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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Apr 07. 2017

종이로 만든 철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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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에 대비해서 군장도 싸고 이것저것 챙기느라 우리 내무반은 굉장히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육박칠일 동안 왕복 백오십 킬로를 행군해야 하는 힘든 훈련이라서 소대원들 기분도 어두웠습니다. 이월에 뛸 훈련이 비상 때문에 연기되었다가 훈련을 불과 이틀 남겨놓고 알려주는 바람에 미리 충분한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점호를 이십 분 정도 남놓고 배일병님을 도와서 군장을 챙기며 바쁘게 준비를 하던 중에, 배일병님이 저한테 이 노트를 전해주며 미선씨께 전달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노트인지도 몰랐고 굳이 나한테 왜 지금 이 노트를 부탁하는지 궁금했지만 훈련 준비에 정신이 없어서 그냥 알았다고 대답한 후 제 백에 넣어두었습니다.

훈련 첫날 오후 세 시에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숙영지까지 삼십 킬로를 행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여섯 시가 조금 지나서 어둑해질 무렵에 또 행군이 시작되었는데, 숙영지에는 다음날 새벽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배일병님이 물에 뛰어든 건 밤 열한 시쯤이었습니다. 무월광이고 지쳐 있어서 앞사람의 등밖에는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십 분간 휴식을 취하고서 약 십 분쯤 걸었을 때 제 바로 앞에서 걷던 배일병님이 갑자기 군장과 총을 내려놓더니 철모와 탄띠를 벗고서 오른쪽 벼랑 밑으로 바쁘게 뛰어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차가운 강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손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행군을 멈추고 모든 중대 병력이 강가로 내려갔습니다. 중대원 중 수영에 자신 있다는 사람 세 명이 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본대에 연락해서 대대장 짚차가 도착한 후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두 시간 동안 수색을 했지만 배일병님은 끝내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라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살했다고 해서 훈련을 취소할 수는 없기에 우리 대대는 계속 행군을 했고, 우리 중대만 그 자리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수색조를 편성해서 이틀 동안 수색을 했습니다.”


종식 선배는, 여자라고 나약한 사고방식을 갖고 생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었다. 봉사활동 하러 갔을 때 종식 선배는 자주 맨발로 생활다. 곰발처럼 발이 튼튼해야 살림도 잘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농담까지 섞으면서.

종식 선배의 자살 소식을 들은 우리 후배들은 정신적인 지주를 잃은 충격에 며칠 동안 심한 몸살을 앓았다. 종식 선배를 잘 알지도 못하는 신입생들까지도.           


라디오를 켰다. 우리 편집실에서 편집한 프로그램들으며 커피를 타서 책상에 앉았다. 노트를 대충 끝까지 한 장씩 넘겨보았다. 얼추 한 시간 정도는 읽어야 할 분량이었다. 맨 앞 페이지의 텅 빈 공간에 큰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나는 내일 네 곁으로 간다.’

열댓 번을 겹쳐서 쓴 것 같았다. 진한 볼펜 자국이 노트의 뒷면에까지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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