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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락방 Nov 10. 2020

딥 빡 침

《에마》

《에마》, 제인 오스틴 지음, 민음사, 2012

오래 전의 일이다. 이십 대 중반이니 벌써 십 년도 훌쩍 넘은 일이 아닌가.

당시에 내가 다니던 직장에는, 몇 차례  언급했지만, 주변에서 영화배우라고 불릴 정도로 잘생긴 남자 직원이 있었다. 나랑 동갑이었는데, 사람들이 저마다 잘생겼다고 한 마디씩  하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여자 직원이 동경할 수밖에 없는, 그런 남자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런  잘생긴 얼굴에는 그다지 호감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라서, 다들 입을 모아 그를 칭송할 때에도, 나는 심드렁할 수 있었다.  심드렁하고 싶다거나 그런 척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진짜 관심이 없었다. 다만, '아, 사람들로부터 잘생겼다는 칭찬을 받는  남자 사람이군' 했더랬다. 나와는 다른 부서였는데 함께 술을 몇 차례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었을 때 성격도 나쁘지 않고 매너도 좋아서,  내 친구랑 소개팅 시켜줘야지, 했었더랬다.


마침 토요일 오후,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아직  회사에 있을 그에게 전화해 '나올래요?' 물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른 남자 직원들과 나오더라. 그래서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됐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싱글인 여자1과 이 남자가 이러쿵저러쿵해서 잘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계획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술자리에서 그는 내게 코와 손이 예쁘다고 했다. 뜬금없는 얘기였지만, 사실 그는 나에게 코와 손이  예쁘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었다.


여느 때처럼 회사 직원들 여러 명과 소규모 회식을 하고 자리를  파하려는데, 그 영화배우 남자가 나는 너랑 술을 좀 더  마셔야겠고 할 말이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가진 술자리에서 그는 내게 사귀고 싶다고 했다.


헉.


나는  거기에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아, 나 이 남자 괜찮은 남자라고 친구한테 소개해주고  그랬는데 여기서 내가 안 사귄다고 하면 나는 뭐가 되나' 하는 거였다. '괜찮다면서 너는 왜 안 사귀는데?'라고 물으면 내가 답할  말이 없는 거다!! '나는 그가 안 좋아'라고 하면, '안 좋은데 왜 소개해줘?'가 나올 거고, 그러면… 나는… 너무나 모순된  인간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거다.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 알았다, 사귀자,라고 한 데는 다른 생각이 1도 없었다. 오로지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나는  모순된 인간이 아니고, 언행이 일치가 되는 인간이다…' 하는 것이었다. 몇 해전에 나랑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내게 '너는  다른 사람 시선은 신경 안 쓰는데, 니 스스로에게 쪽팔리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했었다. 아, 그는 얼마나 통찰력이  뛰어난 친구였던가. 



그렇게 해서 사귀었지만 얼마 못 가 파국을  맞이했는데(응?), 내가 잠깐 그를 사귀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 썸을 타버렸기 때문이고(응??), 그런 스스로를 또 스스로가  못 견뎠기 때문이다. 어떻게 남자 친구가 있는데 다른 남자 만나서… 하아. 나는 영화배우 남자에게 연락해서는 우리 그만  만나자고 했고, 썸을 탔던 남자와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나는 그러니까 스스로에 대한 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거다.  아, 너무나 어렸던 것…


영화배우 남자는 회사 동료인지라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아, 이  남자가 나랑 헤어진 뒤로 밥을 안 먹는 거다. 규모가 작은 회사였고, 사람들은 저마다 걱정을 하나씩 보탰으며, 그가 속한 팀의  팀장은 나를 불러서, '우리 팀이 쟤 밥 먹일라고 회식을 할 건데 네가 참석해줘' 했다. 아니 왜 내가???라고 하면서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건 아닌가, 했는데, '우리 팀만 가면 너무 분위기가 어두워, 네가 꼭 있어줘' 하는 거다. 나는 비상구 계단으로 가  영화배우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밥 잘 먹고 다니라고, 사람들이 다 걱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알겠다고 했는데, 사실 그  사이사이 그는 술 마시고 울면서 전화했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너는 왜 나를… 하면서 ㅠㅠ 부재중 전화가 막 몇십 통  찍히고 그러는데, 나는 진짜 받을 수가 없었어. 아, 내가 하려던 얘기는 이게 아니고,



어느  멀쩡한 정신으로 토요일 낮에 영화배우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네가 나를 거절한 이유가 무엇이냐, 지난번에 너 데리러 왔던 그  남자 때문이냐,라고 물었다. 나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남자로 느껴지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나는 그것도  아닌데... 싶었지만, 이 사람은 명확한 이유를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아마도 그런 것 같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네가  나를 남자로 느낄 때까지 기다릴게, 3년이든 30년이든 기다릴게' 했다. 나는 맘대로 하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고, 신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호기롭게 '얼마가 됐든 널 기다릴게' 했던 영화배우 남자는, 그 후에 3주도 못되어서 회사의 다른 여직원과 교제를 시작했다.


아, 내가 이 얘기를 왜 이렇게 길게 뜬금없이 했냐 하면, 이게 다, 에마 때문이다. 오, 에마!!!!!


그러니까  에마는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어린 아가씨 '해리엇'에게 근사한 남자를 소개해 주고 싶었던 거다. '엘튼'이라면 딱 맞는  상대이겠구나 싶었다. 사실 '마틴'이 해리엇을 좋아해서 해리엇에게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지만, 에마가 생각하는 마틴은  교양도 없고 수준도 떨어진다. 해리엇은 이제 막 교양과 상류사회 문화를 습득하던 중이라 마틴을 거절하고, 엘튼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사랑이란 것이 에마의 말로 시작된 것이어서, 엘튼이 지나가면 잘생겨서 쳐다보기는 했었으나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는데,  자꾸만 에마가 옆에서 부추기는 거다. '저봐,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너에 대한 애정을 가진 게 틀림없어' 이런 식으로... 여길  이렇게 자주 방문하다니 널 보려고 그러는 거야, 내가 그린 네 초상화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다니, 너를 정말 좋아하는 거야... 하면서  해리엇의 마음에 엘튼에 대한 기대감과 사랑을 마구 불어넣는 거다. 아... 나는 넘나 화남이 몰려왔어.... 누가 봐도 엘튼은  에마를 좋아하는데, 에마는 그것도 모르고 그 모든 게 자기랑 함께 있는 해리엇 때문인 줄 아는 거다. 이게 '나는 얘랑 얘를  연결시켜줘야지' 하는 강한 욕망과 '내가 틀릴 리 없어'라는 강한 자기 확신으로 인해 벌어진 크나큰 실수가 되는데, 아아, 너무  싫은 것이, 정말이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게 너무나 명명백백하기 때문이다.  아, 여기까지 쓰면서도 스트레스받아.


형부가 에마에게 '엘튼이 너에게 관심이 있네'라고 하는데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엘튼은 해리엇을 사랑하는데'라고만 생각하는 거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라. 그런데!! 엘튼이 에마에게 청혼하는 것이다.



일단  이 자체로 문제는 심각하다. 엘튼이 해리엇을 좋아한다고 설레발친 게 에마인데, 그런 엘튼이 에마를 좋아한다니. 엘튼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던 해리엇은 대체 뭐가 되는가. 자신에게 왔던 청혼마저 거절한 상황에서, 나를 사랑하는구나! 했던 그  남자가 사실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고, 자신은 커다란 착각에 빠져있었다니!! 아 얼마나 쪽팔린가!! 그 마음이 받을 상처는 또  얼마만큼의 크기일까. 게다가 에마는? 에마야말로 가장 충격인 게, '쟤는 널 사랑해, 진짜야, 확실해' 했는데, 그 '쟤'가 날  사랑한다니. 멘붕인 것이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나…



에마는 당황했을  것이다. 에마는 엄청 당황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문제를 바로잡고 싶었을 것이다. 일단 에마 스스로가 결혼 생각이 없는  여자이고 엘튼을 사랑하지 않으니, 엘튼을 거절하는 것도 해야 할 일이고, 해리엇이 받을 상처 역시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에마는 아마도 자신이 설레발친 것에 대한 반성을 해야 할 것이고, 실수를 인정하게 될 것이고, 앞으로 나갈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러기도 했다. 그렇지만... 에마는 그 사이에 '어떻게 엘튼 감히 네가 나를 좋아해?' 하는 거다...  아, 딥빡침...... 해리엇에게 엘튼을 붙여주려고 옆에서 속삭일 때의 엘튼은, 이 지구 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남자였는데,  그런 엘튼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하자 '어떻게 감히 네가!!'가 되는 거다. 아, 너무나 딥빡침이 몰려와서 숨이 막힌다.



해리엇이  하트필드에 처음 왔던 바로 그날부터 벌써 그런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다. 길게 생각하면 할수록, 썩 괜찮은 결합이라는 생각이 더  커졌다. 엘튼 씨의 상황은 아주 적절했다. 그 자신이 어엿한 신사이고 하천한 친척도 없는 데다, 해리엇의 수상한 출생에 대놓고  이의를 제기할 만큼 대단한 가문도 아니었다. 그녀가 들어갈 안락한 집도 있고, 에마 짐작에는 아주 충분한 수입도 있었다.  하이베리의 목사직 수입이 크지는 않지만, 그에게는 따로 상당한 재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에마는 그를 아주 좋게  보았으니, 성격 좋은 호인에다 점잖고 세상살이에 대한 유용한 식견도 부족하지 않은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 자체가 워낙 호감을 주는, 아주 까다로운 여성이 아니라면 누구나 좋아할 법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단한 미남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의 외모에 대해서는 두루 칭찬이 자자했는데, 다만 에마 자신은 이 칭찬에 끼지 않았으니 그녀에게는 필수적인 어떤 품격이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p.52)


내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잘 알지도 못하고 또 그 시대에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그녀에게 가하는 비판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말이 되든 안되든,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에게 '품격은 떨어지지만 사실 여러모로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주려는 에마가, 정작 자신에게 청혼한 그 남자에게 '어디 네  따위가 감히' 하는 게 너무나 싫은 거다.

게다가, 자신이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라고 착각해놓고, 그에게 버럭 화를 낸다. 야, 너 왜 걔가 아니라 나를 사랑한다고 해, 왜 지조가 없어???????????? 하고... 


하아…

그 지조, 네가 만든 거야. 아이고야…



수모도 이런 수모가 없었다. 결국 엘튼 씨 본인이 여러 면에서 그녀의 생각이나 믿음과는 정반대인 위인임을, 오만하고 방자하고 건방지며 제 잘난 줄만 알지 남의 감정은 돌볼 줄 모르는 위인임을 증명해 보인 셈이니 말이다.

상례와는  반대되는 결과가 빚어졌다. 엘튼 씨가 구애를 하고 나선 것이 그를 더 낮게 평가하게 했다. 고백과 청혼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안  되었다. 그녀에게 그의 연모는 별것 아니었고, 그의 희망은 모욕이었다. 결혼 한번 잘해 보자는 욕심에 오르지 못할 나무를 넘보며  사랑에 빠진 시늉을 했지만, 걱정할 만큼 실의의 고통을 겪지는 않으리라는 점만큼은 확실하다고 안심해도 좋았다. 말에서나  매너에서나 어떤 진정한 애정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p.199)



엘튼  씨가 에마를 진정으로 사랑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에마의 예상대로 엘튼 씨는 한 달쯤 지났을 때였나, 다른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을 하기로 한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상처를 회복하는 적절한 시간인지는 알 수 없다. 엘튼은, 정말 결혼 한 번  잘해보고자 '오르지 못할 나무'를 넘본 남자일 수 있다. 그럴 확률이 크다. 그런 남자를 제쳐내는 건 에마가 잘한 게 맞다.  그렇지만, 그런 남자가 자신의 친구인 해리엇과 결혼한다면 어떻게 됐을까... 해리엇에게 소개해 주면 세상없이 천상의 배우자가 될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게 청혼한 순간 오만하고 방자하고 건방진 사람이 된 걸까. 이건 그냥 '내 타입 아니야',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와 다르잖아? 만약 그가 정말 괜찮은 남자였다면, '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로 끝났어야 되는 건데, 온갖  분노가 다 나오는 거다.  그의 재산 없음, 품격 없음부터 시작해서 사실 에마를 가장 화나게 했던 건, 그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데에 있다. 근데 그건 자기가 착각한 거잖아 ㅠㅠ 



그래서 내  젊은 날의 저 사건이 생각났다. 괜찮은 남자라서 다른 여자 소개해 주려다가 내가 사귀게 된 사연이. 나 스스로에게 쪽팔리지  말자며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사귈게' 한 거랑, '이런 오만방자한 놈' 하면서 좋아하지 않는 남자랑 사귀지 않은  에마랑 누가 더 잘하고 누가 더 못한 걸까, 생각하다가, 결론이 안나는 아침이다.



그나저나  이 책에서의 시대적 배경 특성상, 너무나 가문이며 재산 얘기 신분 얘기 나와서 절반쯤 읽었는데 계속 빡친다. 에마가 이번 실수를  계기로 성장하는 모습이 보일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이렇게 절반쯤 까지는 사실 전혀 성장과 거리가 먼 것  같다. 또 사람을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는 것 같아 ㅠㅠ 

아, 그러나 에마보다도 이십 년을 더 산 나 역시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는 거겠지.

예전에  읽다가 만 [늦여름]도 그렇고, 일도 안 하면서 돈만 많은 사람들 얘기를 읽으면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날까. 그러면서 그 돈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내가 에마에게 화나는 건, 에마가 너무 좋은 가문에 돈도 많은 데다가 그 지역의 유명인사라서 스스로  열등감에 휩싸여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역시 지금 태어났어야 했다.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어서 폭발했을 것 같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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