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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Mar 31. 2023

떠나보내는 역할을 떠맡다

에세이

울 엄마는 아직도 내 이야기를 하다가 아버지를 언급한다. 나를 낳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면서 연애시절 그가 어땠는지 툭툭 내던지곤 한다. 울 엄마랑 30년의 세월을 보낸 나는 보통 그런 말들을 못 들은 척 넘긴다. 내가 뭔가를 잘하면 잘하는 게 아빠를 닮았고 못하면 아빠랑 다르게 못해서 신기하다고 한다. 어릴 땐 그게 참 싫었는데 오늘 문득 전화를 하다가 이해하게 됐다. 엄마는 떠올리기 싫어도 반이나 닮은 나의 존재 때문에 아버지를 떠올리고 마는구나 싶었다. 족히 30년이란 세월이나 못 봤으니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싶은 생각도 가끔 들겠지만 나를 볼 때마다 그의 존재를 증명하고 마는 것이다.


문득 그 오랜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생각했다. 아버지의 세계가 부재함으로써 생긴 나의 세계의 공터, 그곳에는 내가 아니라 어머니란 존재가 쓸쓸히 외롭게 터벅터벅 걷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자식은 부모의 품을 떠나 어떻게든 존재를 증명하고 만다. 특히 아들은 어머니의 세계를 한참을 벗어나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 어머니는 그동안 아버지와 함께 기다리는데 울 엄마는 같이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아마 쓸쓸할 것 같다. 오랜 시간 동안 떠나보내는 역할을 떠맡아 버린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니 마음 한편이 눅눅해지고 말았다.


여러 이야기들 속에 떠나보내는 역할을 떠맡은 여인들이 있다. 싯다르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내와 아들을 두고 깨달음을 위해 떠났다. 그 여인의 이름은 아쇼다라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많이들 기억하지만 아쇼다라라는 이름은 꽤나 생소하다. 영웅이나 구세주의 이야기 뒤편에는 그런 식으로 떠나보내는 역할을 떠맡은 어머니들이 꼭 있었다. 이건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야기는 은유와 비유로써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창이 되어 주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가 어릴 때부터 그냥 그랬다. 지금에서야 그 상세한 이유를 알았는데 다름 아닌 울 엄마 때문이었다. 아들인 내가 경우도 없이 맘대로 판단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냥 나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우리 세대의 아이들은 어머니의 역할을 그런 식으로 축소시키지 않으려 한다. 내 생각에 세계가 그간 다뤄왔던 편견과 고정관념을 따르지 않으려는 노력은 기존 세계를 부수려는 노력이 아니라 세계관의 확장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성역할을 전복시키고 경계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가끔은 너무 거칠어서 기존 세계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가 그런 역할을 떠맡아 버린 걸 지도 모른다. 핑계 대는 걸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자란 세계는 우리에게 일정 그런 역할을 요구한 걸지도 모른다. 이전 세대가 그렇게 다뤄진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다뤄져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된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동시에 다음에 올 사람을 기다리고 기대한다. 언젠가 나 역시도 울 엄마처럼 떠나보내는 역할을 떠맡게 될지도 모른다. 나의 자녀가 나를 떠나는 날. 나는 엄마의 역할을 그제야 완전히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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