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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Oct 27. 2020

《시녀 이야기》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황금가지, 2017


가까운 미래의 길리어드.

여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자기들 마음대로 계급을 나누고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여자들을 부리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자들의 경제권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멀쩡히 직장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있는 여자들의 계좌를 동결시켜 버리는 일. 여자가 일해서 번  돈이 들어있는 은행 계좌를 이용할 수 있는 건 여자의 남편이나 형제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그들이  동결시킨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 것도 마찬가지야. 여성 단체의 카드도 마찬가지야. M(남성, male-옮긴이)이 아니라  F(여성, Female-옮긴이)라는 글자가 박힌 계좌는 전부 그래. 몇 번 단추만 누르면 되는 일이야. 우리는 철저히 차단당한  거야.

하지만 은행에 2000달러나 입금해 두었는데, 나는 말했다. 세상에 중요한 게 내 계좌밖에 없다는 듯이.

여자들은 더 이상 재산을 가질 수 없게 됐어. 새로 입법된 법이야. 오늘 TV 켜 봤어?

아니.

TV에  나와. 하루 종일 나오고 있어. 모이라는 나처럼 경악하고 있지 않았다. 이상하지만 어떤 면에선 들떠 있었다. 자기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보란 듯이 들어맞았다는 것처럼.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생동감 넘치고 결연해 보였다. 루크가 너  대신 '컴퓨터 카운트'를 사용할 수 있어. 적어도 그들 말로는 그래. 남편이나 가장 가까운 친척이. (p.306)




내가  일해서 내가 번 돈이고 그래서 내가 예금해놓은 돈인데 그 돈을 내가 인출할 수 없다. 그 통장과 연결된 카드도 정지가 되어  있다. 그 돈을 쓰는 건 내 남편이나 형제여야 한다. 내 돈인데. 내가 예금한 건데. 내가 일한 내 돈인데.


내  돈을 내가 관리할 수 없게 되었는데 직장에서도 잘렸다. 그러니까 여자들을 직장에서 몰아낸 것.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랑 함께 사는 남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가 돈을 써서 나를 먹여 살리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나는 꼼짝할 수  없게 된 거다. 내가 무언가를 먹고 싶어도, 무언가를 사고 싶어도 이 모든 걸 나의 가까운 남자의 승인 하에 할 수 있게  되어버리니, 아무리 남자가 '원하는 건 다 하게 해 줄게'라고 한들 그것이 내 자유인가. 이미 '해줄게'가 되는 건데.



더 미치겠는 건, 이 일에 남편은 내 생각만큼 분노하지 않는다는 거다. 사실 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아.



  

당신은 내 기분 몰라. 나는 말했다. 누가 내 발을 잘라 버린 기분이었다. 울지 않았다. 하지만 루크를 껴안을 수도 없었다.

일은 일일 뿐이야. 그는 나를 달래려고 했다.

당신이 내 돈을 다 갖는단 말이지. 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농담처럼 말했지만, 막상 내뱉고 보니 소름이 끼쳤다.

쉿. 루크가 말했다. 아직도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있었다. 내가 언제까지나 당신을 돌봐줄 텐데 뭘.

난 생각했다. 벌써 이이가 나를 봐주는 척하고 있어. 그러고는 또 생각했다. 벌써 나는 피해망상에 시달리는구나.

알아. 나는 말했다. 사랑해. (p.308)



남편은 그것이 별 문제가 아니라는 듯, '내가 너를 돌봐줄 텐데'라고 말한다. 왜 한 사람의 성인이 다른 성인을 돌봐주어야 하는가. 그리고는 벌써, 봐주는 척하고 있다. 하아-


  그이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거야. 그이는 전혀 마음 쓰지 않아. 어쩌면 오히려 잘됐다고 여길지도 몰라. 우리는 더 이상 서로의 것이 아니야. 이젠, 내가 그의 것이 되어 버린 거야.

무가치하고 부당하고 비현실적이었다. (p.313)



사랑하는  사이인 어른 두 명이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있다고 구속력을 갖게 되는데, 나는 너만 볼게 너만 사랑해 라고 속삭이는데, 그러나  경제권이 어느 한 명에게만 가 있다면 그건 그 사이에 권력이 생김을 뜻한다. 돈을 쥐고 있는 쪽은 권력을 갖고 있고, 상대는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을 가지려 노력해도 이미 돈을 가진 쪽의 밑에 들어가 버려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아 너무 끔찍하고  너무 징그럽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그레이가 엄청난 재벌이라 아나스타샤의 옷장을 가득 채워줘도, 그것은 아나스타샤의 자유가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냉장고 바지 한 벌을 사더라도 자신이 번 돈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아나스타샤 스스로의 힘으로 예금 통장에  돈을 넣어야 한다. 그레이의 돈이 곧 내 돈이라고 생각하다가는 그레이의 마음이 바뀌는 순간 쫄딱 망해버리는 것이야. 그렇기 때문에  그레이가 '내가 너에게 부족한 거 없이 다 해줄 테니 너는 일하지 마'라고 해도 '안돼 이놈아 나는 나가서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버럭 대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녀 이야기》에서는 그렇게 '내가 나가서 일을 할 것이다' 하는 여자들을 법으로  막아버린다. 안돼. 너는 일 못하고 돈 못 벌고 돈 못 써. 이게 새로 바뀐 법이야. 그렇게 여자를 남자에게 '속한' 것으로  만들어 버려. 자립할 수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 버린다. 남자와 동등할 수 없는 남자의 아래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거다.



결국  이 사회에서 여자들은 사회가 정한 대로의 직업 혹은 신분만을 가질 수 있다. 사령관 씩이나 되는 남자의 아내들은 '아내'로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지게 되지만, 그 외의 여자들은 실상은 대리모인 '시녀'가 되거나 집안일을 봐주는 '하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직장에서 쫓겨나고 내 예금을 내가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여자는 시녀라고 불리는 대리모가 된다.



대리모란  말 그대로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걸 뜻한다. 아내가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 이 책에서 대리모가  남편과 번식 행위를 하기 전까지 나는 당연히 침실에서 별개로 남편과 대리모가 성관계를 가지는 건 줄 알았다. 쉽게 말하면 첩의  역할 같은 걸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시녀와 하녀 그리고 아내로 나뉜 이 세상에서는 쾌락을 절대 허용할 수 없다.  섹스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그것에 쾌락이 끼어들어서도 안되고, 은밀함과 감정이 끼어들어서도 안돼. 너무 충격적이었던  게, 시녀와 남편이 아이를 갖기 위해 행위를 하는 그 순간에 아내가 그 자리에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섹스는 아내와  남편의 것이되, 그러나 자궁만은 대리모의 것 이 되어버리는 거다. 아내도 눕고 그 아내의 배에 머리를 대고 시녀가 눕고, 그리고  남편은 키스 없이 시녀의 자궁에 씨를 뿌리는 것. 이 감정 없는 행위가 끝나면 마치 이 일을 치러낸 것은 아내의 것인 듯 아내도  쉬어야 하고, 그렇게 임신하여 시녀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 역시 바로 아내에게로 가 아내의 아이가 된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하아-

세 명 모두가 뻘쭘한 이 짓을,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하고 있는 거다. 시녀는 단지 자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시녀와  남편은 아내 몰래 따로 만나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느 날 남편이 몰래 시녀를 자신의 서재로 부른다. 여자들은 책을 읽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남편의 서재에는 아내 역시 들어갈 수 없는 금녀의 구역인데 그곳으로 몰래 시녀를 불러내는 것. 나는 이것이 혹여나 아내  없이 섹스를 하기 위함인가 했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낱말 게임을 같이 하자고 하는 거다. 그렇게 시녀는 아내 몰래 가끔 남편의  서재로 가 남편과 낱말 게임을 한다. 아내와 하지 않는 게임, 아내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해 요즘 사실 별 대화도 없다니. 이  시간은 남편의 즐거운 시간이 된다. 물론 시녀도 이 시간으로부터 얻는 것이 있고.


내가 놀란 건 이 상황에서의 시녀가 느낄만한 감정을 마거릿 애트우드가 아주 정확히 표현했기 때문이다. 아플 만큼 정확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여자에 대해 죄책감도 있었다. 마땅히 그녀의 것인 구역을 침범한 침입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게임 상대가  되어 주고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만, 남몰래 사령관을 만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우리의 역할이 더 이상 원칙처럼 깔끔하게 분리된  게 아닌 셈이다. 그녀는 알지 못해도 나는 그 여자에게서 뭔가를 빼앗고 있었다. 좀도둑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빼앗은 것은  그녀가 전혀 원하지 않았고, 그녀에게는 쓸모도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 거부한 것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여전히 그건 그녀  것이었고, 뭐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 신비스러운 '그것'을 내가 빼앗아 버린다면, (사령관이 내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극단적인 감정이라고 여기는 것을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럼 그녀에게 더 이상 뭐가 남는다는 말인가?  (p.276)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의 정부다. 최고위층의 남자들은 언제나 정부가 있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물론 계약의 내용이  약간 다르기는 하다. 옛날에는 정부들이 작은 집이나 아파트를 따로 갖고 있었지만, 요즘은 사정이 뒤죽박죽 되었다. 하지만 들춰보면  속은 다 마찬가지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옛날 어떤 나라에서는 '바깥 여자들'이라고 불렀다지. 나는 바깥 여자다. 안에서  채워줄 수 없는 걸 제공하는 게 나의 일이다. 그게 스크래블 게임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치욕스러울 뿐만 아니라 정말 한심스러운  신분이기도 하다. (p.279)




시녀는  알게 된다. 자신의 전임자로 있었던 시녀 역시 이 역할을 했다는 것. 남편의 서재에 들르는 역할. 그리고 아내에게 들켰고, 결국  자살을 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자신의 서재에 몰래 불러 들켜 자살한 시녀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다음 시녀를 또! 자신의 서재로 불러낸 거다.


현실에서  '아내 몰래' 이루어진 관계였다면, 그러다 들켰다면 서로 싸우고 헤어지면 된다. 그런데 이 책 속에서 시녀가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시녀에게는 아무런 권력이 없다. 시녀에 대한 권력은 아내가 가진 상황에서, 게다가 사회적으로는 모든 권력이 남편에게 있는 이  상황에서 시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런 권력도 가진 게 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비 여성'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을 서재로 불러내 죽게 만들어놓고, 그런데 낱말 게임하고 싶은  자기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다른 시녀를 또 불러내? 그러다 또 들키면? 그러면 누가 죽어나가는데? 누가 죽어야 되는데? 남편은  아닐 거잖아? 자기가 죽을 것도 아니잖아? 어째서 한쪽에게만 위험한 그런 상황임을 뻔히 알면서 이 짓을 '또' 하지?


아. 분노가 하늘을 찔러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쓸모없는 남자 새끼야.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마거릿 애트우드가 천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성을 단순히 자궁으로 기능하게 하기 위해 그전에 경제력을  먼저 뺏어버린 것도 그렇지만, 아니 그러니까 이 책을 써낸 것 자체로도 그렇지만, 이렇게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내적 갈등을  느끼면서, 아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나는 뭐였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하고 있는데, 사실 남자는 자신에게  해로울 게 하나도 없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여자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것. 자기의 욕망에만 충실하고 있었다는 것.  아내의 어떤 부분을 내가 뺏어버렸네, 나는 정부야,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남편은 전에 이 일로 자살한 시녀가 있었음에도 또 이  짓을 하고 있었어. 아, 여자란 무엇인가.

나는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아 남편은 낱말 게임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그걸 나눌 사람이 없었구나, 그런데 그걸 시녀가 채워주는구나, 외로운 부분이 있는  사람이었어, 우리는 누구나 외롭지... 하고 있었는데, 그냥 이기적인 개새끼였어.. 하아- 나의 이 휴머니즘 어쩌면 좋아.




일전에 시녀의 어머니는 이런 얘길 한 적이 있다. 이런 사회가 되기 전에.



  

어쨌든 내가 염색해서 어디다 쓰겠니. 남자들이 줄줄 따라다니는 걸 바라지도 않아. 10초 동안 정자를 제공하는 것 외에 그들이 무슨 쓸모가 있겠니? 남자라는 건 여자들을 더 만들어내기 위한 여자의 도구일 뿐이야. (p.208)




대단한  소설이다. 나는 이래서 소설이 좋다. 이 소설 한 권에 없는 게 없다. 사랑하는 사이지만 여자의 불이익과 부조리에 대해서는 딱히  공감하지 못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지만, 여자들이 연대하는 부분에서는 얼마나 짜릿하고 신나는지! 아직 다 못 읽었지만  읽을수록 감탄하게 된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생각하려고, 말하려고 하는 여자가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다. 이렇게 치밀하게 잘 짜인  소설이, 모든 걸 다 담고 있는 소설이 여기 있다. 작가 천재.. 천재다.

오늘 또 생각했다. 소설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소설을 읽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시녀 이야기 한 번 읽어봐요, 소설이란 게 이렇게 천재적인 거구나 싶을 테니. 아, 너무 근사한 소설이다 진짜. 늦게 읽어 죄송합니다.



  

생각이 많으면 끝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줄어드는데, 나는 되도록이면 끝까지 버틸 작정이다.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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