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하루는 안녕한가요
잔잔한 아침 알람이 울린다.
벌써 아침이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개운했던 아침이 요새는 일어나는 아침마다 찌뿌등하기만 하다.
그래서 달콤하게 나를 깨우는 잔잔한 멜로디가 더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한 주가 절반은 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화요일이다.
제법 익숙해진 루틴을 따라 세수를 하고,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걸치고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매일 이토록 이른 시간에 일어나 내 아침을 챙겨주신다.
자취생들은 꿈에 그리는 호사를 나는 매일 아침 누리고 있는 거다.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집을 나선다.
나는 걷는 것과 뛰는 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요새는 그 두 활동 모두 온전히 그것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걸으면서 핸드폰 보지 말아야지'라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친구에게 짧은 문자를 쓸 때에도 잠깐 걸음을 멈추고 문자를 보낸 뒤 재차 걸음을 옮기곤 했다. 그랬던 내가 요샌 뭐가 그리 바쁜지 집을 나서 역까지 걸어가기까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질 못한다. 역에 갈 때까지만이라도 걸음에 집중해보면 좋을텐데.
출퇴근 시간과 무관한 시간에 지하철, 버스를 이용할 일이 더 많았던 예전에는 사람들이 가진 표정, 옷 스타일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출퇴근 시간은 그런 재미가 영 없다. 사람들 표정이 전부 아스팔트 색과 같은 잿빛이다.
어쩌면 그래서 모두가 그런 서로의 그런 만성 피로를 애써 모른 체하며 각자의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피곤함을 나누고 공감한다고 해서 내 피곤함이 덜해지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나의 피곤함을 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게 될 뿐.
사람들 표정이 전부 아스팔트 색과 같은 잿빛이다.
어쩌면 그래서 모두가 그런 서로의 그런 만성 피로를
애써 모른 체하며 각자의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실로 피로함은 인간은 많은 행복을 앗아간다.
더군다나 서로가 다닥다닥 붙어 각자에게 최소한의 공간 조차 마련되지 않는 출퇴근 시간 '지옥철'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주말 백화점 문 앞에서 마주쳤다면 기꺼이 나를 위해 엷은 미소와 함께 출입문을 잡아주었을 사람은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서는 바로 뒤 붙어있는 사람이 내쉬는 숨소리 조차 질색을 하며 눈을 질끈 감으며 서둘러 이어폰을 꼽는다. 그렇게 우리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청각적으로나마 '내 공간'을 마련한다.
사무실에 들어와 내 자리에 앉으면 비로소 기상 후 나와 계속 동행했던 조급함이 다소 진정된다.
출근하는 팀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가볍게 안부를 묻는다.
나는 종종 그들의 스타일의 변화나, 그 날따라 두드러지게 보이는 점들을 종종 포착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을 그들에게 드러내어 이야기하고 대화의 주제로 삼는 것은 늘 망설이게 된다. 사무실은 그런 대화와는 분리된 공간이라는 나의 선입견이 나의 말과 행동을 검열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용기 내어 상대방의 스타일 변화에 대한 내 긍정적 인상을 말했다.
하지만 나 역시 느꼈다. 말하는 나도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그런 나의 말에 상대방도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면 나는 그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공감'이 삶의 큰 화두인 나에게는 아직도 이런 사무실 환경이 어색하다.
하지만 분간이 되질 않는다. 나의 부자연스러운 화법에 화답하는 부자연스러움이었는지, 아니면 사무실이 그런 대화와는 분리된 공간이라는 선입견을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공감'이 삶의 큰 화두인 나에게는 아직도 이런 사무실 환경이 어색하다.
유난히도 시간이 안가는 오늘, 노곤해지는 오후 시간 '앞으로 30년 이상 직장 생활을 더한다고 생각하면 지금부터 장기적으로 계획도 잘 세우고 본인의 커리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사장님의 말씀이 백일몽처럼 스쳐갔다. 문장 뒷 부분의 중요한 메세지보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에 압도되어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면서 그 순간들을 그리워하며 즐거워하는 때가 많았는데, 요새는 그보다는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함과 우려가 내 생각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미래의 범위를 30년 후로 늘려본다는 생각, 그리고 그 그림 속에 있는 나는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로서의 내가 아니라 '직장인'과 '커리어'로서의 나로 가득채워지진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내 머리 속을 가득채웠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자연스레 부모님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당신들은 나를 낳아 키우고 교육하시는 동안 얼마나 많은 '자신의 것들'을 포기하며 사셨을까.
시간이 흐르면 그 사람의 취미와 흥미가 바뀐다곤 하지만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리는'
흥미, 취미라곤 또 왜 없을까.
그 사람의 흥미와 취미는 그 사람의 삶에 풍요로움을 더하는 역할도 하지만, 그 자체로서 그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소중한 재료다. 나의 부모님이 내 나이 즈음 당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본인의 색깔'은 얼마나 바래지 않고 남아있을까.
나는 앞으로 얼마나 내 색깔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앞으로 칠해질 새로운 물감들은 내 수채화를 더욱 아름답게 할까, 아니면 부조화롭게 할까.
새로운 색이 덧칠해진다 해도 그 모습 역시 나라고 한다지만, 어디까지가 '나'이고 싶은 나일까.
본질적인 질문들이 걷잡을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로서의 내가 아니라 '직장인'과 '커리어'로서의
나로 가득채워지진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내 머리 속을 가득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