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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06. 2023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

에세이

지하철은 만남을 기대하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특히 1호선이면 더더욱. 내 몸통 둘레만큼의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지하철이 지옥철이란 별명을 갖게 된 건 특이한 일이 아니다. 지하철은 분명 좋은 경제적이고 좋은 교통수단이지만 출퇴근 시간마다 겪는 무식한 운송방법에 잔뜩 예민해진다. 출퇴근길에 타인에게 타의로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일은 정말로 곤욕스러운 일이다. 나의 신체만 내어진다면 다행일 텐데 타인의 몸까지 떠맡아야 한다니. 내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외친다. '이건 생존에 위협적이야' 덕분에 아침부터 스트레스만 가득해질 뿐이다. 음, 이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아무튼 지하철은 내게 그런 의미의 운송수단이다. 지하철은 불특정 다수에게 내 공간을 내어주고 타인의 공간을 원치 않게 점유하게 되는 그런 곳. 그리고 1호선만 타면 유독 특이한 사람들을 만난다. 1호선은 대체 왜 그런 걸까?


하루는 1호선을 타고 인천에서 서울 방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백인 남성이었고 4~50대쯤 되어 보였다. 그는 지하철 노선도를 보고 있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에게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적당한 발음으로 중학생 수준의 영어실력을 구사하며 그에게 내릴 역을 알려줬다. 그와 나는 옆자리에 앉게 됐는데 미국인 특유의 친화력이 그에게도 있었다. 비교적 최근에 바꾼 듯 한 뉴발란스 신발, 여행용 백팩과 바람막이 그리고 오래된 듯한 통 큰 청바지(하지만 그에게는 크지 않아 보였다. 나도 덩치가 큰 편이지만 그 옆에선 작은 편이었다.)는 그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것임을 확신하게 만들어줬다. 그는 한국에선 대체 왜 구글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아마 북한 때문이지 않을까?라고 둘러서 대답해 줬다. 유독 한국에서는 구글맵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양인 듯하다. 나도 갑자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분명 구글맵을 잘만 사용하는데 한국은 왜 구글맵에 친화적이지 않을까? 그런 궁금증에 스스로 답하는 동안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미국을 떠났다고 했다. 나는 잠깐 그가 마이클 무어 감독이거나 아니면 민주당 측 주요 인사라 FBI를 피해 도망을 다니나 싶었다. 지금은 아니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트럼프는 미국에서 살아가고 활동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처음 보는 백인 남성의 정치성향까지 알아버렸다. 그는 대뜸 트위터를 켜서 일론 머스크의 계정을 보여주며 말했다. 최근 일론이 트위터를 인수한 것에 굉장한 불만을 토로했다. 일론이 트럼프를 다시 트위터에 복귀시켜 줄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블록 된 상태지 않느냐고 물었다. 아무튼 그는 일론 머스크가 미친놈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 점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그렇게 그와 미국의 정치상황에 대해 얘기했고 그가 일본과 한국, 싱가포르 등을 돌아다니며 여행 중이란 사실을 알았다. 최근 코로나 때문에 한국에 갇힌 상태라고 했다. 나는 사실 그와의 얘기를 즐겼다. 재미있는 아저씨구나. 싶었지만 나는 먼저 내려야 해서 금방 내렸다. 그리고 나는 한동안 피식대며 웃었다. 대체 미국인은 어떤 민족인 걸까 싶었다. 처음 보는 동양인 남자에게 자신의 정치성향을 밝히다니. 


하루는 1호선을 타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는 중이었다. 한창 자리에 앉아 넷플릭스로 D.P를 보고 있었다. 와중에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더니 왠 깡마르고 왜소한 남성이 더 깡마르고 왜소한 할머니를 붙잡고 쌍욕을 하고 밀치고 문밖으로 끌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 장면에 간섭하지 않고 말리질 않길래 일어섰다. 가서 두 사람을 분리시켰고 할머니는 얼른 저쪽 반대방향으로 보냈다. 그 남자는 나를 앞에 두고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흥분 상태였고 나는 그를 진정시키고 한편으론 겁을 줬다. 할머니는 노상전도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남자는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노상전도자들이 늘 그렇듯 지하철에서 예수 믿고 천국 가라고 하고 다닐 테고. 그 남자는 그 말에 꼭지가 돌아서 할머니를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할머니가 간 반대쪽으로 보냈고 그는 한 칸 너머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씨발 내가 저 년 죽여버릴 거야.라고 외치며 말이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그의 뒤를 따라갔고 노상전도자 할머니를 찾아낸 그 앞에 다시 다가가 멀리 떨어지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다음 역에 내렸고 그는 내 옆에 앉아 씩씩거렸다. 나는 그 옆에 앉아 다시 넷플릭스를 보려고 했지만 좀처럼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그러고 그는 곧 다음 정거장에 내렸고 나는 조금 멍하니 앉아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음 정거장에 신고를 받은 듯한 지하철 경찰 둘이 내 칸에 나타나 싸움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한동안 아무도 둘의 말에 대답하지 않다가 누군가 그 남자가 내렸다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어서 어정쩡한 자세를 잡다가 아무 말도 못 해버렸다. 싸움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그냥 그를 진정시켰을 뿐이었다. 그 뒷일은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은 내가 그의 이야기를 조금 들어주는 건 어땠을까 싶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만은. 문득 두 사람 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다음에는 또 어떤 만남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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