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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May 02. 2023

고쳐내는 삶

에세이

특별히 뭘 하지도 않았는데 어딘가 고장이 난 몸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게 언제부터 이랬나, 언제 생긴 고통인데 이제야 알아챘나 고민하다 고치기로 결심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픈 데가 많았다. 그래서 예민했다. 예민해서 아픈 데가 많은 걸까? 알아채길 잘 알아채서 그런 건지, 그냥 아파서 그런 건지. 아무튼 양측에 잘못이 있다고 하자. 말하자면 나는 하자가 있는 몸이다. 중학생 때 데면데면한 친구가 장난으로 의자를 밀어서 오른쪽 무릎을 찍혔다. 그래서 오른쪽 무릎뼈가 이상하게 튀어나와 있다. 기타를 친다고 다리를 꼬고 앉는 습관이 생겨서 고관절은 한쪽이 뒤틀렸다. 덕분에 턱도 고장 났고 승모근도 짝짝이다.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이 만사 오케이가 아니라는 걸 안 건 거의 2년 만이었다. 그렇게 열심히나 했는데 허리랑 고관절은 통나무 마냥 뻣뻣하고 아팠다. 그제야 눈치를 챘다. 그냥 무턱대고 운동하면 관성적으로 사용하던 근육만 사용하는 걸. 배우기 시작했다. 때마침 세상 모든 지식이 유튜브에 있었고 때마침 헬스 열풍이 불어서 모든 유튜버들이 운동 얘기만 했으므로 모든 게 공짜였다. 감사했다. 그렇게 배워가면서 운동을 한 지 2년이 지났다. 이전과 똑같이 아프지만 유연해지고 힘이 세졌다. 여전히 아픈 몸을 쓰지만 유연하게 쓸 줄 알게 됐다.


나는 마음을 고치는 데도 오랜 시간을 공들였다. 마음도 역시 고장 난 줄 모르다가 알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마음은 더 그렇다. 마음의 관성은 중력보다 강하다. 그래서 육체를 짓누르는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고통스럽다. 고통이 크다고 알아채기가 쉬운 건 아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만큼 고통은 잊히기 쉽다. 방어기제에 의해 마음은 더욱 쉽게 외면받는다. 고통에 직면하기 시작한 건 스물여섯 살 때부터였다.


명상센터에 나가서 명상을 하고 고통을 공유했다. 아픈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았고 그들의 고통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이어서 놀랐다. 나의 고통은 추상적이고 정립되지 않아서 아픔을 선생님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론 선생님 앞에서 눈물도 흘렸다. 선생님은 항상 내게 따스함만 건네줬다. 고쳐내는 줄 알았다. 그 후로 약 4년의 시간이 지나 나는 마침내 정신건강의학과에 방문했다.


방문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곳의 첫인상은 명상센터만큼이나 좋았다. 그리고 진작에 왜 이곳에 와서 고치지 않았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약이 생각보다 잘 들었고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명상이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알약이 조금 지나치게 효과가 좋았을 뿐.


여전히, 아직도 살아가면서 고쳐나가야 할 것들 투성이다. 요즘같이 세련된 인간을 요구하는 세상에 상처투성이 인간은 불행하게도 설 자리를 잃어간다. 나만해도 그렇다. 어디서든지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유발하는 인간은 곧장 피한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 투성이인 세계에 낙하하는 인간은 제 자리를 찾아갈 자격을 잃는다. 인간실격이다. '고쳐도 고쳐도 고칠 것이 투성이인 격 떨어지는 인간이라 죄송합니다' 말이 절로 나오는 세상이다. 슬픈 일인가? 한편으론. 또 한편으론 기쁜 일이다. 세상에 격 떨어지는 인간이 사실 한 둘이 아니므로.


한때 이런 삶이 지겨웠다. 그렇지만 글쓰기와 사랑이 나를 구원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차가운 강물에 낙하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나 다름없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낙하의 아름다움을 이해했다. 혹자는 그의 글이 기분 나쁘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십분, 아니 일분 이해할 수 있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자의 마음도 나와 다르지 않았음을 이해하고 나는 살아가기로 했다. 한 발을 끌며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고 걸어도 나는 살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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