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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Apr 18. 2023

음향과 분노

에세이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얼마 안 가 잊히고 마는 불행한 배우일 뿐.
그것은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와 같아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 의미도 없도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中


나는 스무 살이 되고 서비스직 관련 일들을 많이 했었다. 나열하자면 편의점, 감성주점, 평범한 호프집, 카페, 의류매장 등이 있겠다. 알바로도 많이 했고 직장으로 생각하고 다닌 곳도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진상 많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진상 관련 썰은 언제나 흥미롭고 웃기다. 아이스 브레이킹에도 적당해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하기에도 좋다. 나름 꽤 재미있는 썰들도 있고. 서비스직은 사람을 만나고 대하는 일이고 말 그대로 '서비스'를 하는 일이다 보니 고객을 섬겨야 하는 경우들이 많다. 아마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섬기다'라는 표현이 한국어로는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원치 않아도 위계가 생기고 위계가 생기면 원치 않아도 얼굴을 붉힐 일들이 많아진다. 그러다 보면 나의 마음이 지칠 때도 있다. 내가 심적으로 가장 지쳤던 곳은 마트에 입점한 의류매장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만약 당신이 요즘 흥밋거리나 구경거리가 없어서 심심하다면 주말 오후 혹은 평일 저녁 가장 붐비는 시간대에 마트 계산대나 고객서비스센터 가까이에 앉아 그곳을 한 번 구경해 보시라. 아마 당신은 곧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마트 계산대에서 일해보진 않았지만 매장 행사가 진행될 때면 계산대 근처에서 옷을 팔곤 했었는데 그곳은 혼돈의 카오스 그 자체라는 표현이 정말로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끊임없이 호객행위를 하는 호떡집 사장, 계산대 주변을 서성이며 제휴 카드를 추천하는 카드사 직원, 그리고 마트를 놀이터 마냥 뛰어다니는 아이들, 태어난 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아 유모차 안에서 울부짖는 아기, 술을 카트 한가득 담고 어디론가 놀러 가려고 들뜬 이십 대 초반의 학생들, 계산 와중에 지갑을 잃어버렸는지 당황해서 지갑을 찾으러 뛰쳐 가는 아줌마, 포인트 번호를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할아버지, 계산하는 와중에 불쑥 끼어들어서 이게 얼마냐고 묻는 할머니, 계산한 뒤 영수증을 한참을 들여다보며 나오지 않는 부부 등등... 그리고 오늘만 초특가 할인! 미아가 된 아이를 보호 중입니다. 땡땡땡 고객님을 찾습니다 등의 마트 자체 방송까지 더해지면 완성이다. 아마 MBTI 유형 EEEE인 외향인이라고 해도 마트 계산대에서 기 빨리는 건 순식간일 것이다. 나는 그 일을 하루 8시간 반복하는 마트 계산대 직원들을 보며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그들 중에는 일이 끝나면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휘말리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은 걱정도 했다. 내가 경험한 마트는 음향과 분노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왜 이렇게 인간들이 시끄러울까?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성이 나있을까? 하고 질문하게 됐다. 흔히들 밑바닥 인생이라고 표현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상적인 생각으로는 밑바닥 인생 같은 게 있다고 믿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경험이 그것을 반증한다. 누군가를 섬기는 일을 하다 보면 밑바닥 인생, 아니 바닥을 보이는 인성을 가진 사람들을 분명 만나게 된다. 그들의 삶은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자리가 없고 무엇이든 가지려 하지만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당신 역시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차게 된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이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간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친절함과 다정함으로 무장하고 매일 감사일기를 쓰고 명상을 해도 당신은 결국 소음과 분노에 휘말리고 말게 된다. 물론 와중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 영웅적인 사람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스스로를 잃고 만다.


그러다 보면 회의에 젖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당신은 어느 날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어디를 봐도 인간이 보이고 인간이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소음들이 모든 공간들을 채우고 거기엔 오로지 분노만이 남았구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정신병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맥베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 가장 매혹적인 이야기로 남은 것처럼 그런 세상 역시 한편으로는 매혹적이다. 그것 역시 이 세계의 일부라고 인정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조금 나아질지도 모른다.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그리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이 모든 건 아무 의미도 없는 백치가 떠드는 이야기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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