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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Nov 02. 2020

연민

《김약국의 딸들》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 2013


김약국에게는 딸이 다섯 있다. 그중 둘째 용빈은 가장 영특하여 서울로 가 공부를 하는 중인데, 마을의 부유한 집 아들 홍섭과  사귀면서 결혼할 거라 모두가 짐작하는 사이다. 용빈의 큰아버지와 사촌오빠는 용빈이 그 남자랑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영 마음에 들질 않지만, 용빈은 오래 홍섭을 알았고 사귀어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홍섭이 자신을 좀 피하는 것 같고 자신의 눈도 잘 쳐다보질 않는다. 뭔가 싸한 기분을 느꼈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 그가 미국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데 교회에서 마주친 그의 옆에는 세련되고 어여쁜 젊은 아가씨가 서있다.  그를 미국으로 보내주겠다는 서울 목사의 딸이라고 인사를 받으며 그제야 용빈은 아, 일이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구나, 하며 자신의  이별을 직감한다.



그렇게 둘은 만난다.





아  진짜 너무 싫은 거다. 본격적인 악의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있는 척,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가는 거면서  '우리에게 있던 건 형제애일 거야' 같은 말로 넘겨버리는, 이별할 용기도 없는 놈.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 헤어지자'라는 말은  솔직하기라도 하지, 이건 대체 뭐하는 짓거리인지... 최대한 상처를 덜 주기 위해 하는 말인 듯 하나, 결국 그가 놓지 못했던 건,  '여전히 좋은 나, 나쁠 리가 없는 나, 나는 나쁜 놈 아니야' 인 것이다. 아우 너무 못나서 헤어지길 잘했다고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자신의 옆에 세워둘 여자가 된 '마리아'에 대해서 자신을 잘 따르는 바람에  그만 '실수'해버리고 말았다고 말하는 남자라니.. 아 너무 역겹다. 자기를 잘 따랐다며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변명. 토할 것 같아.  그러면 마리아는 뭐가 되지? '나는 내 남편의 실수'가 되는 게 아닌가. 나는 이 대화 속에서 홍섭과 헤어지게 된 용빈도, 그  헤어짐의 감정을 추슬러야 하므로 고통스럽겠다 생각했지만, 마리아의 입장이 더 더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실수'라는 걸  마리아가 안다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어디 가서 내 남편이, 내 애인이 '아, 실수로... 그래서 지금 그 여자 사귀게 됐어'라는  말 같은 거 듣는다면, 와..... 야 진짜 꺼져라 진짜......



쌍욕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나쁜 짓이지만, 나는 상대를 배려하는 척 자기 이미지를 놓지 않으려고 하는 유약함도 나쁘다고 생각한다. 아 싫어 진짜.



그렇지만  용빈은 홍섭과 헤어져서 나쁜 놈을 인생으로부터 밀어내기라도 했지, 하아- 김약국의 딸들은 모두 남자들이.. 하긴 뭐 김약국의  딸들만 그러하랴... 지금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1900년대 초반에는 여자들 살기 더 힘들었지. 


'김약국'이라  불리는 남자가 아주 아기일 적에, 김약국의 아버지가 외출한 틈을 타 집에 한 남자가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는 김약국의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 그녀를 사모하던 남자였는데,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여자를 그립다며 찾아온 것. 게다가 그는 결혼하고 첫날밤에  아내를 그냥 버려둔 채로 이 사모하는 여자를 찾아왔던 것이다. 김약국의 어머니는 놀라서 유모를 찾고, 유모는 뛰어나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오느냐, 맘 잡고 살아라, 얼른 돌아가라, 이러다가 주인어른 돌아오시면 큰일 난다' 했는데, 이 남자는 안 돌아가고  '한 번만 보고 가자 한 번만..'이러다가 남편이 딱- 집에 돌아온 거다. 


워낙에 성격이 개 같았던  남편은 이 꼴을 보고 아내를 죽도록 때리고 도망간 과거 남자를 쫓아가 그를 칼로 찔러버린다. 아내는 자신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음에도 남편에게 맞고 결국 자살한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아내가 죽은 이 상황에서 아내를 죽게 만든 건, 남편  혼자 한 일은 아니었다. 가라고 했는데도 가지 않고 버티고 섰던 과거의 남자도 그녀를 죽인 거다. 아내가 '아니라고' 하는데도 그  말을 듣지 않고 아내를 죽도록 때린 남편이 그녀를 죽였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던 남자들이 그녀를 죽인 거다.  가라고 하면 가라.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져야지. 싫다고 하면 싫은 거고,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다. 왜 가라는 데 안 가고 아니라는  데 듣지 않고 죽이는가. 왜 여자 말을 듣지를 않아, 왜. 가라는 데 가지 않고 '너를 사랑해서 그래'라고 하는 거, 너무  지독한 폭력이다. 그 사랑은 과연 상대를 향한 사랑인가? 그 사랑은 '이렇게나 사랑하는 나'자신을 향한 사랑이다.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존감은 지독히 낮으면서 그러나 '이토록 사랑하는 나'에 대한 자기 연민만은 가득 찬 남자... 욕하고 때리는  남자도 나쁘지만 이렇게 자존감 낮으면서 자기 연민만 가득한 남자도 나쁘다. 다 쓰레기야, 다, 다. 너무 싫어. 끔찍하다 진짜.  휴...




그리고 아, 우리 용옥이...


용란이는  딸들 중 가장 예뻤고, 기두는 내심 그녀랑 결혼하게 될 것 같아 기대하고 설렜다. 그런데 용란은 집의 머슴과 바람이 났고, 그게  흠이 잡혀 아편쟁이이며 성불구자인 부자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기두에게 이 일은 너무 우울하고 슬펐고 또 용란이에 대한  마음이 쉬이 접히지 않았는데, 김약국은 그런 그에게 '용옥이와 결혼하라' 하는 거다. 고민하던 기두는 용옥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 결혼을 실행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녀에 대한 애정은 좀처럼 생기지 않아 집에 들어오질 않는다. 자기만 믿고 바라보고  기다리는 용옥이 가엽다 여겨지다가도 보면 밀어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용란에 대한 미련만 남고, 그래서 그는 바닷일을  한다는 핑계로 부산에 가서 통영인 집에 잘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와도 아내 옆에 오지도 않고, 어떤 날에는 통영에 와서도 집에 가  아내를 보지는 않으면서 술집에 가 다른 아가씨랑 자고 다시 부산에 가기도 한다. 아내는 통영에 와도 자신에게 들르지 않았다는 걸  알고 너무 슬퍼하는데,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남자를 남편이라고 믿고 계속 살아야 되다니, 너무 비극 아닌가. 그런데다 남편 없는  집에서 시아버지랑 둘이 있는 시간이 너무 많고, 시아버지는 기척도 없이 자꾸만 문을 벌컥벌컥 열고 뒤로 소리 없이 다가오고  그런다. 그러다가 밤에 잠자는 며느리를 급기야 덮치기까지 하는데, 소리 지르는 그녀의 입을 막고서는 '너만 아무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른다'같은 소리 지껄이는 거다. 그런 용옥은 어떻게 됐을까?



죽었다.



시아버지를  피해 도망가 남편을 찾으러 갔지만 남편도 만나지 못하고 배를 탔다가 죽었다. 시아버지는 아들에게 '니 여편네가 바람난 것  같다'며 혹여라도 자신의 죄가 발각될까 싶어 거짓말하지만, 기두는 '내 아내가 그럴 일은 없다'라고 맞받아칠 정도로 자신에 대한  아내의 정절을 믿고 있었다. 그런 놈이 아내에게 정을 주지도 못하고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고 술집가 잠은 다른 여자랑 자고...  기두야, 니 삶은 뭐니?

그리고 니 아내의 삶은 뭐야?



어제는  개인적으로 내 주변의 일 때문에 가슴 가득 연민이 차올랐다. 그런 참에 김약국의 딸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니 연민이 곱이 돼. 이  연민이 가슴속에서 쉬이 사라지질 않고 오늘 아침까지도 너무 아픈 거다. 아, 너무 아프다. 아 너무.. 어떡하지 이 사람들..  막 이렇게 되는 거다. 이게 사라지지 않고 너무 내 마음에 연민이 가득 차 있어서 내가 힘들어. 그래서 방금 전에는 


아아 안 되겠다. 소설 그만 읽자, 너무 그 안에 들어가 있다, 소설 그만 읽자...



했다가, 아아, 안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러면 좀 참았다가 읽자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막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슬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박경리의  《토지》라는 그 어마어마한 책을 읽으면서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왜 다른 책 읽어볼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김약국의  딸들 읽다가 알라딘에 들어와 박경리 검색해서 박경리 책 장바구니에 다 넣어두었다. 내가 박경리 책을 다 읽는 걸 나의 독서  라이프의 목표로 삼으리라. 


최명희가 《혼불》에서 첫날밤에 아내 옷고름도 푸르지 않고 다른 여자  그리워한 남자를 그려낸 적이 있는데, 박경리 역시 초반에 그런 남자를 등장시켰다. 결국 그리워한 여자를 죽게 만들었지. 박경리는  알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이렇게 여자들을 죽게 만드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글로써 해낼 수 있는 것 같다. 박경리가 이런 이야기를 써낼 때는  이미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 돌아가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존경합니다.



그리고  기두 생각을 많이 했다. 기두가, 그러니까 애당초 자신이 흠모했던 용란이 설사 다른 남자랑 결혼 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도,  자신이 나서서 '나랑 결혼하자' 혹은 '용란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김약국에게 말했다면, 그랬다면 많은 비극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기두는 자신이 계속 욕망했던 여자랑 살게 되고, 용란은 성불구인 남편과 이렇게 죽을 때까지 맞아가며 살아야 해? 라며  비관하지 않았을 것이고, 용옥은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는 남자의 아내가 되어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시아버지의 침입에 맞닥뜨리지  않았어도 됐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 '나를  사랑해주는'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만으로는 안돼. 내가, 나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야 한다. 그것이 자기를 살리고 나랑  함께 사는 사람을 살리는 길인 것이다. 마음속으로 품는 누군가를 둔 채로 다른 사람과 산다면, 나는 여기에도 거기에도 오롯이  존재할 수가 없다. 마음속으로 품는 누군가가 있는 사람과 함께 산다면, 나 역시 온전히 내게 오는 시선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비참할 수밖에 없고. 이건 진짜 모두가 불행해지는 길이야. 


기두는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용란과  결혼하지 못했을망정 용옥과 '그냥' 결혼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를 선택하는 건, '이 사람 대신'이 될  순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것은 둘 모두에게 불행을 불러온다. 종국엔 비극이 찾아온다. 내 마음이 닿는 사람, 그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고 해서 '어쩌면 뭐 마음이 닿을 수도 있겠지' 같은 좋아하지도 않는 마음으로 그저 살아보자고 덤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죽음을 초래한다. 육체적 죽음일 수도 있고 정신적 죽음일 수도 있지만, 비극이 돼. 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 수  없다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기두는 유죄다. 기두에겐  죄가 있다. 자신이 사랑하지 못한 사람과 살게 된 건 자신의 불행이지만, 그 불행 속으로 다른 사람을 끌어들였다. 기두는 유죄다.  아들 없는 며느리 방에 들어간 시아버지는 쳐 죽일 새끼지만 기두라고 딱히 용서할 만한 놈도 아니다.


김약국의 딸들에 대한 연민이 가슴 가득 차올라 너무 힘든 오전이다. 밖이 저렇게나 환한 데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파. 타이레놀을 한 알 먹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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