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나에 대한 무지

by 문기사

엄마는 너무 여유가 없다.

오늘 수업시간에 들은 말 중 엄마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 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채플린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라는데, 정말 엄마는 찰리채플린을 좀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월요일부터 5일 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학원에서도 졸지 않고, 선생님한테 칭찬까지 받았다.

난 나에게 오늘 밤 상으로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금이니까.


오늘 수유역 던킨도너츠에서 엄마와 마주쳤다. 헐~

구들이랑 던킨도너츠 앞 차 막는 바리게이트 같은 거에 걸터앉아 다리를 떨고 있던 순간이었다.

약간 섹시하게 보이려고 치마를 아주 살짝 올리고 있었다. 내 각선미가 쫌!

이 정도는 우리 나이 아이들은 모두들 하는 순진한 행동이다.


그 길을 지나던 엄마와 내가 0.5초 정도 눈이 마주쳤다.

엄마와 나는 금방 서로 피했고, 엄마는 일단 집으로 갔다.


엄마는 내가 밤만 되면 학원도 잘 안가고 수유역 던킨도너츠 앞에서 애들이랑 노는 줄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정말 솔직하게 말하는데 난 이번 주에 수유역에 나온 게 오늘이 처음이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신발도 안 벗었는데 엄마가 소파에 있던 쿠션을 집어던지는 바람에 내 헤어스타일과 눈썹과 화장이 완전 엉망이 되었다.

아무리 엄마지만 폭력은 폭력이다.


난 그래서 엄마가 너무 여유가 없다는 거다.

톡에서 엄마에 대해 투표했는데, 엄마의 행동이 옳다고 한 애는 딱 1명이고 8명은 엄마가 너무 심한 거라고 난리가 났다.

그 1명은 수영인데, 엄마가 던킨도너츠 앞에서 곧바로 뭘 집어던지지 않을 정도로 여유 있게 행동하신 게 잘하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엄마가 던킨도너츠 앞에서 곧바로 뭘 집어던졌다면 그건 모녀지간이 끝장나는 대형사건이었겠지.

그건 여유 없음의 백퍼 최상급이다.


난 엄마를 사랑한다.

그래서 엄마가 더 여유 있게 행동하셨으면 좋겠다.



내 딸의 일기장 내용이다.

일기장을 봐서 정말 미안하지만, 진짜 여유가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딸아이다.

중3이라고 유세를 하며, 고등학교 입시가 다가오니까 요즘 너무 초조해 하고 불안해 한다.

잠을 못자고 뒤척이다가 형광등과 라디오 다 켜놓고 잠이 든다.

낮에는 졸려서 학교에서 계속 졸고 있다고 한다.


던킨도너츠에 갔으면 차라리 안에 들어가서 도너츠라도 먹으면서 친구들끼리 수다 떨며 스트레스 풀고 오면 될 일인데, 용돈은 다 어디다 쓰는지, 왜 밤 늦게까지 중3 여자아이가 술집도 많은 거기서 짧은 치마 입고 다리도 모으지 않고 앉아서 다리를 덜덜덜 떨고 있는지 ….

그게 다 여유 없을 때 나타나는 강박증세가 아니고 뭐임?

정말이지, 딸아이가 더 여유가 없는 게 맞다.


나도 다른 엄마들 불러다가 톡에서 투표라도 해보고 싶어진다.

난, 정말 100명 투표에 100명 다 내 편 만들 수 있다.

아니, 민경이 엄마는 좀 자신이 없다. 그 여자는 인생이 너무 여유가 없어서 기권표를 던질 거 같다.

어쨌든 중요한 건 여유다.

딸아이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살면 좋겠다.



이상은 우리 병원에 들른 환자와의 상담 내용이다.

난 이 환자에게 어떤 치료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의사로서의 내 경험과 의학적 이론으로는 어떤 처치를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관계만 모녀지간이지, 실제로는 도로에서 자기가 잘났다고 서로 보복운전하는 것과 너무나 똑같지 않은가.


일단 오늘은 진정제 좀 처방하고 몇 가지 조언을 해줬다.

어떻게 인생의 여유를 알게 해줘야 할지 고민이다.

나도 진료, 상담, 기고, 강의, 방송출연 등의 일정으로 일요일도 못 쉬고 일하는데 무슨 여유가 있겠나.

여유, 이건 나도 아직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 하는 보석 같은 건 ….


엄마가 의사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나에게 그대로 전해준 것이다.

사실 그 의사 선생님은 엄마의 이모부라는데 그분도 여유 없기는 역대급이라고 한다.

의사 선생님이 솔직하게 본인의 어렸을 때 얘기와 현재의 생활 얘기도 해줘서 많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사는 방법 10가지'라는 인쇄물도 주셨고, 그밖에도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줬다고 한다.

결론은, 엄마가 여유가 없다는 거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아주 조금 여유가 없는 편이긴 하다.

다른 아이들이, 내가 다리 떠는 속도가 자기들보다배 이상 빠르다고 하는 걸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오늘은 좀 여유 있게 푹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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