도  SNS를 통해 아주 짧은 여성 학대(포르노) 영상을 보고 신고하면서, 한 사람(여자)이 다른 사람(들, 남자)에게 고통을 당하는  장면을 도대체 왜 보고 싶어 하는지, 이런 걸 만들고 보는 사람들의 영혼이 괜찮은 건지 오래 생각한 적이 있다. 그날 밤에는 엄마  옆에서 자면서, '엄마, 이나라 남자들... 정신이 찢어진 것 같아, 건강한 정신이면 그런 걸 보면서 어떻게 견뎌'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엄마, 남자들 다 영혼이 찢어졌어.



한 여성이 고통을 당하는 걸  '보면서' 자위를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이게 왜 '나의' 상식이기만 해야 할까. 토하고 똥구멍에  찔리고 얼굴에 배설물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쾌감을 느낀다는 게, 그게 어떻게 건강한 삶을 형성할 수 있을까. 지나가는 여자를 보는  시선을 대체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까.

당신들의 영혼은 파괴되었다.

게일 다인스는 포르노에 한 번이라도 노출된 남자는, 그 이전으로 아무리 돌아가려고 해도 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당신들의 영혼은 찢어졌다. 그리고 보고, 보고, 또 볼 때마다 영혼을 지옥으로 밀어 넣는 거다.




나는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이, 포르노를 '소비하는' 남자들이 '누구 좋으라고' 그걸 보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걸 보는 그들 자신을 위한 걸까? 포르노를 제작하는 사람들, 그들이 아주 큰돈을 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포르노 '제작자'들이다. 포르노를 보는 사람들도 '저 영상 속의 여자는 괜찮을까' 같은걸 생각하지 않겠지만, 그걸 만드는  제작자들은 그걸 보는 남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아무 생각이 없다. 더 큰 쾌락을 너희에게 안겨줄게,라고 광고하지만, 그것은  남자들의 정신도 피폐하게 만들 뿐이다.



게일 다인스는 십 대 포르노를 구글에 검색하면 몇백 개가 뜬다고 했다. '십 대 포르노'라는 게 말 자체가 형성되어서도 안되지만, 그런데 몇 백개나 된다고? 나는 이 부분을 읽다가 구글을 열어 똑같이 검색해보았다.


관련 글이 20억 개가 뜬다. 이 책이 2010년에 쓰인 책이니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났고, 십 년 동안 이렇게나 급속하게 확산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영상 속의 여자들 역시 더 많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게일 다인스'의 멘털은 괜찮을까, 를 걱정했다. 활자로 읽는 것만으로도 언급되는 포르노의 장면들은 내 멘털을  찢어지게 만들었는데, 이걸 직접 연구한 게일 다인스는 괜찮을까. 남자들과 연애하면서 '이 남자가 내가 보기엔 황당한 요구를  하는데' 라며 걱정하는 여자들을 보면서 괜찮았을까. 포르노는 그저 판타지일 뿐이에요, 우리는 조금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되죠,라고 말하는 남자들을 보는 게 괜찮았을까. 무엇보다 그 영상들을 보았던 것들은 괜찮았을까.



이 책의 결론은 기운이 빠진다. 게일 다인스 역시 해결책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인으로서, 집단으로서 저항해야 한다는 것.




우리  문화의 포르노화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내게 마법 같은 해결책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 우리는 거대한 경제 구조와  맞닥뜨리고 있다. 포르노 산업과 싸우려면 개인으로서, 그리고 집단적 운동으로써 저항해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저항은 개인적  층위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희망적인 시작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 중에는 포르노를 이용하는 남자와 데이트하지 않겠다는 여자  청년, 자녀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길러주는 모부, 체계적인 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교사, 섹슈얼리티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포르노를 보이콧하는 남자도 있다. 더 넓은 층위의 사회적 움직임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러한 개인적 형태의 저항이 현재로서는 가장  의미 있다. (P.320)



하아- 한숨부터 난다.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것뿐이란 말인가.


다시,  영화 《돈 존》에서 남자도 나이 든 여자를 만나 '눈을 보고 대화하는'것의 기쁨을 아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서서히 포르노  중독을 치료해가는 것. 섹스를 위해 섹스를 했던 사람이 진정한 교제를 시작하는 거다. 그건 그 남자에게 그전까지 몰랐던 일이었다.  사실 이거야말로 판타지 아닌가 싶지만, 그러나 대화의 기쁨을 알아가는 것, 눈을 마주치고 애정을 담는 것이야말로 포르노에  저항하는 방법일 것이다.

몇 년 전까지 나 역시 포르노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이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건 내가  생각하는 포르노가 그저 섹스를 위한 섹스 정도였기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섹스하고 싶어서 섹스하는 걸 보는 게 뭐가 잘못이야,라고 생각한 건데, 그건 내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영상을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와 또 많은  여성들이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칠게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편에  서게 되는 거다. 현실을 몰랐다. 아주 몰랐다.



나의 개인적 저항, 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그런 포르노를 보았던 남자이면서, 그러나 포르노를 옹호하는 새끼들에 대해 경멸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일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봤자, 학대당하는 여자를 보는 걸 즐기는 놈들임에 틀림없으니까. 나는 그런 놈들의 영혼이 말짱할 리 없다는 타당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게일  다인스는 자신과 같이 포르노를 연구했던 '로버트 젠슨'에 대해 언급하는데, '로버트 젠슨'을 검색해보니 국내에는 그의 저서가  번역된 게 없는 것 같다. 《절정의 순간:포르노그래피와 남성성의 종말》의 저자라는데, 이 책도 꼭 읽어보고 싶으니 누군가가 어서  빨리 번역해서 내주었으면 좋겠다.



포르노는 혐오 표현이다. 여성과, 인종과,  아이에 대한 혐오 표현이다. 표현의 자유로 허락할 수 없는, 혐오 그 자체이다. 여성차별을 견고히 하며 아동학대를 인정하고  인종차별을 강요하는 혐오 표현이다. 포르노를 보고 또 보는 당신들은, 강간으로 가는, 아동 성학대로 가는 바로 그 중간을 살고  있다. '나는 그런 놈이 아니야'라고 확신하는가? 지금 감옥에 가있던 아동 성학대범들도 그랬다. 당신들은 강간범이 되기 직전에  놓여있다. 아동 성학대범이 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2008년  3월 나는 코네티컷주 교도소에서 아동 포르노 소지죄로 수감 중인 남자 일곱 명(이 중 셋은 아동 성폭력 가해자였다)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들 중 누구도 소아 성도착자의 정의에 들어맞지 않았다. 일곱 명 전부 자신은 성인 여자와의 섹스를 선호하지만,  일반적인 포르노에 질렸다고 말했다. 이 중 다섯 명이 처음에는 PCP(pseudo-child pornography) 사이트에  접속했고, 그러다가 실제 아동 포르노로 넘어갔다. 이는 소아 성도착자와 비소아성도착자 모두에게 PCP 사이트가 "성인 포르노와 아동  포르노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는 러셀과 퍼셀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현재 이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실증적 연구가 없으므로 특정  연구 결과를 지목해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러셀과 퍼셀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리고 일화적 증거가 그 주장의 타당성을  뒷받침한다면, PCP의 인기가 계속되고 또 더 많아지는 현상이 아동 성폭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초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실제 아동 포르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제작 과정에서 학대당하는 아동의 수가 늘어날 것이다. 둘째, 아동  포르노를 실제 아동과의 섹스를 시도하는 데 디딤돌로 삼는 남자들에게 성폭력을 당할 위험에 노출되는 아동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P.314)



대규모  연구가 그 뒤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일 다인스의 이 주장은 현실이 됐다. 위에 내가 검색해본 것처럼, 십 대 포르노의 영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우리는 어제, 오늘의 뉴스에서도 아동을 대상으로 한 범죄자들에 대해 지겹게 듣고 있지 않은가.


퀘일과  테일러는 아동 성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일부 응답자에게 포르노는 실제 가해를 대체하는  대응물이었지만, 다른 일부에게 그것은 실제 가해를 위한 청사진이자 자극제로 작용했다." 아동 포르노 이용자 중 실제 아동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비율은 연구마다 다르며 낮게는 40%, 높게는 85%까지 나타났지만, 이러한 증거가 중요하게  시사하는 바는 아동을 성애화한 이미지를 보고 자위하는 행위는, 상당 비율의 남자에게 있어 실제 아동 성범죄와 연관된다는 점이다. (P.315)



 

남자들은 자신의 의지로 포르노를 살고 있고, 여자들은 의지는 아니었으되 끌려가서 포르노를 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모두 혐오를 살고 있다.


나는 포르노에 반대한다.

그리고 포르노의 편을 드는 사람들에 반대한다.

나는 반포르노 주의자다.

나는 포르노를 살고 싶지 않고, 다른 사람들 역시 포르노에 살지 않기를 원한다.

나는 포르노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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