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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Apr 16. 2017

종이로 만든 철새

5

“실장님, 조금 아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오늘도 농성을 계하는 것 같습니다.”

“공정한 방송 문화를 위한 몸부림이라는데.”

“미선씨는 머리에 물 묻으면 곤란하니까 편집실이나 지키지 그래?”

“야, 박대리, 넌 그 쓸데없는 농담 좀 작작 할 수 없냐? 미선씨, 노조 측에서 부탁한 3차 성명서 초안 읽어봤어?”

“예, 두어 군데 맞춤법 틀린 건 고쳤고 문맥이 어색한 데는 대안 첨부했으니까 실장님이 직접 읽어보시면 됩니다.”

“오늘이 벌써 몇 일째야, 지겹군.”

“실장님, 어차피 3차 협상을 하려면 삼, 사 일은 더 있어야 할 텐데 지난 번 신청한 휴가는 그대로 진행해도 되죠?”

“그래. 갔다 와. 언제는 뭐 잔잔한 날이 있었냐?”

“집이 전라도라 좀 시일이 걸릴 것 같아서요 ….”

“전라도 어딘데?”

“어, 영광이에요 ….”

영광이라고 얼버무렸다. 종식 선배가 영광에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가 사랑하려 했던 미선에게.

어제는 위선자였고 오늘은 염세주의자인, 그리고 내일은 허무주의자가 될지도 모르는 나에게 봄이 찾아왔다. 나는 결국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내 이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음을 알아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성공적으로 뛰어내리는 기록을 세우기 위해 수년 동안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낙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세를 사는 젊은이는 벌써 상당수가 자신들의 가치를 상실해버렸다.

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려 애쓰는 이도 있다. 나는 이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 한다. 쓰러져가는, 일어서려는 피압박자를 위하여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드린다.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이곳 사람들은 단지 아침에 이불을 들추었을 때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에만 만족하고 살아간다. 나의 위선은 이곳에서 속죄 받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려 했던 미선아, 널 다시 만나서는 안되겠지만 얼굴만이라도 한 번 보고 싶다. 목련 같은 너의 얼굴만.


종식 선배가 내게 보내준 짤막한 편지에 붙어 있던 우표의 소인으로 미루어 종식 선배의 은거지가 영광일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종식 선배는 자신이 절에 있음을 알려왔을 뿐이다. 나를 미로 속에 끌어넣은 채 자신을 구하러 와주기만 기다리는 것은 혹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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