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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훈 Mar 08. 2023

불안장애 투병 중에 쓰는 소회

투병일기

전염병이 세상을 뒤덮은 지도 한참이다. 그동안 나는 코로나에 두 번이나 걸렸던 것 같고 (한 번은 정확하지만 한 번은 사실 잘 모르겠다) 아직 멀쩡히 살아있다. 근데 코로나보다 내 존재를 위협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정신장애는 이렇다니까? 외부로부터의 바이러스 침투가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논리적 회로가 우리 이성에 코딩되어 있다. 한국인이라 그런 걸까? 정신장애를 개인의 일탈, 개인 내면의 문제로 치부했던 나의 과거를 반성하게 된다. 자신을 진지한 투사 혹은 독립적 존재로 인식을 하는 인간에게 정신장애는 자기 파괴의 결과쯤으로 인식된다. 나는 내 불안장애를 이겨내기 위해 이 문장부터 부술 필요가 있었다. 망치 가져와!


불안장애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겉으로 보기에 굉장히 멀쩡했다. (모르는 타인이 보기에) 공황장애와 같은 증상은 없었다. 나는 주 5일 운동을 했고 명상도 했으며 책도 읽었다. 그렇지만 눈에 띄게 몸무게가 줄었고 (약 10kg) 기존에 있던 섭식장애(위장장애)가 심해졌다. 특히 낯선 자리에서의 식사는 거의 불가해서 집이 아니면 밥을 먹는 걸 꺼렸다. 연인관계도 순탄했고 대인관계 (가벼운 대화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를 겪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온몸을 엄습하는 일어나지 않을 걱정에 대한 불안에 불면증이 생겼고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누군가 나를 위협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고 작은 소음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멀쩡해 보이는 와중에 일상에서의 균열은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특히 불면과 섭식장애는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쌓인 관성에 의해 대인관계 소통능력을 기계적으로 자동화시켜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불안장애가 심하단 말에 주변인들 정말 가까운 내 연인을 제외하면 대부분 의심의 눈초리로 봤다. 사실일까? 나 역시 의심했다. 내가 만약 불안장애가 아니라면 어떡하지? 그런데 증상이 나를 설명해 준다. 섭식장애, 불면, 밤마다 엄습하는 두려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나의 루틴과 삶의 패턴대로라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아야 했다. 나는 나 스스로를 정말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증상들은 나를 내면으로부터 무너지게 만들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다. 손과 다리에 집게를 꽂고 신호를 해석하는 기계를 15분쯤 바라보고 30분가량 질문지에 답변을 하고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아, 의사는 굉장히 과학적인 추론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인상이 좋고 약간의 담배냄새가 났다. 마치 의자와 평생을 함께 하시기라도 한 듯 그 의자에 딱 맞아 보였다. 아까 적었던 질문지에 해석을 해주신다. 내재적 공격성향, 높은 불안도, 우울감이 있다고 했다. 나는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마스크 사이로 웃음이 날까 봐 숨기려고 애썼다. 마스크가 없었다면 선생님은 내 표정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속으로 나는 '그래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선생님의 진단을 듣는 내내 나는 행복했다. 웃기지? 행복하다니. 코로나에 걸리기 직전에 나도 그랬다. 심각한 감기 기운을 달고 다녔지만 자가키트에서는 계속 음성 판정이 났었다. 그리고 결국 7개쯤 시도했을 때 양성이 나왔고 나는 그때 웃음이 낫다. 아! 드디어! 같은 기분이었다. 아! 드디어! 나는 불안장애를 얻었다. 억지로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내고자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무덤덤해졌다. 정신건강의학과는 처방전을 내주지 않고 조제실이 병원 안에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내가 병원을 나서고 난 다음이었다. 약을 한 봉투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제 괜찮아지겠지?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벌써 6개월이 지났다. 6개월 동안 약을 꾸준히 복용했다. 삶이 나아졌냐고? 증세가 나아졌다. 불면이 사라졌고 섭식장애가 나아졌다. 밤마다 나를 엄습하던 두려움도 거의 사라졌다. 다시 10kg의 체중이 돌아왔다. 물론 그간 약물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다. 원래 루틴처럼 운동을 했고 명상을 했고 추가로 감사일기를 쓰고 마사지를 하고 새로운 운동인 복싱을 배웠다. 그런데 사실 근본적인 불안의 원인인 삶의 문제들이 개선된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 약 좀 먹었다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잖아. 삶은 너무나 복잡하고 많은 것들이 엉켜 있어서 단 번에 독화살을 빼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 (병원에 가고, 운동을 하고 명상을 하고, 감사일기를 쓰는 것 등)이 몸이 마비되는 것을 막아준다. 일상생활을 하게 만들어주고 잠을 자게 만들어주고 취미생활을 하게 만들어주고 다음을 준비하게 만들어준다. 그래도 일상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불안이 있다. 어쩌면 평생을 투병해야 할지 모른다. 그게 뭐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 비염이나 알레르기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비염이나 알레르기를 없앤다고 삶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조금 더 쾌적해질 뿐. 그러니까 반대로 생각하면 불안장애나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큰일이 난 건 아니다. 그냥 조금 불쾌할 뿐. 


삶 속에 불쾌한 것들을 소거하고 살아가겠다는 건 무균실에서 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린 싯다르타는 아버지에 의해 성벽에 갇혀 유쾌한 것들만 보고 살아갔다. 화려하고 젊고 아름다운 것들만 즐비한 성 안에서 그는 나머지 세상의 반쪽을 갈구했다. 불안장애와 같은 정신장애가 꼭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불쾌한 것들과 투쟁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니다. 투쟁? 그냥 불쾌한 것들과 공존하며 살아야 한다. 아니?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을 나누는 것부터 철회해야 할 일이다. 일단 나부터 그리 생각하기로 했다. 이 세상은 흠 없는 것들을 찾는다. 마치 새 제품을 언박싱이라도 하듯 등장하는 인간마다 '흠' 없기를 바란다. 새 아이폰처럼 모든 세팅이 완료된 인간이길 바란다. 우리는 공장 초기화 같은 건 안되니까. 단순한 코딩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은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아플 땐 아플 수 있는 것이다. 그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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