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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박쥐의 오프닝 씬이 내게는 에덴동산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인간의 등장 같기도 하다. 상현이 등장한 후 쇼트는 넘어가고 죽을 고비에 선 효성 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의 카스텔라 이야기는 박쥐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인 성만찬의 일부이며 박쥐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의 함축이다. 더 나아가 설명하자면 카스텔라 이야기는 인간의 양가적 상태 즉, 강렬하고 거부할 수 없는 본능적 욕구와 그것을 제어하고 더 나은 것으로 나아가려는 숭고함을 동시에 지닌 인간의 양가성에 대한 함축적 비유, 그리고 동시에 영화 내에서 기능적인 의미로써 이제 곧 성만찬의 나머지 부분인 피, 포도주의 비유가 되는 흡혈에 대한 예고로 기능한다. 대부분 교회의 성만찬에서 카스텔라가 사용된다는 것을 알면 더욱 기발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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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부(사제)가 어떤 성질의 인간이어야 하는 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본능과 욕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늘 하느님(하나님)과의 대화(기도)에 집중한다. 심지어 가톨릭의 서품 사제들은 독신법으로 인해 결혼까지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숭고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또한 그렇게 남길 바란다. 대중들은 '본능'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인간에게 '숭고함'이란 꼬리표를 붙여준다. 대중은 왜 본능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인간을 우상화하게 됐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우리는 우리가 자연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무지했고 심지어 지금처럼 과학적으로 많은 것들이 설명이 되는 시대에도 개인의 욕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과거 그리스도교 지배 사회에서 교황과 사제는 이런 무지에 대한 해석의 책임이자 권력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시민사회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이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아브라함 계열 종교들이 그렇듯 통제와 억압이었다. 이런 독재적 억압은 인류사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대중들은 그리스도를 숭배하듯 숭고함을 우상화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사제들도 우상화되었다. 이런 전통적인 입장은 영화 전반부에 잘 이식되어 있다.
상현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숭고함)을 동기로 임마누엘 연구소로 향한다. 그는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의사 뒤에 서서 기도하고 벽 뒤에 앉아서 기도만 해주는 신부가 아닌 물리적으로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욕심에 불과하다. 그는 구원자 콤플렉스가 있는 신부이다. 그리스도를 닮고 싶어 하는 것과 그리스도가 되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운 좋게도 그가 ‘이브' 바이러스로 죽을 고비에서 헌혈받은 피가 뱀파이어의 피였고 살아남아 좋든 싫든 한국으로 돌아와 성자로 여겨지게 된다. 뱀파이어가 된 이후 그의 신체적인 능력은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지만 그것은 그를 괴롭게만 만든다. 기독교 문화 기반의 창작물에서 대부분의 이런 탈인간화는 ‘저주’로 통용된다. 후에 태주가 뱀파이어가 된 후 보이는 반응이 현대에 와서는 조금 더 익숙하다. 히어로(탈인간화)가 된 이후의 인물의 심리적 변화와 사건에 대한 적극적 극복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기곤 한다.
그런 그의 신체적인 변화에 의사는 그에게 '임신'이라고 농담한다. 중세 기독교 문화권에서 ‘임신’ 역시 저주로 통용되기도 했다. 애초에 출산의 고통은 아담의 최초의 죄와 연관되어 있거니와 중세 사람들은 악마의 강림이 여성의 임신(성관계)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다. 중세 마녀사냥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인과성에 대해 교회는 공인을 하기도 했다. 이런 신비주의 특히 악마와 관련된 문학 혹은 민담에서 여성은 재해 당사자이자 신체적, 정신적 주도권을 잃고 빼앗기는 역이고 남성은 거의 관찰자 혹은 구원자 역이다. (현대의 많은 문학과 예술작품에서도 역시 이와 비슷하게 여성은 다뤄진다. 영화 곡성은 이것을 정확히 비틀어 대중들의 스테레오 타입을 이용해 놀라운 반전을 만들 수 있었다.) 박쥐에서는 상현의 역할이 반대로 뒤바뀐 셈이 된다. 그는 계속해서 구원자 역을 자처하지만 반대로 자신의 신체적, 정신적 주도권을 본능에 잃고 만다.
이제 상현은 태주를 만나면서 그리스도교적 사랑(숭고함)이 아닌 인간적인 사랑(에로스, 본능)에 대해 완전히 눈을 뜨게 되고 그의 추락인 동시에 상승이 시작된다. 신부로써의 정체성은 잃지만 태주를 향한 극적인 사랑을 겪게 되고 그 강렬한 힘에 휘말려 자신의 남은 마지막 인간성마저 잃을 위기에서 그는 다시 자신의 숭고함을 되찾아 가는 여정을 되풀이하기도 한다. 영화의 절정에서 카스텔라를 나눠준 효성처럼 상현은 자신의 피를 죽은 태주에게 나눠준다. 태주와 상현은 서로의 피를 나눠 마시며 상호 능동적인 관계로 변형된다. 그리고 피가 섞임으로 인해 연인관계에서 불가능한 생물학적 의미로 진정한 하나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신체적 기능을 거의 잃은 라여사가 이 두 인물의 관계를 모두 지켜봄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가 혼인의 성사처럼 인정되는 것 마냥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종반부의 두 사람의 죽음까지 라여사가 지켜봄으로써 실질적으로 강우의 복수가 아닌 두 사람의 숭고한 사랑과 죽음에 증인이 되어 버린다.
피나 살을 나눠 먹는 식인 행위는 원시부족, 집단의 장례 의식 중 하나이기도 했다. 죽은 사람의 일부를 먹으면 죽은 이가 우리 안에 영원히 살 것이라는 미신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성만찬은 조금 이질적이고 미신적이지 않은가? 박쥐는 계속해서 본능적인 인간성과 숭고한 인간성의 두 가지 모두 인간의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양 극단에 서 있는 흡혈 행위와 성만찬 의식은 계속해서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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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맥베스 리뷰에서도 얘기했던 것처럼 여성은 남성의 부도덕적인 타락, 본능적 충돌의 장치가 되어왔다. 여성은 남성의 입장에서 통제할 수 없는 ‘본능’의 대상 이면서도 동시에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태주 역시 상현에게 이와 같은 장치로 사용된다. 당연하게도 태주는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교는 물론 거의 대부분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자주권을 잃고 도구화된 여성의 상징이 된다.
성경에서 여성(이브)은 남성(아담)의 몸 안에서 그리고 남성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다. 후에 가톨릭 내부의 해석으로 아담의 최초의 죄와 더불어 원죄론은 최초의 죄가 성적 관계를 통해 전달된다고 해석했다. 이를 통해 성은 더더욱 억압받는다. 성을 억압하는 분위기가 만연할수록 남성 중심의 세계에 여성성과 여성의 신체는 열등하고 경멸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성의 성적 해방은 여성 운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현대에서 -현상적으로- 벌어지는 몇몇 여성 운동은 이런 부분에 있어 이중적인 모습들이 있어 보인다. 성적 해방을 촉구하면서도 여성의 자기애에 의한 욕구(자기 과시)를 금기시한다. 이유는 기존 남성 중심 세계에서 여성이 고착화된 여성성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화 내에서도 태주는 뱀파이어로 새로 태어난 이후에 강력한 자기애를 기반으로 자신의 욕구(자기 과시)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반대에 부딪힌다. 일단은 남성에 의해 두 번째는 여성(라여사)에 의해이다.
원죄론은 많은 이들에게 성적 억압을 야기시켰다. 기독교 문화에서 성관계는 단순히 출산을 위한 행위여야 했기에 당연히 이단시되었고 순결이 요구되는 남성 사제에게 여성의 신체는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만져선 안 되는 것, 가까이 해선 안 되는 것 마치 역병에 걸리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는 셈이다. 이것은 '이브 바이러스'로 영화 내에서 표현된다. 성적 충동에 감염된 이후 성현은 자해를 한다. 이것은 마치 '할례'를 하는 것과 같다. 남성 중심의 세계는 남성에게 내재된 욕구를 여성에게 탓을 돌리고 여성의 문제로 치부하려 한다. '네가 옷을 그렇게 입어서야'라는 말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시되던 사회가 아니었던가? 왜 남성은 자신의 내재된 욕구가 외부의 충동질에 의해 그렇게 쉽게 밖으로 표출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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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여사의 모성은 강우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강우는 가부장 사회에서 모성으로 인해 거세된 남성의 상징이다. 그는 소년으로 살다가 소년으로 죽는다. 그의 성숙하지 못한 태도와 행동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기 것(태주)에 강한 애착과 관심은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그가 섹스에 관심이 없는 것도 역시 이런 맥락이다. 라여사 역시 남성 세계의 전형이 되어 버린 어머니상이다. 그녀는 태주를 강우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만들고 감시하고 감금한다. 태주의 삶을 피규어처럼 만들어버린 장본인이기도 하면서 태주를 보살핀 양가적인 인물이다. 그래서 동시에 태주의 마음도 양가적이다. 그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증오한다. 라여사가 신체적 기능을 잃은 이후엔 반대로 태주의 피규어가 된다. 박쥐에서 보살핌은 상대를 수동적 상태로 만드는 것 혹은 수동적 상태로 남아주길 바라는 것으로 비유된다. 여기서 보살핌은 지배 관계를 의미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남편과 부인의 관계(전통적인 기독교 보수 세계관에서), 사제와 신도의 관계, 봉사자와 환자의 관계, 강자와 약자의 관계.
영화에서 상현과 그를 따르는 신도들, 또 그가 피를 구하는 방식 등을 통해 잘 묘사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상현이 피를 빨거나 섭취하는 행위들은 유아적인 모습을 보여서 반대로 보살핌을 받고 있는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 또한 태주와 강우의 관계성을 잘 살펴보면 사실은 태주가 강우의 우위에 서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강우를 보살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라여사의 보살핌을 받기에 약자의 위치로 내려온다. 태주가 라여사를 죽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강함을 약자인 라여사에게 베풀 수 있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상현이 엠마뉴엘 연구소로 향하게 된 된 동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영화는 보살핌(모성)조차도 지배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추락이라는 이미지(결정적으로 태주가 다시 태어나는 장면) 역시 보살핌의 지배적 관계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는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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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라여사와 함께 끝을 향해 내달린다. 모든 걸 포기한 채 보닛 위에서 맞는 박쥐의 피날레는 황홀하고 아름다우면서 쓸쓸해 보인다. 상현이 초반부 임마누엘 연구소에서 외던 기도는 여기서 완성된다. 그의 기도는 잘 드는 기도가 분명 맞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태주는 내세(그리스도교 세계관)에 긍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른 세계관의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써 숭고한 죽음(극적인 순교)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 둘은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써 나란히 앉아 있다. 혼자 입장했던 상현은 태주와 함께 퇴장한다. 그리고 라여사는 관객이자 신(神)으로써 증인이 되어준다.
두 사람의 죽음이 쓸쓸한 것은 또 다른 저주인 인간성에 갇힌 우리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며 사랑하는 연인과의 두 손을 잡아보면서도 우리는 무너져가는 자기 세계에 무한한 애정과 슬픔을 느낀다.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관에서 죽음을 맞이하듯 사랑하면서도 진정으로 하나가 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광활하고 황량한 세계에 작은 신발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