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 속 여유를 음미하는 나의 방법
어쩌면 그 날에만 느낄 수 있었던 나의 소중한 감각에 응답하기 시작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이전에는 위의 문구가 꽤나 긍정적으로만 다가왔었다. 이전의 내 일상은 이따금씩 내 삶으로 다가오는 새로 적응할 거리들이 내 삶 속에 연착륙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이를테면 새로 발견한 좋은 카페의 사장님과 익숙해지는 과정과 같은 것이랄까.
그래서인지 나에게 인간 적응의 탄력성을 일깨워주는 것들은 내가 현재 연재하고 있는 여행이나 구체적인 운동 목표 설정과 같은 새로운 도전들이었다. 쉽게 말해 나의 삶에서 말하는 적응은 대부분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적응의 여부가 삶의 존폐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현실 속에서는 말이다.
직장인이 된 지금도 내게 등떠밀듯 적응을 요구하는 상황이 아직까진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상황이 내게 적응과 익숙해짐에 대해 반문하게 했다. 무엇보다 큰 변함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예민했던 내 감각을 무뎌지게 한다. 왜일까? 라는 질문을 여러 번 던져보았다. 내가 얻은 나름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내 감각을 특별하게 자극할 만한 새로운 외부적 자극의 부재
2.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 및 피로감으로 인한 감각의 무뎌짐
3. 에너지 사용의 선택과 집중을 위한 몸의 적응 (보다 중요한 활동에의 집중적 에너지 투입)
사실 위의 세 가지 이유들은 번호는 달리 매겨졌지만 모두 맞물려 있다. 1번은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함 때문일까, 아니면 2번과 3번 이유로 인해 내 자극의 역치 수준이 달라진 것일까. 절대적 시간이 부족해서라고 말하기엔 내가 보다 자유로웠을 때의 내 삶을 돌아봤을 때 하기 힘든 변명이다. 난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호기심의 총량에 비해서 늘 생각은 많은 반면, 행동은 적은 편이었다. '왜 그 때는 나에게 주어진 많은 시간이 소중함을 몰랐을까' 스스로 떠올리지만 내게 다시 그 때 만큼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내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새로운 것들을 찾아나서고 경험하기 위해 행동으로 옮길지는 사실 자신있게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2번과 3번. 나는 확실히 언제부턴가 기계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일어나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사무실에 앉아 커피 첫 모금을 마시기까지. 그 숨막히는 routine 속에 어떤 새로운 자극이 비집고 들어올 수 있을까. 더구나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지하철에 몸을 싣는 이들만이 가득한 환경에서 말이다. 아, 최근 들어 한 가지 있었다. 내가 지하철에 들어서기 전부터 지하철 자리 3개인가 4개인가를 차지하고 누워 술에 취해 몸을 못가누고 있던 사람. 이 정도는 되어야 새로운 자극이라 할 만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요새 가끔씩(점점 빈도가 높아지는 것 같다) 내가 하던 생각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해 내가 지금 이 순간에 이곳에 있는 것이 꿈만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이쯤 되면 단순히 감각의 무뎌짐만의 문제가 아닌 걸지도 모르겠다.
2번과 3번의 영향이 크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건 주말의 존재였다. 주말마다 내 감각과 정신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매우 깨어있었고, 새로운 자극을 언제든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가 끝난 상태가 지속되었다. 거리에서 보는 사람들이 입은 옷의 색감과 공기의 냄새, 요며칠 사이 부쩍 뜨거워진 바람, 내가 즐겨듣던 노래의 악기 소리까지 내가 평일에는 쉬이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감각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면서 나는 이들을 잘 기록해두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요새 읽는 책 [라틴어 수업]의 저자 한동일 교수는 자신을 향해서도, 바깥을 향해서도 열려있는 사람은 한순간 스치는 바람이나 어제와 오늘의 다른 꽃망울에도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을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매일의 감각을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기로 결심했을 때의 심경과 매우 유사해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깨어있음도 동기가 있어야 하는 법. 나는 그 매개를 글쓰기,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읽고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글쓰기로 잡았다. 글쓰기에 대한 동기는 나의 감각을 보다 깨어있게 했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순간의 생각들을 포착해 집중하도록 했다. 또 내 글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독자들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나 스스로에게 질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건강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질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가장 많이 해야되는 일은 좋은 글을 읽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핸드폰을 보는 시간을 줄이고 책 읽는 시간을 늘리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어쩌면 앞으로의 나의 삶은 무뎌지는 감각을 지속적으로 다잡아야 하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위에 적은 세 가지 이유 말고도 내가 이전보다 나이가 들어서 감각과 감성이 무뎌지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학교 시절 음악 동아리의 일원으로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들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 그 감성은 다 어디갔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런 점에서 5~60대가 되어서도 감성과 트렌드를 놓치지 않는 아티스트들의 천재성과 노력은 정말 박수 받아 마땅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수 두 사람은 프린스와 마이클 잭슨. 프린스의 사망 2년 전인 2014년 발매된 앨범 [Art Official Age]는 그의 나이가 당시 만 58세라는 것을 믿을 수 없는 펑키함과 사운드의 트렌디함을 보여주었다. 프린스 음악을 잘 모르던 당시 앨범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때가 기억이 난다. 마이클 잭슨의 사후 5년 뒤인 2014년(공교롭게도 프린스의 앨범과 같은 해)에 발매된 [Xscape] 역시 이전 마이클 잭슨의 음악들과는 다른 신선함으로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감각과 감성은 분명 구분되어야 하지만 내 생각에 이 둘은 분명 상호보완적이다. 감성은 감각이 깨어있을 때 비로소 발아할 수 있다. 동시에 감각은 감성의 도움에 힘입어 감각적으로는 똑같은 사물과 현상일지라도 수만가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야기가 다소 옆으로 빠졌지만, 어쨌든 지금 내 나이는 사춘기나 20대 초반처럼 감성이 차오르는 때는 지났다.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보다 무거운 삶의 선택 상황들을 마주하며 나의 감각과 감성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점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진 않을까. 그런 점에서 어쩌면 앞으로의 나의 삶은 무뎌지는 감각을 지속적으로 다잡아야 하는 과정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 뭐 부정적으로만 볼 순 없을 것 같다. 감각 또한 근육처럼 지속적으로 적정한 수준의 외부 자극, 스트레스 등을 받으면서 더 기민하게 기능하는 것이라는 생각이기에.
앞으로 계속될 나의 감각 훈련이 생각을 깨워주고, 사물과 현상의 다양한 면면을 볼 수 있는 탄력성을 더해줄 거란 생각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