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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Oct 06. 2020

《파이와 공작새》

정말로 파이와 공작새가 나온다

《파이와 공작새》, 주드 데브루 지음, 북폴리오, 2018

로맨스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할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실례인지, 어떤 식의 대화와 행동이  상대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로맨스 소설이야말로 남자들이 읽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다. 남자들은 사랑을 포르노로 배워야 하는 게 아니라, 로맨스 소설을 읽음으로써 좀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거다. 포르노  까지는 아니지만  '19금 성인영화'라는 걸 보았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여자가 얼마나 성적대상화 되는지에 당황했었다. 그러니까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가 사랑을 느끼고 성적 욕망을 느끼는 게 아니라, 여자는 애초에 성적 대상일 뿐인 거다.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여자를 성적 대상화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구나. 그 안에서 성적 대상화하지 않고 하나의 사람으로, 동등한 인간으로 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겠어. 맙소사..



그래서 '주드 데브루'의 이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게 유감이었다. 물론 중반을 넘어서면 괜찮긴 하지만, 남자 주인공 '테이트'가 얼마나 매력적인 영화배우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자 주인공 '케이시'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당당하고 자존감 높은 여자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주드 데브루는 대부분의  여성을 다 골빈 여자 취급해 버린다. 연극 <오만과 편견>의 주연 두 배우가 사랑에 빠지는 걸로 소설은 큰 축을 잡는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 오디션을 보는데, 상대인 유명 남배우 테이트 앞에서 아무도  제대로 대사 하지도, 연기하지도 못하고 그저 침만 흘리는 걸로 묘사하는 거다. 물론, 전문 배우들이 아니고 마을 주민들 중에서 뽑는  오디션이니 연기가 어설프고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거야 당연하달 수 있지만, 어쩌면 다들 그렇게 남자 배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가. 여자들이란 잘생긴 남자 앞에서는 제대로 사고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의 여주인공 케이시가, 테이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케이시가,  편견으로 인해 테이트에게 매력을 1도 못 느끼는 케이시가, 요리사이며 연기에는 관심이 1도 없던 케이시가, 우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역을 맡게 되면서 이 소설은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거다. 너무.. 좀 너무하지 않냐... 


너무도  전형적인 패턴이라서 나는 주드 데브루와 나 사이에 세대차이를 느꼈다. 로맨스 소설을 현대를 사는 여성이 현대를 보는 기준으로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모든 여자들이 선망하는 남성을 나는 싫어하면서 생기는 로맨스라니. 게다가 그 남자는 잘생기고 섹시하고  인기도 많은데 돈도 캡 많아.... 


아무튼 연기나 연극에 대해 주드 데브루는 얼마나 알고 이걸 쓴 걸까. 테이트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다아시를 미워하는 엘리자베스 역을 잘한다는 설정이라니, 좀.. 너무하지 않냐...

내가 로맨스 소설과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전형적인  패턴-환상적인 남주와 그를 심드렁하게 보는 여자-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어. 전형적인 패턴보다 더 싫은 건, '특별한  여자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 다른 여자들을 모두 똥 멍청이로 만들어버리는 거다. 이러지 마세요, 진짜...



아마도  그간 로맨스 소설을 줄기차게 써온 작가인지라 이 전형적인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세대차이를  느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그저 나쁜 로맨스 소설이었냐 하면 그건 그렇지가 않다.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오만과  편견> 소설 속에서 미성년자와 성인 남자가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장면이 있었는가 본데, 그 장면에 대해 현대적 연극에서  재해석을 한다. 미성년자를 꼬이는 건 범죄이며, 그것이 그 당시 미성년자의 '선택'이었다 해도 결코 여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오해와 이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주드 데브루는 '여자'와  '남자'의 성역할이 있는 것처럼 시종일관 얘기하지만, 어떤 것이 나쁘고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를 헷갈리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케이시 스스로가 말한 이 뜨거운 여름의 불장난에 대해, 케이시가 느끼고 결심하고 선택하는 것들이 와 닿는다. 한 남자에 대해  오해를 하고 그에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에게 처음부터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의 말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를 판단했던 것, 거기에 이른 후회까지. 또한, 자신이 그에게 정식 여자 친구가 아니라 그저 이 여름의 불장난으로  취급될까 봐 걱정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까지. 한 사람에게 '당당한 옆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할 거라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갈등까지. 사랑에 빠지고 내가 그에게 '내가 생각하는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가슴 아파하는 건 대부분  다 겪어보는 감정의 흐름이 아닌가. 또한, '상처 받기 싫다'라고 생각하는 것까지. 자존감 높은 사람이 '내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부터 시작해서,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나' 하는 것까지, 연애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맞닥뜨리는 감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과 연애의 시작에 있어서 디테일을 아주 잘 살렸다고  생각한 건, 케이시와 사랑에 빠지게 된 '테이트'의 생각 때문이었는데, 테이트가 케이시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건,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과 웃음 포인트가 같았다는 데 있었다. 자신이 웃는 부분에서 케이시도 웃는다는  것. 나는 이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그걸 표현해준 작가도 좋았고. 또한 육체적으로 어마어마한 성적  매력을 서로 풍기도 또 성관계도 만족했던 그들인데, 케이시가 그 육체적 결합도 좋지만, 대화를 나눈 후에 관계가 더 단단하고  안정적이 된 것 같다고 느끼는 점들도 좋았고. 



나 역시 대화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연애를 시작하면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반하고 사랑에 빠지는 건, 대화가  아닌 다른 것들이어도 가능하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다른 무엇보다 대화가 중요하다. 어떤 모습에도 사랑에 빠지다가 질려버릴 수  있지만, 대화가 잘 통하는 데에야 뭐 버릴 게 없다. 나는 사람이란 본디 외로운 존재라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외로운  영혼을 달래주고 채워줄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혼자인 게 편한 사람도 있고 또 혼자인 게 익숙한  사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랑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런 사람을 얻기란 너무나 힘든 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만났다면 그 손을 놓지 말아야 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뿐만 아니라 상대 역시도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또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하다 여길  수 있다. 쭉쭉빵빵하거나 근육이 울룩불룩한 몸을 최우선으로 칠 수도 있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최우선으로 칠 수도 있다. 이성을  볼 때 돈을 가장 먼저 볼 수도 있고, 얼굴을 가장 먼저 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건 맞춤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런 상대를 만났어도, 시간이 흐르면 헤어지게 되는 이유는 결국 대화가 잘 되지  않아서이다. 여기에서 대화라는 건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어도, 어느 방향을  어떻게, 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서로에게 말하고 또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나중엔 엄청 열중해서 읽었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한 마음, 그래서 상처 받을까  두려운 마음,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는 상황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내 것 같아서 엄청 열중해서  읽었어. 


이래서 로맨스 소설을 남자들이 읽어야 한다. 어느 부분에서 여자가 혹은 남자가 괴로운지,  어떤 지점들에서 사랑하는 상대가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지 또 행복해하는지를 이런 식으로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집중하는 건  육체와 육체로 맺는 관계일 수 있지만, 그것보다 내밀하고 더 친밀한 무엇이 있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찾아 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니까. 심지어 툭하면 팬티를 찢어버리던, '크리스티나 로런'의 《잘생긴 개자식》에서도, '이야기를 나누니까 참 좋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우리를 얼마나 가깝게 이어주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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