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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Nov 03. 2020

그 날의 기억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나무의 철학,2018

몇 해전에 (아마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한 방청객 여자가 그런 말을 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그  남자가 다가와서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결국 우리 언니랑 사귄다, 언니가 좋아서 나에게 접근한 거더라,라고. 마음이 좀  아팠었다는 얘길 하는데, 이런 얘기는 사실 무수히 많다. 당장 나폴리 시리즈에만 해도 릴라랑 친해지고 싶어서 레누에게 접근했던  새끼가 있었지. 쩝…


물론 '펄'은 '트립'에게 접근하기 위해 '무디'와 친해진 건 아니었다. 무디와 펄이 친해진 건 우연이었고, 그리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둘이 친하게 지내는 동안 둘은 서로에게 충실했고 딱 붙어 다녔다. 매일같이 펄이 무디의 집에 놀러 가서 그 집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무디의 형인 '트립'에게 마음이 끌린 건, 처음부터 계획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랑 혹은  호기심 혹은 욕망 같은 것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버리는 수가 많다. 


만약 무디가 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친구가 아닌 다른 감정, 이성으로서의 욕망 혹은 끌림 같은 걸 느끼지 않았다면 딱히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디는 펄을 좋아했고, 더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이렇게 늘 붙어 다니고 펄이 무얼 좋아하는지 알고 펄이 여가시간에  뭘 하는지도 알고 그래서 펄에게 네가 쓰고 싶은 걸 쓰라면서 몰스킨 노트-펄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를 선물하기도 했으니까.  펄은 그런 무디의 마음을 눈치챘지만 사실 펄에겐 무디에 대한 어떤 이성적인 호감 같은 것은 없었다. 친한 친구 단짝 친구 좋은  친구지만, 욕망을 느끼는 대상은 아니었다. 펄은 무디의 형인 트립을 좋아했다. 무디의 집에 놀러 가서는 아무도 모르게 슬쩍 트립의  옆에 앉곤 했다. 그런데! 트립이 움직였어. 트립의 마음도 펄에게 움직였고, 그렇게 둘은 서로의 가족들 몰래 따로 만나게 된다. 이  청소년들은 그러나 단둘이 있을만한 공간을 찾을 수 없어, 트립의 친구네 집에 가기도 하는데, 어느 하루, 펄의 집 펄의 방에서  관계를 갖고 나오다가, 문 밖에서 '설마… '하고 의심하던 무디와 마주친다. 요즘 계속 집에도 같이 안 가고 자기를 만나는  시간이 줄었던 펄이, 그 시간에 자신의 형을 만나고 있었다니. 게다가 서로에게 다정한 저 친근한 행위들-머리카락을 떼어준다든가  몸을 다정하게 붙인다든가-이, 그들이 이미 여러 차례 섹스를 했음을 암시했다. 무디는 절망했다. 무디는 슬펐고 무디는 화가 났다.  그렇지만, 무디가 슬펐고 무디가 화가 났고 무디가 절망했다고 해서, 펄이 트립 대신 무디를 좋아할 순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건 기적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리고 그 말은 진리이듯이, 세상엔 아주 많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딱히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일이 발생한다. 언젠가는 저 사람도 나를 봐주겠지, 나를 사랑해주겠지,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바란다고 해도, 나의 그런 기도에 신이 혹은 상대가 응답해주는 일도 딱히 많지 않다. 나의 짝사랑은 그저 나의 짝사랑으로 끝날  확률이 훨씬 높다. 또한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이천 번 넘게 말하고 아무리 선물 공세를 퍼붓는다 해도, 나의 마음이 그저 저절로  '네가 나를 좋아하니 나도 너를 좋아해 줄게' 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은 좋은 관계, 다정한 사이가 될 순 있게 도와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적 욕망과 끌림으로까지 가게 되지는 않는 거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 너무 고맙고, 나 역시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가게 되는 건 당연하지만, 그것이 연애감정으로 이어지는 건 다른 문제. 거기엔 무언가 다른 것이 끼어들어야 하는 것 같다.



무디는  펄에게 실망했다. 다른 여자아이들과는 달랐다고 생각했던 펄이, 다른 여자아이들과 똑같이 트립을 좋아한다는 것에 실망했다.  바람둥이 트립과 사귀다니, 너무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둘은 이제 말하지 않는 사이가 된다. 무디는 펄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선물했던 몰스킨 노트를 몰래 다시 가져간다.




  

무디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펄에게 가장 실망했다고 생각했다. 결국에는 펄도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트립을 택할 정도로 경박했다. 물론 펄이  자기를 택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여자아이들이 반할 유형이 아니었다. 하지만 트립이라니, 그 점은 용서할 수 없었다.  깊고 맑은 호수로 알고 뛰어들었다가 그것이 무릎까지 차는 얕은 연못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래서 무엇을 했나? 그래,  일어섰다. 진흙이 묻은 무릎을 씻고 진창에서 발을 빼냈다. 그 뒤에는 더욱 조심했다. 그때부터 무디는 세상이 예상보다 작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수학  수업 중에 펄이 화장실에 가자 무디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펄의 책가방을 열고 몇 달 전에 자신이 펄에게 준 조그마한  검은색 몰스킨 수첩을 꺼냈다. 의심했던 대로 책등은 갈라진 자국 없이 말짱했다. 그날 저녁, 무디는 방에서 홀로 수첩을 한 움큼씩  찢어내 꼬깃꼬깃 구긴 다음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휴지통이 구겨진 종이로 수북해지자 무디는-옥수숫대에서 벗겨낸 겉껍질처럼 이제  속이 텅 비어 축 늘어진-수첩의 가죽 표지를 맨 위에 떨어뜨리고는 휴지통을 발로 차 책상 밑으로 집어넣었다. 펄은 수첩이 없어진 사실을 알아채지도 못했는데, 왠지 그것이 무디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다. (p.407)




하아-



무디의  마음이 가장 아픈 이유로 나도 가장 아팠다. 그러니까 너무 화가 나고 실망해서 자신이 주었던 수첩을 다시 뺏어왔는데, 그런데 정작  펄은 자신의 수첩이 없어진 사실조차도 몰라.. 그러니까 애초에 몰스킨 수첩에 딱히 의미도 관심도 없는 거였어.. 나는 생각하고  고민해서 마음을 담아 선물했는데 상대에겐 받았는지도 모를 물건이여…


나도 이 점이 가장  가슴 아팠다. 그토록 친하다고 생각했고 그토록 소중했는데, 그리고 내가 그러듯이 상대 역시 나를 그렇게 여길 거라 생각했는데, 만약  상대가 나에게 몰스킨을 줬다면 나는 거기에 소중한 글들을 쓰고 간직하고 내내 가지고 다녔을 텐데, 그런데 자신이 받았다는 사실,  그래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다니. 이것은 정말이지 비극, 슬픔의 새드니스…



아주 오래전 여름이었다. 친구와 나는 토요일에 만나 영화를 한 편 보았고 작은 전시회가 열리는 빌딩에 들어갔다. 전시회  이름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곳에 들어가니 일반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책들을 몇 권 팔고 있었다. 그중에 한 얇은 잡지에는 한  영화감독의 인터뷰가 실려있다고 되어있더라. 나야 관심 없는 영화감독이었지만, 그 당시 내가 좋아하던 사람의 최애 감독 아닌가. 나는  얼른 그 잡지를 사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친구와 좀 더 걷고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거의 다 마셔갈 때쯤, 문자메시지가  왔다. 내가 좋아하는 그였다. 그는 예정에도 없이 불쑥 만날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갑자기 너무 신났다. 응, 갈게. 그렇게  답했다. 아니, 이건 무슨 일이지, 그를 생각하며 사둔 잡지가 가방 안에 있는데, 그런데 마침 오늘 볼 수 있다니!


나는  친구랑 헤어지고 신나는 마음으로 그를 보러 갔다. 아직도 기억나는데, 후훗, 그때 나는 편하게 나오느라 슬리퍼 차림이었다. 하하. 그에게로 가면서야 내가 슬리퍼를 신었다는 것을, 땅바닥에 철퍼덕 달라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  모르겠다. 에헤라디야~


나는 그를 만나 활짝 웃고는 마침 내가 너를 주려고 이걸 샀지 뭐야, 하며 내가 준비해 간 잡지를 내밀었다. 그는 기쁘게 받아 들었고, 우리는 맥주를 시켜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분 좋은 토요일이었고 기분 좋은 마무리였다.



며칠 후,  나는 그에게 그 인터뷰를 읽어봤느냐 물었다. 그는 '아, 그 잡지의 존재를 잊고 있었네'라고 답했다. 그 잡지의 표지에서 그  감독을 발견하고 기뻤던 것, 그 잡지를 집어 들고 설레며 계산했던 것, 이걸 그에게 줄 수 있어 신나 했던 것 모두가, 그 대답  하나에 비틀거렸다.


무디는 펄이 항상 글을 쓴다는 걸 알고, 몰스킨 수첩을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펄에게 그걸 선물했다.  그러나 펄은 무디가 아닌 무디의 형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고, 무디는 자신의 형이 정말 형편없는 놈이라 생각했기에 그런 펄에게  실망했다. 그래서 펄의 가방에서 자신이 준 몰스킨을 다시 가져왔는데, 너무 마음 아프게도, 펄은 그 수첩이 없어졌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다. 


어제 가만가만한 요가가 끝나고 매트에 누워  송장 자세를 취하면서 아 행복하다, 라는 생각이 파고들었다. 행복하네, 요즘엔 요가가 이런 행복을 줘, 하다가 그 여름날의 토요일  오후가 떠올랐다. 그래 그랬었지, 하고 좋고 설렜던 기억들과 그 날의 햇빛이 떠오르다가, 그러다 며칠 후 그가 내가 준 잡지의  존재조차 몰랐었다는 걸 떠올리자 조금 슬퍼졌다. 조금. 


그리고 이내 괜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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