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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Oct 31. 2020

소설 읽기의 쓸모

《시적 정의》

《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지음, 궁리, 2013


주말에 조카네 식구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우리나라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을 한국으로 초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봤을 때는 동티모르 남자가 나왔는데, 주변에 동티모르 사람이 거의 없어서 주말이면 집 안에서 혼자 휴식을 취한다고 했다. 그의 다른 가족들은 동티모르에서 남자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을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남자가 외국에 나가 돈을 벌 수밖에 없었고, 이에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동티모르에서 아빠와 남편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 셋과 여자는 나름대로 밥벌이를 찾아가며 일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재워두고 여자는 혼자서 밥 먹으며 울기도 한다. 삶이 너무 힘겨워서.


외국에서 외롭게 혼자 일하는 남자도 삶이 결코 쉽지 않다 느낄 것이다. 몸은 몸대로 힘들지, 환경은 낯설지, 아는 사람은 없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멀리 있지, 외롭지..

고국에서 남편 없는 삶을 사는 여자도 힘들 것이다. 생활은 나아지질 않지, 아이들 셋을 돌보는 건 온전히 혼자의 몫이지. 그녀에게 하루는 얼마나 길고 고될까.


이런 삶은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생각했다. 제부는 생활이 어렵다면 다른 나라에 가서 돈을 벌 수밖에 없지 않나, 자기도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면 저런 결정을 내릴 것 같다고 했다. 나 역시 그 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그게 궁극적인 답인지는 모르겠다. 함께 행복하자고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만나 결혼을 했는데, 그리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 생활을 도무지 유지할 형편이 안되어서 이렇게나 멀리,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하다니. 그들이 결혼하고 함께 살기로 한 이유는 다 무엇일까. 게다가 그렇게 떨어져 사는 것에 기약도 없지 않나. 3년 일하고 고국에 돌아가면 형편이 나아지고 다 괜찮아졌을까? 아이가 셋인데, 3년 외국에서 일한다고 상황이 달라질까? 남자가 외국에서 3년을 일하거나 13년을 일해도 이 가족의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진 않은 거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가난하게 태어나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이렇게 떨어져서 그 가족이 살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힘들어하면서, 우리는 언제 함께 살까, 우리는 언제 넉넉해질까, 같은 것들만 희망고문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건가. 게다가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 아빠가 돌아오고 아이들도 성장했다고 하면, 그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남동생과 나의 결론은 같았다. 그 아이들은 자기 아빠와 비슷한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든 함께 살면서 일상 속에서 작은 기쁨을 억지로 찾아내며 사는 게 답일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먹고사는 것이 편안해지도록 낯선 땅에 와서 열심히 일하며 떨어져 사는 게 답일까. 가난한 자에게는 궁극적인 답 같은 것은 없는 게 아닐까. 어떻게 살아도, 어떤 결정을 해도 힘든 게 아닐까.



동티모르 가족의 삶을 화면에서 보고 주말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내가 문학적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러나 완전히 그들이 되지는 않고 떨어져 사는 삶. 이것이 마사 누스바움이 말했던, 우리에게 필요한 문학적 삶, 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분별 있는 관찰자의 자세가 아닌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이 특정한 세계를 상상하기 위한 일련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얻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세계에 접근하기 위한 보편적인 마음의 자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p.104)




  

분별 있는 관찰자라는 장치는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주목하는 분노, 공포 등의 부분을 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만일 나의 친구가 부정의한 상황을 겪고 있다면, 나는 그를 대신하여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스미스에 따르면, 그 분노는 그에게 가해진 그릇된 행동에 대한 분노의 복수심에 불타는 강렬함을 갖지는 않는다. 또 만일 나의 친구가 실연의 아픔에 슬퍼하고 있다면, 나는 그의 비탄을 공유할 것이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고 견디기 힘든 그 슬픔의 깊이는 헤아리지 못한다. 스미스가 보기에 이러한 구분은 우리로 하여금 시민의 자질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즉, 타인의 행복을 위해 애쓰지만, 우리가 타인을 위해 고려한 상황 속으로 스스로를 집어넣지 않는 능력 말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스미스가 분별 있는 관찰자의 입장과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문학 작품 읽기(그리고 드라마에서 관찰자의 입장되어보기)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는 도덕적 길잡이의 원천이 되는 문학 작품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다. 이러한 중요성은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사실상 우리로 하여금 좋은 시민이자 재판관에 걸맞은 태도를 자연스럽게 기르게 하여 분별 있는 관찰자적 태도를 정립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품을 읽음으로써 사건에 몰두하고 또 깊은 관심을 가진 참여자가 되지만, 우리 앞에 놓인 장면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루이자와 스티븐 블랙풀 모두에게 관심이 있고, 어느 정도 우리를 그들과 동일시하기도 하지만,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진정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생각에서 생기는 특수하면서도 때론 혼란스러운 감정의 격렬함은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는 당사자인 루이자와 스티븐보다 균형 잡힌 형태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데, 이는 엄밀히 말해 우리가 그들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삶의 경험을 가진 수많은 독자들이 있으며, 분별 있는 독자들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건져 올린 지식을 통해 사건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상적으로는 독서의 과정이 독자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 완성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p.163-164)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이용해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예를 든다. 그들에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음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살면서 문학적 상상력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얼마 전에 읽었던 김영란의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영란은 그동안 자신이 읽었던 문학작품들이 자신의 업무(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음을 얘기했었고, 정혜신 역시, 자신이 치유상담을 하는 과정에 문학 작품이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를 말했었다. 영화배우 겸 탤런트인 김혜수 역시 마찬가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책을 읽냐고 자신에게 말하지만, 자신의 삶과 일에 책 읽기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음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특히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일인지. 나는 소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쓸모없다고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들은, 소설 읽기를 잘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아는 만큼 행할 수 있는 것이고, 접했으니 알 수 있는 것인데, 소설 읽기야말로 하면 할수록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마사 누스바움은 이 책에서 총 세 권의 책에 대해 언급을 계속한다.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 포스터의 『모리스』가 그것인데, 어려운 시절에서는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삶을 사는 사람, 즉 소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사람의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며, 미국의 아들에서는 흑인으로 사는 한 개인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그의 범죄를 판단한다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모리스에서는 동성애자인 소수자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소설의 역할을 보여주는데, 아, 정말이지, 소설은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해내고 있지 않은가. 몇 해 전에 미국의 아들을 읽으면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였다는 살인이란 행위에 대해, 그 이면에 아주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알게 됐었고, 그것이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사회적 구조와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놀라며 깨달았던 기억이 났다. 소설이 아니었다면 누가 내게 그런 강한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을까.



물론 마사 누스바움은, 이토록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독서라는 행위에 있어서, 문학 작품 자체가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충분히 얘기해준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으면서, 그런데 왜 디킨스는 프랑스혁명에 대해 이토록 부정적일까, 왜 이 사람은 이런 시선으로밖에 보지 못할까, 하는 의문을 가져서 좀 찜찜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에 대해 마사 누스바움이 어려운 시절에서의 시선 역시 그러했음을 얘기해주는 거다.



  

첫째, 문학 작품은 역사적·과학적 사실을 거짓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디킨스가 노동조합 운동을 상당 부분 잘못 묘사한 것이나, 많은 소설가들이 여성 혹은 종교적·인종적 소수자들의 가능성에 대해 왜곡된 묘사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둘째, 문학 작품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과 피해의 중대성을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실제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또는 가볍게 여기도록 하면서 잘못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디킨스가 노동자들은 오직 기분 전화를 하고 여가 시간을 주면 잘 지낼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는 계급적 위계 자체에 내포된 피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디킨스는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에 팽배했던 결혼과 고질적으로 결부된 권리의 불평등이 여성에게 가한 피해를 파악하는 데도 실패했다. (p.165)



그러나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비판적 책 읽기를 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얘기해준다. 내가 왜 이 작가는 이 혁명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을까,라고 생각하고, 최근에는 많은 문학 작품에서 여성에 대해 비하한 것에 대해 분노하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면서 책을 읽는 것 모두, 비판적 책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잘못 쓰인 것은, 또 그런대로 우리에게 나름의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주변에서 책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책을 잘 읽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을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이 독후활동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고 나면, 그걸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주거나 혹은 기록하라고 얘기한다. 사람들에게 책 읽은 것에 대해 얘기하고 거기에 대해 의견을 말하면서, 그 책이 그제야 내 것이 된다고. 또한 기록하면서 내 것이 된다고. 읽고 나서 책장을 덮고 끝- 이 아니라, 그 후의 활동들을 하라고. 글을 쓰는 게 힘들다면 친구나 가족에게 단순히 그 책의 줄거리를 얘기해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실질적으로 나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내가 읽었던 좋은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이는 우리가 소설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비판적인 판단을 연습할 필요가 있고, 책을 읽는 과정에서도 다른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이 비판적 판단 과정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웨인 부스는 이러한 과정을 '공동-추론'이라 불렀다. 즉, 이 과정은 본성상 타인과의 협력을 통해 진행되는 비연역적이고, 비교를 통한 실천적인 추론이다. 공동-추론의 과정에서 문학 작품에 대한 우리의 직관은 윤리 이론과 상호 간의 조언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정교해지며, 이는 우리가 독자로서 가질 수 있는 감정적인 경험을 엄청나게 바꾸어 버릴 것이다. (p.165-166)



  

요컨대 나의 견해는 문학 작품에 대한 순진하고 무비판적인 의존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문학적 경험에 근거하여 내리는 결론들은 도덕적·정치적 사유, 우리 자신의 도덕적·정치적 직관, 타인의 판단 등에 근거하여 지속적인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p.166)




아아, 문학 작품의 역할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도 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토록이나 문학적 상상력을 중시하고 그것이 삶에 있어서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비판적 읽기가 가능해야 한다고 덧붙이지 않나. 아, 진짜 문학작품을 읽고 또 그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없는 애정을 보내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소설 읽기를 했으면 좋겠다. 

나는 소설 읽기의 쓸모를 알고, 믿는다.




  

소설은 이성을 무시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면서 진실한 능력으로 여겨지는 공상에 의해 생명력을 얻은 이성을 활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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