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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Apr 09. 2017

종이로 만든 철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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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일

자대에 배치 받은 지 두 달이 지났다. 아직까지도 두렵다.     

8월 25일

미선이 준 이 노트에 틈나는 대로 일기를 쓰겠다. 글씨를 써내려가는 내 손등이 몰라보게 거칠어졌다. 아니, 험악해졌다. 손가락 마디마다 검은 때와 피딱지가 뭉쳐 있다. 손톱 밑에는 묵은 때가 아예 둥지를 틀었다. 처음에는 남자로서의 고생이려니 생각하려 했지만 날이 갈수록 나의 걸어가는 굴 속은 더 깊고 어두워지기만 한다.     

8월 29일

오늘 신병이 들어왔다. 내 밑으로 벌써 네 명이다.     

9월 5일

매일 일기를 쓴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 취침 등만 켜놓은 내무반은 너무 어둡고, 고참의 눈치까지 봐야 하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켜야만 할 지경이다.      

9월 8일

이곳 생활은 너무 삭막하다. 소대원 삼십여 명이 생활하는 막사는 6.25 전쟁 영화에나 나올 법한 구식 건물이다. 남방 한계선이 우리 막사의 담장이다. 그 무시무시한 철책이. 부식과 보급품은 필요한 것보다 충분하지 않게 일주일에 한 번씩 보급된다. 고춧가루가 모자라기 때문에 국은 항상 싱겁고 매일 먹는 김치는 빨간 색이 아니라 푸른 색이다. 9월인데도 밤에는 제법 춥다. 우리는 주로 밤에 경계근무를 서는데 9월이라는 계절이 무색할 정도로 춥다. 한 번 근무에 투입되면 4시간 동안은 막사로 돌아오지 못한다. 4개의 초소를 모두 한 번씩 거쳐야 막사로 돌아올 수 있지만 돌아와서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고참들 눈치를 보느라.      

9월 9일

6월 말에 이곳에 들어온, 나보다 2주 후임 차성수라는 녀석이 있다. 꽤 좋은 대학에 다니던 녀석이다. 3학년까지 수료하고 군에 들어왔다는데 도무지 똑똑해 보이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 아직은 적응을 못해서 그런 것 같다. 삭막한 산적 소굴에 식용으로 잡혀온 토끼처럼 무척 겁에 질려 있다. 내 바로 옆 자리에서 나와 함께 자는데 전입 온 지 두 달이 훨씬 지났는데도 이렇다 할 만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고 서로 상대방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다.     

9월 13일

10말까지 G.O.P.에 우리 중대가 주둔한다고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꼭 내가, 그리고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꼭 해야 할 일인지 궁금하다. G.O.P.에 들어온 지 3개월째다.     

9월 15일

군복을 입은 지 5개월이 되어간다. 집에 가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이 거친 철책선만 벗어나더라도 좋겠다. 밤이나 낮이나 소대장을 비롯한 삼십 명의 똑같은 표정만 보고 산다. 이들의 표정은 항상 똑같다. 이들에게는 특별히 기쁜 일도, 특별히 슬픈 일도 없다. 인간 조각품 같다. 이 사람들은 모두 제대할 날만 기다릴 뿐, 조국의 통일을 위해 최전방에서 근무한다는 자부심도 긍지도 없다. 군에 오기 전에는 민주주의니 사회주의니 운운하기도 했을 텐데 이곳에서는 아무도 그런 단어를 들먹이지도 않는다. 경계근무를 위한 기계라고밖에. 철책선의 셰퍼드라고밖에. 철책 너머만 예리하게 쳐다볼 뿐, 다른 모든 것에 눈 먼 장님이라고밖에.     

9월 19일

똥밭(우리는 비무장지대를 똥밭이라고 부른다)에 1박2일 동안 들어갔다 왔다. 북한 병사들을 보았다. 우리는 그들을 발견했고 그들은 우리를 보지 못했다. 우리가 매복해 있던 능선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열일곱 명의 북한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걷는 것이 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꼈다. 나 자신에게서 느꼈어야 할. 그들도 나처럼 똑같은 사람이고 나와 같은 세대의 젊은이일 텐데 사상의 분단 때문에 서로 숨죽인 채 이 곳 접경지대에서 만나다니. 나는 단숨에 뛰어 내려가 그들을 부르고 손에 들린 소총을 내려놓고 악수를 나눌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9월 29일

남녘 땅 동포 여러분, 북으로 오십시오. 따뜻한 동포애가 남녘의 전사들을 반길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 소풍을 와서 이런 식으로 시작되는 대남방송을 듣는다면 콧방귀를 뀔 것이다. 하지만 G.O.P.의 어두운 적막 속에서 수개월 동안 살다보면 대남방송이 낭만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10월 1일

‘대통령각하 하사품’이라고 쓰인 위문품을 맛있게, 정말 맛있게 먹었다. 민간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자유, 통일, 민주주의는 그 뒤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10월 4일

차성수와 근무를 서게 되었다. 처음 있는 일이다. 계급 차이가 없는 데다 같은 달 군번이기 때문에 같은 조로 근무를 서지 않도록 되어 있는데 유상병이 감기 몸살에 걸려 근무조가 변경되었다. 초소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10월 5일

그렇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살아남아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니었다. 내 26년의 삶은 그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연탄불 지핀 온돌에서 발 따스하게 자보는 게 소원이라던 학교 앞 구두닦이 할아버지에게 따끈한 만두도 사주곤 하며, 아픔 속에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는데. 그런데 지금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쉽게 주저앉고 마는 것인가. 나의 조국은, 나의 이웃은 내가 이곳을 벗어나는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군인이 되면 나의 애국심과 동포애는 더욱 뜨겁게 타오를 줄 알았는데. 도대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 수만 무르자고 졸라대는 이 치사한 행태는 지난 날의 몸부림이 모두 위선이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10월 12일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며칠째 별이 보이지 않는다.      

10월 14일

무언가 일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했었는데. 차성수가 야간 근무에서 졸다가 소대장에게 발각되었다. 소대장은 가벼운 주의를 주고 그냥 넘어갔는데 이종호 상병이 막사 뒤로 데려가 몇 번 걷어찼다고 한다. 이종호 상병은 평소에도 차성수를 집요하게 건드렸었다. 차성수는 실탄 두 발을 숨겼다. 탄창 반납 시에도 발각되지 않았는데 오늘 저녁 근무 투입 후에 실탄이 없어진 것을 알고 관물대를 뒤져서 찾아내었다. 차성수는 모든 것을 각오한 듯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종호 상병과 자신의 몫으로 훔친 것이라고. 아무도 차성수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차성수는 소대장실에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나왔는데, 이종호 상병마저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10월 16일

소대장님은 차성수에게 세 끼 금식의 징계를 내리고 일을 끝냈다. 오히려 탄창 반납 때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김병장을 비롯한 병장급들만 한 시간 동안 얼차려를 받았다.           

10월 21일

차성수는 내게 말했다. 우리의 나약한 젊음을 처형하려 한 것이었다고.

그가 위선자인가, 내가 위선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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