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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코의 인생에서 가장 파멸적인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종반부 죽음에 이르러 구원을 받는 모습은 생각해보면 조금 아이러니하다. 영화 내에서 줄곧 보이는 신약성서는 마츠코와는 상관 없는 장치이다. 마츠코는 교회나 기독교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었던 인물임에도 죽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 것 처럼 표현된다. 직접적으로 삶에서 구원을 얻은 것 처럼 표현된 것은 그녀의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류이다. 그녀가 누군가를 위한 메시아가 되었다고 구원을 얻은 것일까? 감독은 이 영화 내내 극단적인 화려함으로 극단적인 비극을 더욱 강조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상기하자. 그녀는 구원을 얻거나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니라 처량하고 우울한 삶을 가장 허무한 방식으로 마감했을 뿐이다. 그녀는 혼자일 때도 지옥이고 같이 있을 때도 지옥이란 표현을 쓴다. 그녀에게 있어서 삶은 지옥이었다. 혼자 있을 때도 지옥이라면 눈을 감고 잠에 드는 시간을 빼면 지옥이 아닌 순간이 없을 것이다. 같이 있다는 것에서 그녀는 위안을 얻는 게 아닌 지옥으로부터 자신의 시선을 돌려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녀가 AV배우 친구를 피하게 된 이유도 마찬가지다. 마츠코가 그녀의 집을 방문하면서 그녀가 자신을 지옥에서 시선을 돌릴 사람이 아닌 지옥에 마주하게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마츠코는 흔히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가지의 결여나 단점이 극단으로 치달은 설정의 주인공인데 이 경우엔 자아의 비대, 같은 말로 나르시시즘이 극대화된 캐릭터이다. 영화 속에서 마츠코를 제외하고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제각기 문제를 가지고 있다. 쇼의 여자친구, 마츠코의 여동생, AV배우 사와무라 셋 모두 경중을 떠나 자기 삶의 문제를 떠안고 있다. 그러나 셋 모두 마츠코만큼의 자기혐오나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셋은 자기 자신의 문제 해결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 마츠코의 경우 극단적으로 문제를 회피하고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다자이 오사무와 그의 대표작인 인간실격 역시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고 비극을 맞이한 인물이다.
마츠코의 삶을 재조명하고 서술하는 '쇼' 역시 전형적인 자아연민과 혐오에 빠진 캐릭터다. 스스로를 마츠코와 닮은 점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태도나 행동 역시 자기 삶의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기 보다는 회피하는 방식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자친구의 이별통보에 웃음을 짓는다거나 여자친구의 메시지를 들으면서도 담뱃불을 붙이려다가 때를 놓치는 모습, 자기 꿈을 방관하는 태도 등은 그가 마츠코와 닮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쇼는 마츠코만큼 결여와 문제가 극단으로 치달은 캐릭터가 아닌 보편적 범주 안에 있는 캐릭터로써 그가 이 작품의 화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이해가 쉽지 않은 인물인 마츠코를 보편적인 공감의 인물로 끌어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종반부 인물들이 마츠코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으로 마츠코라는 극단적인 캐릭터의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인 사람들, 그러니까 개인들 누구나 안고 있는 문제로 끌어 오게 된다. 영화 오프닝에서 쇼가 화려한 꿈과 그 이면에서 문제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 나래이션을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츠코란 캐릭터에 호불호가 과하게 갈리지 않도록, 이해 불가능하지 않도록 감독은 여러 장치를 마련해둔 셈이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이야기하면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인간실격을 읽었을 때의 퀴퀴하고 축축한 느낌을 잊지 못한다. 예술가의 삶을 살다가 예술가로써 자기연민으로 삶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 그의 작품 인간실격이 후대에 끼친 영향과 실제로 인간실격의 판매부수가 전세계적으로 높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기혐오라는 나르시시즘이 생각보다 많은 개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
마츠코의 모습은 그때 당시 소비되던 일본의 TV 프로그램의 많은 여자 주인공들의 모습과 오버랩 되며 그 유행을 그대로 계승했던 2000년대 초의 한국 드라마의 여자 주인공들도 비슷한 모습이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에 와서는 그런 자기연민에 빠진 캐릭터들이 고전적인 형태가 되었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미디어에서 사장된 듯 하다. 20여년의 차이지만 그간 쌓여진 나르시시즘 캐릭터들은 해체되서 점차 사라졌다. 그에 반해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이른 바 '사이다' 캐릭터들이 인기를 모는 것은 대중들이 현실에서의 삶이 나아졌다기 보다는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쌓인 문제들의 피로감에 의한 반발이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마츠코나 인간실격 같은 이야기는 대중들에게 너무 피로한 주제가 된 셈이다. 20여년의 시간동안 대중들의 자아존중감이 상승하진 않았을 테다. 내 생각에 이 작품은 앞으로 계속해서 부정적인 평가가 늘어가지 않을까 싶지만 그것은 마츠코의 일생을 혐오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공감하는 사람이 더 늘어나서 일 것이라 본다. 마츠코처럼 우리는 우리의 부정적인 모습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니까 말이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는 이 문제에 직면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고 그때 우리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들춰보며 깊은 공감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