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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21. 2023

말의 권력

에세이

'나이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을 열어라'라는 격언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이 많은 사람은 입도 많이 열고 지갑도 많이 여는 편이다. 지갑을 여는 것도 입을 여는 것도 사실 손윗사람이 할 수 있는 특혜 중에 하나다. 손아랫사람은 그것에 감사하며 면을 치켜세워주는 것이 도의적인 예의이다. 나 역시도 나이를 먹을수록 지갑과 입을 여는 것을 참기를 어려워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과의 자리가 조금씩 불편해졌다. 나는 지갑을 여는 것도 입을 여는 것도 불편한 것 같다. 서른이란 나이가 좀 그런 애매한 나이인 것 같다. 나이가 많은 것 같으면서도 많지 않은. 입과 지갑을 함부로 열었다간 눈총 받기 쉬운 나이인 것 같다.


사람들은 참 말하기를 좋아한다. 지금은 전혀 술자리에 가지 않지만 과거에 끌려갔던 술자리들의 경험을 되짚어보면 (나는 그때도 지금도 술을 전혀 못한다) 정말 전형적이다. 술자리는 왜 그렇게 전형적인 건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술에 조금 취하면 자기 얘기를 그렇게 한다. 계속해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가로막는다거나. 홍상수 영화가 따로 없는 현실을 나는 맨 정신으로 두 눈 뜨고 보고 있어야 했는데 참으로 고역이었다. 흥미로운 건 술에 취하면 나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내 말 좀 들어줘. 같은 호소 섞인 표정과 어투는 술자리에서 꼭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왜들 그렇게까지 얘기하고 싶은데 꾹 참고 있었던 걸까? 그래도 사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말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일방적이고 거만한 소통방식. 그러니까 모두가 조용히 하고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권위적 태도는 조금 참아주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사회가 이전보다 수평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그런 문화가 조금씩은 정착되어 가고 있지 않나 싶다. 지위나 권력에 의해 특정인이 말을 더 많이 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 문화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고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유튜브나 최근 급격히 늘어난 독립출판물들 역시 말의 권력이 이동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이 자신을 노출할 기회가 이전보다 늘었고 자신의 말을 누군가에게 위탁할 필요가 사라졌다. (물론 알고리즘이란 권력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이지만. 알고리즘은 적어도 착취적 행태를 보이는 권력자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때로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브런치 같은 곳이 술자리와 같이 피로하고 혼란스러운 장소로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런 곳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사실 여전히 말의 권력이 이동해야 할 곳은 많다. '누구나 말할 기회를 얻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가 애써 확인하지 않으면 모르는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기회를 받지 못하고 자신의 말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애써서 그 기회를 나눠야 할 곳은 있다. 그것까진 이 사회가 이뤄내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입을 열고 지갑을 열 수 있는 기회를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눠가질 수 있다면 그게 기능적으로 더 이상적인 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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