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나에 대한 오기

by 문기사

나 : 남편이라는 사람이 돈을 안 가져오면서 무슨 으로 집엔 들어오니?

남편 : 너, 너무 심하게 간다. 트럭으로 장사하자고 한 게 누군데?

나 : 그럼 트럭이라도 팔아와야 먹고 살 거 아냐?

남편 : 그 똥차를 누가 사? 폐차장 가야 돼.

나 : 그럼 빨리 폐차를 하든가.

남편 : 기다려봐. 생각이 있으니까.

나 : 도대체 뭘 생각해? 당장 민서 수학여행비 내야 한다고 몇 번을 말해?

남편 : 근데 6학년이 무슨 수학여행을 간다고 그래?

나 : 요즘엔 다 가. 타지도 않는 자전거라도 팔아야겠어. 잠가놓은 거 비밀번호 알려줘.

남편 : 웃기는 소리 하네. 그게 얼마짜린데 팔아? 너 그거 건드리면 죽는다.

나 : 어차피 타지도 않고 벌써 1년째 묶어만 놓은 거잖아.

남편 : 왜, 집에 있는 거 다 갖다 팔지 그래? 자전거 건드리면 진짜 죽는 거야. 알았어?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남편의 뒤통수에다 소리친다.

나 : 자전거가 죽든 내가 죽든 오늘 누군가 죽는 거야. 두고 봐.


어쩔 수 없다. 민서 수학여행비와 용돈, 옷도 사주어야 한다.

남편이 일 안 한지도 한 달이 되어가니 집에 쌀도 돈도 다 떨어져간다.

내가 나서야 한다.


보일러실에 묶어놓은 자전거를 꺼내기 위해 잠금줄을 풀기 시작한다.

비밀번호가 네 자리 숫자니까 길어봐야 9,999번만 하면 된다.

남편은 단순한 성격이니까 일부러 복잡하게 해놨테니 난 거꾸로 한다.

9999부터 숫자를 낮춰가며 맞춘다.

번호 맞추고 툭 잡아 당기고, 또 맞추고 또 당기고. 맞추고 당기고.


박스 하나를 펴서 깔고 앉는다.

9000. 벌써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아프다.


8200. 목 뒤로 땀이 흐른다. 보일러실 문을 벽돌로 괴어 열어놓는다.


7300. 냉장고에 있는 찬 물을 마시려고 일어난다. 발이 저려서 한참을 서 있는다.

벌컥벌컥 마신다. 두 컵이나.


6600.

'타지도 않을 자전거를 100만원씩이나 주고 사? 정신이 나간 거지.'


5153, 5152, 5151, 5150, 5149.

이럴 줄 알았으면 0001부터 시작할걸.

10분 정도 지 같아 시계를 보니 벌써 20분째다.


수학여행이니 쌀이니 하는 건 생각이 안 난다. 오기로 버틴다. 아니, 한 가정을 살려보려는 거룩한 집념이다.


4300. 보일러실이 어두워진다.

현관 등을 켜고 그 불빛을 빌려쓴다. 퀘퀘한 냄새가 이제서야 느껴진다.


3700. 정말 후회하고 있다. 0001번부터 했으면 벌써 풀었을 텐데.

중간에 제대로 안 당기고 그냥 지나친 건 아닐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끝까지 간다.

남동생이 인터넷 중고 사이트에 팔면 30만원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했으니 멈출 수가 없다.


2400. 거의 다 왔다.

다리에 피가 안 통하는 거 같다.

허리도 아프고 목도 뻐근하고 눈도 침침하고, 손가락 마디에 불치병이 생길 거 같다.


1100.

정말 얼마 안 남았다. 0001로 해놓지는 않았을테니 길어봐야 3분 안에 끝이 날 거다.

0600, 0599, 0598, 0597, 0596.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우리 3남매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1시간도 안 됐는데 이렇게 죽을 거 같은데 아버지는 평생을 고생만 하시고.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방으로 뛰어 들어가 화장지를 뽑아 눈물, 콧물, 땀을 닦는다.


0224, 0223, 0222, 0221.

순간 놀라서 벽에 뒤통수를 찧고 만다.

풀었다.

잠금줄을 높이 쳐들고 환호성을 지르며 보일러실 밖으로 뛰쳐나온다.

누가 보면 유관순 열사인 줄 알았을 것이다.


대문 안으로 남편이 들어온다.

헉!


남편 : 너 뭐 하냐? 그건 뭐야? 풀었어? 내가 건드리지 말랬지.

나 : 그게 ….

남편 : 어떻게 풀었어?

나 : 그니까, 0221 …!, 내 생일이잖아. 2월 21일.

남편 : … 자전거 팔려구?

나 : 아니 …, 요즘 내가 하도 살이 쪄서 자전거로 운동 좀 할려구.

남편 : 너 자전거 탈 줄 모르잖아.

나 : 그니까 당신이 가르쳐줘야지. 비밀번호도 안 가르쳐주고 ….

남편 : 내 비밀번호는 항상 너잖아. 목은 좁아서 안 되고 학교 운동장 가서 하자.

나 : 저녁 먹어야지.

남편 : 30분만 타고 오면 되지. 금방 배워.


자전거를 사이에 두고 남편은 왼쪽, 난 오른쪽에 서서 걷는다.

저녁 노을이 아랫동네의 아파트 위로 서서히 물들어간다.

안장을 잡은 남편의 손등에 슬며시 내 손을 포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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