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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Nov 14. 2022

사회적 질량

에세이

‘살아있음을 증명하시오.’ 생의 가장 강렬한 명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나는 긍정적인 것들과 결별했다. 평범하고 비슷한 삶들을 나는 생존을 위한 치졸한 태도로 치환하여 생각했고 세계에 대한 고독한 투쟁과 몸부림만이 예술적 삶의 태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부도덕하고 부족한 나의 성품에서 우러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 부정의 화신이라 불릴만한 덕스럽지 못한 태도는 당연히 사회 부적응자가 되기 충분하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천재들의 말을 이해하기에 내 언어와 경험은 너무나 좁지만 십자 낱말풀이처럼 결국 답을 채우는 건 나의 언어들이니 나는 어설픈 단초들을 더듬으며 답을 적어봤다. 나는 목적과 수단이 아니다. 우연한 경우에 우연한 결과를 따라 현재의 시간에 나타난 존재자다. 존재자에겐 어떠한 기능적 본질이 없으므로 그에게서 우린 어떠한 성능 결과표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정말로 그러한가? 성능 결과표 없는 인간에게, 효용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사회는 정말로 냉담하다. 인간은 사회적인 기능을 해낼 때 정신적 불안과 결별하고 행복을 되찾는다.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를 타자와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실존하는 상태는 사실 세계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심의를 받아야만 나타낼 수 있다. 타자와 세계의 부재라는 개념 속에서 실존은 역시 부재하게 되며 무의미 해진다. 실존에 앞서서 사회와 타자가 이미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결국 타자와 세계에 속한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그게 무엇이든 간에) 그 안에서 자신의 기능을 증명해야만 한다. 이 일은 결국 한 인간의 사회적 질량을 결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고 가치인 노동력(이와 치환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화폐로 교환하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기대하게 되는 모든 곳 다시 말하자면 기초적 수단이자 모든 사회 속에서 소통의 분자 단위가 되는 '언어'가 발현되는 모든 곳에서 사회적 기능은 해당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다. 단순한 놀이에서 복잡한 게임은 물론이고 매분 매 초마다 이뤄지는 동료 평가와 연애 상대를 찾는 틴더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기능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기능이 마비되거나 미숙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며 선천적인 제약을 가진 인간의 경우 사회적 기능의 숙달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요하게 되거나 어쩌면 평생 그 문턱을 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은 내가 감히 평가하거나 단정 지을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 귀천의 문제를 떠나 한 존재자는 평생 스스로의 감각정보만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 있기에 다른 존재자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어렴풋 형체만 만져질 뿐 그 이상으로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신의 영역이고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사랑이 불가해하며 위대하다고 깨닫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비교적(비교가 정말로 중요하다.) 낮은 사회적 기능에 의해 고통스러워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물론 만난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정말로 비범하다. 소위 말해 그들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영웅적 서사와 어울리는 인간상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범인들은 자신의 부족하거나 형편없는 사회적 기능을 어느 순간 맞닥뜨릴 때 '마비'되어 버린다. 그리곤 곧 목줄이 기둥에 묶인 마당개처럼 자신의 구역을 평생 뱅뱅 돌게 된다. 나 역시 이 삶을 견고히 살아오고 있으며 앞으로 어쩌면 영원히 지속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을 넘어서는 일이야 말로 생애 최대의 목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편으론 이것을 정말 공포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계 1, 2차 대전 그 이전 그 이후에도 인류사의 대재앙과 같은 시기는 많았지만 나는 지금처럼 각 개인을 위태롭게 만드는 시기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어느 때보다 타자와 세계와 관계 맺기에 좋은 세상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개인에게 많은 사회적인 기능을 필요로 하는 시대에 태어난 인간들은 자신의 사회적 질량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이제 더 이상 세계는 당신의 부덕을 인정하지 않는다. 수 천, 수 만 개의 인간이 당신이 보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한치의 모자람도 용서치 않으며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한다. 사회적 기능의 부족함을 관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근대에는 권력이 나서서 정신질환자, 부랑자, 거지들을 시설에 완벽히 격리했다면 현대는 시민들 스스로 사회적 기능이 마비된 이들을 집단적으로 따돌리며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막아서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듣고 싶어 하는 시민사회에서 노인과 어린아이는 점차 격리된다. 사회적 기능이 온전히 작동하는 인간들만이 온전히 제도권 내에 안착하여 자신의 유전과 사교성을 대물림한다.


 나의 사회적 질량은 얼마나 될까? 나의 불온하고 불완전한 성품이 지금의 나의 사회적 기능과 질량을 만들었다. 가끔 나는 나의 부모에 비해 그나마 나은 편이다라고 위안을 삼지만 내가 관계를 맺는 세계에서 나는 한 없이 적은 질량으로 살아가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전처럼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듯하다. 거대한 행성과 같은 이 도심 속에서 나와 같이 적은 질량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공기 중으로 조용히 사라질까 괜스레 걱정이 앞선다. 자꾸만 시장 좌판에 앉아 멍하니 따슨 불만 쬐던 노인들이 생각난다. 자기 삶을 꾸려나가려 노력하던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생각난다. 불온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오만스러운 걱정이 괜히 한 밤의 찬 공기와 함께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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