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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Nov 09. 2020

꿈틀이는 아버지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다.

《피로 물든 방》

《피로 물든 방》, 앤절라 카터 지음, 문학동네, 2010


언젠가 몸이 아픈 상태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는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너 어디 아파?' 하고 바로 물으셨다. 그때 왈칵, 눈물이 차올랐었지. 어떻게 이렇게 짧은 단어 하나 만으로도 내  목소리에 스민 감정을 알아챌까. 엄마는 그랬다.


딱히 능력 있지 않은 아빠와 살면서 우리 삼 남매가 다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엄마의 노력 덕분이었다. 엄마는 내가 어릴 적에는 공부를 봐줬고, 그게 본인의 능력으로 되지  않겠다 생각했을 때 참고서를 사주었다. 개인과외나 걸스카웃 하고 싶다는 내 말에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영어 너무 몰라서  과외받고 싶단 말에 중고 책방에 가서 헌책으로 참고서를 사주셨다. 팝송이 너무 좋다고 하니 길거리에서 테이프를 사준 것도 엄마였고  힘들게 돈 벌고 들어와서 어린 우리들을 씻긴 것도 엄마였다.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우리에게 해주려고 하셨고,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또 알고 있다.


그에 반해 사실 나는 아빠가 한 일은 크게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힘들 때 내가 무언가 필요할 때 그걸 들어보고 알아채 주고 해결해주고자 하는 건 엄마였다. 아빠는 물론 우리를 사랑했지만,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사랑했지만, 그저 사랑밖에 할 줄 몰랐다. 가진 것도 능력도 없는 남자, 그러니까 내 또래의 대한민국 여자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한국 남자, 그게 바로 아빠였다. 머리가 크고 난 뒤의 나는 엄마에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혼자 살고 싶지 않아?  이혼하면 어때?'라고 말하기도 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 엄마는 아빠랑 같이 살지 않으면 더 편할 것  같았고, 아빠는 엄마랑 같이 살지 않으면 불편할 것 같았다.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엄마는 자유롭게  살았을 텐데. 엄마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우리 때문에, 매일을 일찍 일어나서 밥을 차리고 애들 학교를 보내고 돈을 벌고  가사노동을 해왔다. 


제일 첫 번째 실린 단편 <피로 물든 방>에서 17세 소녀는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 소녀의 엄마는 어쩐지  그건 아닌 것 같은 촉으로 그를 사랑하느냐 묻지만, 소녀는 그와 결혼하고 싶은 게 진심이라며 그와 결혼한다. 그에게는 소녀와  결혼하기 전에도 세 명의 아내가 있었고, 모두 사망했다. 그와 결혼을 하고 그가 가진 보석을 받고, 그의 큰 저택의 열쇠를 받고,  (어쩌면) 그의 큰 사랑도 받으면서, 그녀 자신이 가진 거라곤 고작 순진함과 순수함만이 전부였던 때, 자신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를 사랑한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이건 아닌 것 같다'의  느낌으로 찾아오진 않지만, '아닌 것 같은' 것이 그녀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이랄까. 




가능한  한 전화를 미루고 싶었다. 저녁 식사를 다 마치면 그 이후 다가올 완전히 지루한 시간에 뭔가 기대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7시 15분 전 어둠이 벌써 성을 둘러쌌을 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를 듣자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엄마, 욕실 수도꼭지가 황금이야.

황금 수도꼭지라고요!

아뇨, 엄마, 그건 울 일이 아니겠지요.

전화 연결 상태가 안 좋았다. 엄마가 축하하고 물어보고 걱정하는 말을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전화기를 내려놓자 약간 기분이 나아졌다. (p.39)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된다. 나는 이 책이 단편집인지 몰랐다가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어 놀랐는데, 이제 17세 소녀는 남편의 정체를  알게 됐다. 외딴곳에 떨어진 이렇게 큰 저택에서 남편은 이제 그녀를, 그의 전 아내들에게 그랬듯이, 죽이고자 한다. 그녀는 자신의  위험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다. 전화선은 끊어졌고 하인들은 남편이 모두 휴가를 보냈다.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숨어서 남은 건  장님 조율사뿐이었다. 죽음이 시시각각 자기에게 다가오는 걸 알면서, 그런데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으면서, 그녀는 자꾸만 그  시간을 늦추고 싶어 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에게로 오고 있는 엄마, 엄마를 창밖으로 보게 된다.



용기. 용기를 생각하자 엄마가 떠올랐다. 그때 연인의 얼굴 근육 하나가 꿈틀 하는 것이 보였다.

"말발굽 소리!" 그가 말했다.

나는  최후의 필사적인 시선을 창문으로 던졌고, 기적처럼 말과 기수가 현기증 나는 속도로 바닷길을 따라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제  말발굽 뒤쪽까지 파도가 밀려오는데도 말이다. 기수는 힘차게 빨리 달리려고 검은 스커트를 허리춤에 말아 넣은 채 미망인의 상복을 입고  미친 듯이 달리는 훌륭한 여자 기수였다.

전화가 다시 울렸다.

"아침 내내 기다려야 하나?"

매 순간 엄마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p.64)



정말 짜릿해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엄마는 제때에 못 오고 늦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엄마, 엄마가, 심지어 말을 타고!! 내게로 오고 있다. 엄마가, 엄마가 온다!


아,  너무 짜릿해서 정말이지 눈물이 나지 않는가. 소녀는 시간을 좀 더 끌고 싶고 그러나 그의 앞에 서게 된다. 이제 그로부터 처형을  당하게 될 순간에, 엄마는 그 큰 저택의 문을 두드린다. 소녀를 구하기 위해 엄마가 왔다. 오빠가 아니라, 아빠가 아니라,  왕자님이 아니라, 엄마가!!!


나는 엄마가 어떻게 올 수 있었을까 계속 생각했다. 이 위험을 어떻게 알고 엄마는 이렇게 딸을 구하기 위해 달려올 수 있었지?



나는  단지 그날 밤 내 전화를 받고 나서 당장 기차역으로 달려가게 한 엄마의-뭐라고 불러야 하나?- 모성적 텔레파시를 찬양할 뿐이다.  난 한 번도 네가 우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어, 엄마는 이렇게 설명했다. 네가 행복할 때는 안 울었지. 도대체 누가 황금  수도꼭지 때문에 울겠니? (p.68)




아아,  엄마는, 황금 수도꼭지 때문에 운다고 딸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당장 그 길로 기차를  타고 딸에게로 올 수 있었다. 당연히 나의 엄마가 생각났다. 목소리만 듣고도 내 상태를 알아주는 엄마. 소녀가 용기를 떠올리고  엄마 생각이 났다고 하는 것처럼, 나는 힘들 때 엄마가 생각났다. 나는 힘든 순간에도 그리고 기쁜 순간에도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가 나를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랐고, 엄마에게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했다. 만약 내가 저 당시의 소녀라고 해도 엄마는 나를 구하러  왔을 것이다. 말을 타지 못했다면, 엄마는 뛰어서라도 왔을 것이다. 어떻게든 왔을 것이다. 엄마, 우리 엄마가.




 <피로 물든 방>에서 거대한 남성의 억압을 느낀 소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틀댔다. 만약 소녀가 더 자란다면, 그 꿈틀거림은 더 확장됐을 것이고, 결국 저항했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는 이제 고작 17살이었고, 그녀 앞에 우뚝 선 남편은 나이도, 덩치도, 돈도,  하물며 그가 가진 집도 다 그녀의 것보다 크고 강했다. 꿈틀꿈틀 대다가 아직 싹이 자라기도 전에 죽음에 처할 상황. 그런 그녀를  이미 저항을 알고 있는 그녀의 엄마가 달려와 도와준 것이다. 


오빠가 아니라,

아빠가 아니라,  

왕자님이 아니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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