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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 Descansador Sep 23. 2018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순간

할머니를 보내드리며 

게으른 마음으로 주말의 여유를 즐기기에 이번 주말 나의 마음은 너무도 무거웠다.

주말의 시작이 그러했고, 끝 또한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토요일 오전. 

10시 45분 포항행 KTX를 타기 위해 어머니와 나는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길을 나서기 직전까지 짐을 싸지 않는 나의 나쁜 습관은 계획보다 늦어진 기상 시간으로 인해 어김없이 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다행히 기차를 놓치지 않고 타기 위해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여유를 두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전 기차에 빠지만 섭섭한 맥모닝을 포장해서 갈 수 있는 호사를 누렸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10시 반을 기점으로 맥모닝 메뉴들이 전부 종일 메뉴로 전환된다는 것을 잊고 있던 나는 하마터면 맥모닝을 주문하지 못할 뻔했다)


2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포항역에서 어머니와 나는 먼저 와서 우릴 기다리고 왔던 아버지의 차로 곧바로 바꾸어 타고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할머니의 달라진 모습을 본 나는 사실 좀 놀랐다. 

병원을 옮기시기 전 뵀던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안그래도 머리숱도 얼마 없는 할머니의 머리는 짧게 깎여 있었고, 손발을 비롯한 피부 대부분이 금방이라도 껍질이 벗겨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전에 방문했을 때는 눈을 부릅뜨고 손자를 알아보시는 듯했던 할머니는 굳게 눈을 닫고 숨을 한 숨, 한 숨 힘겹게 내쉬고 계셨다. 


내가 너무 늦게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할머니께선 그렇게 힘들게 숨을 붙잡고 계신 듯했다. 

내가 이렇게 늦게나마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를 뵈러오기 이전에도 아버지는 거의 매 주말 한 번씩 내려가셨지만 나는 아버지로부터 할머니의 정확한 증세에 대해서 어떤 자세한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어두운 표정으로 '많이 안 좋으셔'라고만 하셨을 뿐. 


나도 나다. 

아무리 자세한 이야기를 못들었기로서니 그런 말을 듣고도 선뜻 시간을 내어 할머니를 뵈러 오지 못했던 나 스스로가 뒤늦게 미워졌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건강이 이 정도로 위태로우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손자가 왔다며 할머니를 세차게 흔드시던 할아버지도, '엄마 눈 좀 떠봐. 엄마 손주 왔데이'를 연신 외치던 아버지도,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좀처럼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시지 않는 아버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 떨어져 도저히 혼자 편하게 잠을 주무실 수 없다던 할아버지께서는 당신이 환자가 아니심에도 가까이에서 할머니를 돌보시기 위해 함께 입원하셨다. 원칙상으로는 입원이 불가능하지만 병원 측에서도 아버지의 사정을 듣고 딱히 여기셔서 어렵게 허락을 받아낸 듯했다. 


할머니가 중환자이신만큼 면회를 오랜 시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 그리고 큰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시장에서 회를 떠서 구룡포의 한 조용한 바닷가로 갔다. 차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구룡포 해수욕장의 부산한 바닷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바닷가를 따라 좁은 시골길이 나있고,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조그마한 항구 마을이 있었다. 길을 걷다보니 거위들이 창도, 울타리도 없는 뚫린 집에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창도, 울타리도 없는 집에 사는 거위들



그런 집을 보는 것도, 거위를 보는 것도 낯설어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이들은 어김없이 '꽥꽥' 언성을 높였다. 위 사진의 중앙에 있는 거위가 어미인 듯 했는데 목청이 정말 대단했다. 더 다가가면 주인도 집에서 나와 스테레오로 언성을 높일 듯하여 엷은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를 떴다. 


고요한 바닷가와 인심 좋아보이는 조그만 항구 마을은 할머니의 부재를 더욱 진하게 느끼게 했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자라오신 아버지와 달리 지금까지 내 인생을 대부분 도시에서 보내왔던 나에게 '바다'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명절에 포항에 내려오면 원없이 회를 먹고, 바닷가에 나가 사촌형 누나들과 뛰어노는 것이 연례 행사처럼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았다. 



조용한 바닷가와 시골길 



이런 아름다운 바다와 예쁜 마을도 할머니가 함께 안 계신 지금 할아버지에게는 무의미했는가 보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도착한 날, 그리고 떠나던 그 다음날까지도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으셨다. 


밤에는 저녁을 다함께 저녁을 먹은 뒤, 밤 늦게까지 할아버지, 아버지, 나 이렇게 3대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 내가 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너무 고마워하고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면서도 할머니가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함을 너무도 속상해하셨다. 내가 드린 용돈이 오히려 할아버지가 느끼는 할머니의 부재를 되려 크게 한 매개가 같아 괜시리 마음이 좋질 않았다.하지만 그것이 손자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부터 비롯된 안타까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애써 좋은 부분들만 보려 했다. 우리 3대는 그렇게 새벽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지나 할아버지가 겪으신 한국전쟁 당시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할머니가 고생하신 오랜 세월들을 곱씹었다. 






그 다음 날은 정말이지 눈 깜빡할 새 왔다. 할아버지는 한 숨이라도 주무신 걸까. 우리가 술자리를 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시간이 2~3시 경이었던 것 같은데 할아버지, 아버지는 불과 몇 시간 뒤인 일출을 보고 오셨다고 했다. 나 역시 잠결에 끊임없이 발소리, 식기가 맞부딫히는 소리, 냉장고가 여닫히는 소리들을 들으면서 깊이 잠들지 못했다. 


이른 아침을 챙겨먹고 길을 나서기 전에 주변을 다시 산책했는데, 날씨가 어제만큼이나 쨍쨍하고 아름다웠다. 적당히 건조한 대기 속에서 불어오는 바닷가의 젖은 바람은 자연이 준 그 어떤 것보다도 조화로운 선물 중 하나인 것 같다. 따뜻하고 짠내나는 바람으로 차분히 세수를 한 뒤, 우리는 다시금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서울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다시 보는 할머니 얼굴이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울먹이시면서 내가 드린 용돈 봉투를 억지로 할머니 품에 끼워넣으시고는 자리를 뜨셨다. 그 날도 할머니를 계속 만지고, 흔들고, 또 불러보았지만 할머니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시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할아버지를 혼자 남겨두고 길을 나서는 게 영 마음이 편칠 않았다. 아버지는 나 이상으로 힘드셨는지 할아버지와 짧은 인사를 마치고 오히려 발걸음을 빨리 하시며 그 공간을 벗어났다. 








그로부터 불과 4일 뒤의 일이었다. 

여느 날처럼 알람을 들으며 눈을 떴다. 집안이 유난히 고요했다. 

핸드폰을 보니 일어나면 전화를 달라는 어머니의 문자가 와있었다. 


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질 않을까. 

새벽 1시경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벽에 곧장 포항으로 향하셨다. 

내가 자도록 두고 먼저 떠나신 건 어차피 장례식장에서 할머니의 손자로서 밤잠 설쳐가며 손님을 맞아야 했기에 그 전에 잠이라도 충분히 자두는 게 좋을 거라는 어머니의 배려였다. 


나는 일단 출근해서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가장 빠른 표를 끊어 서울역으로 향했다. 

쨍쨍하고 맑은 날씨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불과 4일 전에 왔던 포항역인만큼 묘하게 친숙한 느낌이었지만, 내 심경은 그 당시와는 사뭇 달랐다. 

아니, 아마 모든 게 달라졌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포항은 더 이상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오시는 손님들을 맞았다. 

팔에 찬 완장이 내가 할머니의 손자임을 새삼 일깨우는 듯했다. 

정말로 고맙게도 너무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할머니의 가시는 길을 위로해주셨다. 


우리 아버지는 참 효자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나 바쁜 와중에도 누구보다 더 할아버지, 할머니의 건강과 안위를 챙겼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몇 달간 아버지는 거의 매 주말을 포항과 서울을 오가는 강행군을 계속하셨다. 


깊은 아버지의 마음만큼이나 할머니의 임종은 그에게 너무나 힘든 아픔이었나보다. 

아버지는 정말이지 가슴이 미어지게 우셨다. 내 일생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슬프게 우시는 모습은 이전에도 본 적이 없고, 아마도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 같다.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아버지의 슬픔의 무게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인 동시에 '우리 아버지의 어머니'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슬픔은 할머니의 임종으로 인한 직접적 슬픔보다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슬픔을 통해서 느끼는 2차적 슬픔의 크기가 훨씬 더 컸던 것 같다. 


할머니 장례식장에는 '어머니의 아버지', 외할아버지도 오셨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 퇴임을 하셨고 작년 구순을 맞으셨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만난 그 어떤 어른보다 굳세고, 또 곧으신 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높은 기준만큼 당신에게도 늘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시며 일생을 살아오셨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다리가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곧은 자세로 큰절을 하셨다. 그를 바라보던 나는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와주신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렇게 3일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뼈가 타는 낯선 냄새가 나는 화장장에서 우리 할머니의 몸은 한 줌의 고운 가루가 되었다. 

고운 할머니를 모시고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꼐 사시던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정해진 묘지로 향했다. 연일 눈물을 보이시던 할아버지도 할머니 가시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의연하게 보내주시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평생 당신의 배우자와 아들들과 딸을 뒷바라지하시다가 생을 마감하셨다.  


영화 [코코]에서 망자와 유족들을 연결해주는 다리


할머니 가시는 길이 부디 편안했으면.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할머니를 떠올리고 기억할 것이다. 영화 [코코]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망자와 유족들을 연결해주는 다리가 있다면, 그리고 정말 남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잊지 않고 기억해줄 때 비로소 할머니가 꽃들로 가득찬 다리를 건너 우리들을 만나러 오실 수 있는 거라면, 나는 언제까지나 할머니가 그 다리를 걱정없이 건너오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다. 


이제 편히 쉬세요, 할머니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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