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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Oct 29. 2020

《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아세요?

《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잔, 2020


<티끌  같은 나>의 '안젤라'는 가수가 되고 싶어 오디션을 보겠다고 시골집을 떠난다. 술만 퍼마시는 아빠와, 알코올 중독 때문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소 치는 일을 하는 엄마와 함께 살다 미래가 보이지 않아 모스크바로 떠나게 된 것이다. 모스크바에 가 오디션을  보았지만 떨어지고, 그녀는 가사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다행히 주인집 여자는 영화계로 발이 넓어서 안젤라에게 오디션의 기회를 마련해주는데, 가까스로 피디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자, 피디는 그녀의 노래가 마음에 든다면서 너의 노래가 필요하니 작곡가에게 곡을 사 가지고 오라고 말한다.



"그럼 작곡가에게 돈을 내야 하는 쪽은 나와 선생님 중 누구인가요?" 안젤라가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어떨 것 같은데?" 마에스트로가 지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돈으로 곡을 사서 노래도 내가 부를 거라면 선생님은 왜 필요한 거죠?" 안젤라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르트노프카 사람들은 다 아가씨 같은가?" 마에스트로가 심문하듯 질문했다.

"선생님은 어떤 분인데요? 머릿속에 온통 쩐 생각뿐이잖아요. 재능이라는 것도 있는데 말이죠……. 커다란 경기장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 중에는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겠죠."

"아가씨가 어떤 생각을 하든 그건 아가씨 자유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스타스가 끼어들었다.

"왜 선생님들은 되고 나는 안 되죠?" 안젤라가 다시 물었다.

"부탁하러 온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니까."

"그럼  들어온 것처럼 다시 나가 드리죠." 안젤라는 출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문을 나가기 전에 뒤돌아서서 말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그땐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닐 겁니다." 그녀는 자신 있게 호언장담을 했다. -<티끌 같은 나>, P.34-35



안젤라는  티브이에 나와서 유명해지고 싶었고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그래서 가난한 동네를, 집을 떠나서 도시로 왔다. 그러나  오디션을 볼 기회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고, 오디션을 보고 노래 실력을 인정받는다 해서 바로 가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는 수없이 그녀는 이 집 저 집의 가사도우미 일을 하면서 돈을 모은다. 작곡가에게 곡을 살 돈이 필요하고 시디로 제작할 돈이  필요하니까. 그녀의 유명해지고자 하는 꿈, 보란 듯이 성공하는 꿈은 자꾸만 멀리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늙은 부자 남자를 만난다. 자신의 아내에게 질려버린 오십 세의 남자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안젤라에게 반한 거다. 그는  안젤라와 함께 동거하면서 그녀에게 필요한 집과 밥을 마련해주고 그녀의 애인이 된다. 그가 영화감독을 만나 제작비도 후원해주겠다고  안젤라를 출연시켜달라 하고 안젤라에게 집을 사주기도 하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안젤라는 '성공한'걸로 보인다. 부자 남자...




"너 잘 나가잖아. 그러니까 나눌 줄도 알아야지. 성경의 십일조처럼 말이야. 성공에 대한 보수라고나 할까."
"내가 성공하다니요?" 안젤라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니콜라이 말이야……."
"아……." 안젤라는 영혼 없이 '아'를 길게 발음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성공이 아닌 자기 자신의 성공을 원했다. <티끌 같은 나> -P.122



안젤라의  꿈은 '부자 남자를 만나 손 하나 까딱 않는 삶'이 아니었다. 안젤라의 꿈은 자기 노래 실력으로 가수가 되는 것이고, 자기의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들 덕에 자기가 유명해지고 성공하는 것이었다. 순수하게 자기 자체로 성공하는 삶.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성공했다 말한다. 젊은 여자가-이제 고작 스무 살이 됐을 뿐이다- 쉰 살의 늙은 돈 많은 남자를 만나 돈 걱정 없이 살고  있으니, 아아, 너는 성공했구나! 라니. 그것을 성공이라고 한순간도 생각해본 적 없고, 스스로의 성공을 원했던 안젤라에게는  당황스러운 말이다. 안젤라의 꿈은, 안젤라가 생각하는 성공은 부자 늙은이 만나 팔자 고치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공하는 삶이었지. 다른 사람의 성공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다른 사람의 돈이 도대체 왜 내 성공이 된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자기의 성공을 원한다한들, 삶이 그녀의 뜻대로 펼쳐지질 않는다.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는 것도 그녀가 원하는 식의 배역도 아니었고, 보란 듯이 성공해 자신을 무시했던 피디 앞에 가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사랑을 찾았지만 그 불같은 사랑과 열정도 그저 찰나의 순간이었다. 부자 남자의 돈은 그녀에게 평생 살 수  있는 안락함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인가 했지만, 그녀의 마음이 그에게 가있지 않은 한 대체 그 돈은 다 어떤 소용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삶이란 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 가수가 되고 싶어서 왔지, 늙은 유부남의 정부가 되고 싶어서 온 게 아닌데,  가수가 되지 못하고 늙은 남자의 정부가 되었더니 왜 성공했다고 하는 거야. 세상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라는 것을, 스무 살의  안젤라는 도시에 와 깨닫게 된다. 삶이란 것이 그렇게 내가 마음먹었다고 그대로 나아가지는 게 아님을 알게 되는 거다.

그러나 그녀는 젊다. 깨달은 만큼 성숙할 것이고 성숙한 만큼 또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녀에게는 아직 그녀가 가보지 않은 멀고도 먼 길이 쭉 뻗어 있다. 그 길에서 무얼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안젤라의 늙은 애인인 니콜라이의 아내, '레나'는 어떤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남편은 젊은 여자에게로 가 자기에게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만, 그는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만을 아프게 깨달을 뿐이다. 그 큰 집에 혼자 머물면서 그녀는 외롭다. 늙은  남자는 젊은 여자를 애인이라 사귀면서 보란 듯이 자랑하고 다니는데, 왜 나는 젊은 남자를 만나면 안 된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직원과 섹스를 한다. 그러나 젊은 남자와의 섹스가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양팔을 뻗어서 팔베개를 했다. 겨드랑이에서 말 오줌 냄새가 났는데, 고약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약초 비슷한 냄새가 강렬했다. <티끌 같은 나> P.145



아아,  하필 섹스한 남자가 겨드랑이에서 말 오줌 냄새나는 남자란 말인가... 그녀의 연애는, 그녀의 뜻대로 되질 않는데, 왜냐하면  사실 남자란 게 다.. 그 모양이기 때문이다. 함께 스키장에 가서 없는 객실 나도 다오, 실랑이를 한참 하고 났더니, 이 젊은 남자는  다른 사람과 실컷 놀고 있는 게 아닌가. 왜 이 돈을 쓰는 것도 이 고생을 하는 것도 나여야 하지? 그녀는 그 호텔에 그를 두고  그냥 가버린다. 말 오줌 냄새났을 때 그냥 버리지 그랬어요.....



첫 번째  단편 <티끌 같은 나>가 '안젤라'의 젊고 찬란한 어느 한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유>는  '마리나'의 전 생을 보여준다. 부모님의 무관심 속에 동네 마당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을 거쳐 훤칠한 미남의 '옆에 있던 친구'와  결혼한 젊은 시절을. 그러나 남편은 마리나에 대해 계속 알고 싶어 하면서 아이만 낳게 하고 돈을 벌어오지 않았어.. 마리나가 자꾸 돈  벌어오라고 하자 남편은 바람을 피운다. 결국 돈 버는 것도, 가사노동도, 육아도 모두 마리나의 몫이었고, 그런 마리나가 화나서  섹스를 안 해주자 남편은 다른 여자 찾아 집을 나가버려. 아아,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런 그녀의 앞에 오오, 인생 사랑이  등장하니... 마리나의 입을 빌면 '흰 셔츠에 하얀 이와 밝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P.194)', 오마 샤리프였다. 그런 그가  그녀에게 반했다, 그런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 이 둘의 관계는 잘못 걸려온 전화로 시작된 것인데, 그렇게 통화하다가 만나기로  하고,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알아봐야 하잖아? 그래서 마리나는 숄을 두르고 있기로 한다.



"이렇게 하죠. 저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도트 무늬가 있는 숄을 두르고 있을 겁니다. 만약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지나가세요." 마리나가 상황을 정리하여 제안했다. -<이유>, P.193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그녀에게 반했고, 그녀와 사랑한다.

오오  그의 이름 루스탐.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아제르바이잔 남자인가요. 루스탐과 마리나는 뜨겁게 사랑한다. 아주 뜨겁게 사랑한다.  겁나 뜨겁게 사랑한다. 얼마나 사랑하냐면, 교사로 근무하는 마리나의 학교에 수업 시간에도 찾아가서 마리나의 얼굴을 본다니까?


루스탐은  트렌치코트를 낚아채듯 들고 밖으로 뛰어 나가서는 전차에 올라탔다. 20분 후에는 그녀의 학교 근처였다. 그는 벤치에 앉아서  고개를 들고 시선을 2층에 고정했다. 마리나가 창가로 다가왔다. 루스탐을 발견하고는 그녀 역시 시선을 그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들의 시선이 만나는 자리에 엄청난 양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전기장에 모기나 딱정벌레가 앉는다면 그대로 죽어서 떨어질  것이다.
마리나는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교장 눈밖에 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리나는 그들의 사랑과 아무 연관도 없는 아이들에게 '새 한 마리  그리기'같은 과제를 주곤 했다. '나는 어떻게 여름을 보냈는가?'라는 주제로 작문을 쓰라고 할 때도 있었다. 그러고는 또다시  창가로 가서 그대로 붙박이곤 했다. 딱정벌레가 그들의 사랑이 만든 전기장에 걸려들면 죽어서 떨어지곤 했다. -<이유>,  P.197



아니, 둘 사이에  너무나 뜨거운 전류가 흘러서 모기도 죽을 수 있을 정도라는데, 대체 왜 학교에 찾아가는 거야 이 밥통아! 일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이토록이나 뜨거운 열정을 품게 한 남자가 교실 밖에 있는데 안에서 내가  어떻게 수업에 열중하냐 이 빵꾸똥꾸야! 너는 집에서 네 일을 해야지!! 아무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잖아? 너무 사랑하잖아? 불같은 사랑이잖아? 이 당시에 마리나가 애가 둘 있는 여자였지만 총각 루스탐과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당연히 루스탐의 어머니는 마리나를 싫어한다. 애가 있는 여자라서 이기도 하지만 아제르바이젠 여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루스탐의 어머니는 루스탐에게 여자를 소개해주는데, 또 이 여자도 나쁘질 않아? 그래서 루스탐은 그녀와 결혼을  하고(네?) 두 집 살림을 산다. 이런 염병할.. 그러면 죽을죄를 지었다, 내가 너 몰래 결혼을 했어, 엄마가 시켰지만 어쨌든  했지, 이제 우리는 못 만나 굿바이, 하고 작별인사를 해야 하잖아? 그러나 그는 마리나를 속인다. 결혼하지 않은 것처럼, 결혼한 적  없는 것처럼, 일주일에 두 번만 마리나를 찾아오면서... 그렇게 이 연애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연애도 끝나고. 마리나는  늙어가고 자식들은 다 자라서 뿔뿔이 흩어지고, 그런데 자식들이 또 엄마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저 사람하고 결혼해서 돈 많게  좀 지냈으면, 했지만 자식들도 다 가난한 사람과 결혼해서 가난하게 살아. 똥꼬가 찢어진다. 마리나는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두면 그  돈을 자기를 위해 쓰지를 못해. 그래서 돈을 내가 벌면 내가 쓰면서 살아야 한다니까? 다 모아봤자 내 고생은 지속되면 이것이  뭐여, 이것이 인생이여?




마리나가 오갈 데 없이 되었고,  그런 마리나가 생각한 해결방법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있다면 내게 머물 곳이 생기고 먹을 것이 생긴다. 그러니 누군가  있어야 한다,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그녀에게 남자를 소개해주겠다는 사람이 있다. 그래, 만나자, 만나보자. 그녀는 그 남자와  전화통화를 하고 만나기로 한다. 그 옛날 젊은 시절 루스탐을 만났던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어떻게 알아볼까요? 남자는 양손에  신문을 들고 있겠다고 한다. 자, 가자, 고고씽. 누구든 상관없어!




마리나는 전에 루스탐을 만나러 갈 때처럼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도트 무늬 숄 대신 절반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가릴 요량으로 베레모를 썼다. 

마리나는  기차역에서 나와 지하철역까지 걸어갔고, 도착하기가 무섭게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 씨를 발견했다. 그는 회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큰 키에 필통처럼 직사각형 같은 사람이었다. 흰머리는 단정하게 빗어서 뒤로 넘겼으며 회색빛 얼굴에 콧날이 오뚝했다.  꼭 고인 같았다. 전화로 약속한 것처럼 양손에 신문을 쥐고 있었다.

마리나는 멈춰 서지 않았다. 걷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옆을 지나갔고, 플랫폼까지 걸어가서는 기차에 올라탔다. 기차는 바로 출발했다. 마리나는 뒤따라오는 사람을 따돌린 것처럼 기뻤다. 

기차에서  내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스토리는 과거와 완벽하게 일치하면서도 완벽하게 반대였다. 과거에도 만나기 전에 전화 통화로  목소리부터 들었다. 손에 신문을 들고 있는 것도 그렇고, 운명이 바뀌기를 기대한 것도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손을 잡고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뛰었다. 하지만 지근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비치 씨는 세로로 세워 둔 관처럼 서 있었다. 얼굴도 관처럼 핏기가  없었다. 오마 샤리프, 도대체 어디 있는 건가요? 당신은, 내 젊은은, 내 도시는 어디 있는 거죠?

마리나는 새끼손가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울었다. -<이유>, P.260-261




오.. 마리나여... 누구든  상관없다고 했잖아요. 누구든 상관없다며. 그런데 왜 도망가, 왜. 왜 그냥 지나쳐, 왜. 왜 루스탐이 아닌 남자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왜, 왜, 왜, 왜... 왜 지나쳐, 왜. 왜 도망가. 그 남자는 뭐가 돼 그러면. 흑흑. 너무나  슬픈 이야기. 



아니, 생각해봐. 내가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나 역시  상대를 모르는데, 내가 생수 두 통을 들고 서있을게요, 하고 서있는데, 그런데 나를 알아본 상대가 나를 보고서는 으힉, 이를  어째, 나 아닌 척 지나가자, 하는 건데, 이거 너무 슬프잖아!



마리나,  도망갔네요. 도망갔어요. 결혼한 사실 얘기하지 않고 두 집 살림한 남자 그리워하느라, 도망갔어요. 그렇지만 만약 루스탐이 아무리  그립다고 했더라도, 그때 양 손에 신문을 들고 서 있었던 남자가 다니엘 헤니 같았다면... 마리나도 내려서 그의 앞에 서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인생 더럽구나 내가  갈 곳은 없구나 나는 불법체류자가 되고 난민이 되고 갈 곳이 없어 외롭다 주변에 사람도 없어 자식도 없고 손주와도 함께 살 수  없고 나는 모두에게 민폐구먼, 나는 이제 어쩌나,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은 그녀에게 비슷한 또래의 부자 여자 닥터를 그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렇게 마리나는 그녀의 집안일을 봐주면서 또다시 돈을 벌고 먹고살 수 있게 된다. 마침 닥터도 외로웠던 터라  퇴근 후에 누군가 음식을 차려주는 것도 참 좋아. 그런데 마리나, 그녀는.. 좋긴 한데.. 외로움도 달래주고 수고했다고 따뜻한 음식도  차려주기는 하는데, 도통 남의 물건을 사용할 때 허락을 받을 줄을 몰라... 허락 좀 받고 사용하라고 말하면, 너는 많은데 이게  아까워? 이러고 있다.. ㅠㅠ 마리나여...



"나한테 먼저 허락을 구할 생각은 못 하나 보지?" 안나가 살짝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이게 아까운 건 아니죠? 사모님한테는 이런 상자가 발에 밟히잖아요." 마리나는 정말로 놀란 듯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인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순서였다. - <이유>, P.294



마리나여,  많게 가지고 적게 가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 손을 댄다면 손을 대기 전에 미리 물어야 합니다. 허락을  구해야 해요. 마리나는 살면서 한 번도 많이 가진 적이 없어서 누군가가 허락을 받고 마리나의 물건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니  허락을 구하고 물건을 사용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어.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그런데 이렇게 여태 살아왔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거쳐 중년의 삶을 살고 있어.



마리나의 이야기 혹은 삶이 여기서 끝나는가  하면 아아, 이야기는 여기서 막을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리나가 그렇게 사랑했던 그렇게 기다렸던 사람과의 재회, 한 번쯤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가 어땠는지에 대해선 비. 밀. 그녀와 왜, 어떻게 재회했는지도 비. 밀. 그것은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로맨스 코미디'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인생의 어쩔 수 없음, 비루함, 내 뜻대로 되지 않음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썼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다 부조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



이쯤 하자.



어릴 적에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화목하게 온 가족이 하하호호 웃으면서 사는 삶이 평범한 삶인 줄 알았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고, 그게 평범한 삶일 거라고 짐작한 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항상 그런 식의 가족을 보여주지 않았나. 그러나 어린 시절을  거쳐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사회생활을 지금까지 해오면서 내가 생각했던 그 평범한 삶이야말로 가장 평범과 멀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 자체도 순탄하게 되지 않을뿐더러, 사랑에 빠지는 것 자체도 사랑인지부터  되물어야 한다. 사랑이란 이름을 쓴 다른 관계가 아닌지. 혹시 폭력을, 억압을 견뎌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설사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게 사실이라 해도, 그래서 그다음은?이라고 물으면 그다음도 역시 꽁냥꽁냥 행복하다, 하는가도 또 다른 문제다.  가사노동과 육아가 여성에게 집중되면서 그 안에서의 삶은 평등하게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인 남자와 성인 여자가 만나  아이들을 낳고 부족함 없이 사는 삶이야말로, 이상향에 가깝다. 안나 까레니나의 첫 구절처럼,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니까.



이  책의 책 소개에는 '평범한 여성'이 주인공이라고 되어있는데, 정말 그렇다. 평범한 여성은 세상을 쉬이 살아가지 못한다. 물론  모든 인간이 쉽게 살 수 없겠지만, 내 꿈은 여러 차례 내 의도와 다르게 좌절되고, 내가 인간으로서 가진 능력보다는 내 육체라는  여성성이 사람들의 눈에 부각되며, 내가 여성이라는 육체로 돈을 벌기를 사회가 강요한다. 사랑이라고 찾아오는 남자들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원하는 건 자기만 생각하는 삶이고, 내가 아무리 이 남자를 사랑한다 해도 순간순간 '이건 아니잖아'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도 이 정도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넘겨가고 있고. 사실, 나는  이제 이런 거 그만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다. 평범한  여성들의 쉽지 않은 삶. 뜻대로 되지 않는 삶,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데 자꾸 태클 걸리는 삶.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읽어도 좋을듯하다.


나는 빅토리아 토카레바가 너무 좋아서, 오호라, 좋군, 하면서 신나는 마음으로 토카레바의 소설을 한 권 더 장바구니에 넣었다. 찾아 읽을 작가가 있다는 것은 몹시 짜릿해. 만세 만세 인생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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