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신중함
오후 3시 10분.
서초소방서 앞을 지나는데 여자 손님이 손을 든다.
단정하다.
머리는 찰랑찰랑 흔들리지만 흐트러지지 않고, 옷은 타이트하지도 풍성하지도 않은데 핏이 우아해보인다.
힐은 적당히 높아서 짧지 않은 치마를 입었는데도 다리가 길어보인다.
택시기사로 사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는, 시설 좋은 콘도에 3박 4일간 합숙하며 얘기해도 모자란다.
취객(일단 취객은 마이너스 15점 깔고 시작한다.), 막말 손님, 반말 손님, 돈 안 내고 튀는 손님, 길 막히는 곳으로 와서 늦었다며 택시비 깎는 손님, 기사가 치한이라도 되는 것처럼 잔뜩 경계하는 손님, 자기가 목적지를 잘못 말해놓고서 기사가 엉뚱한 곳에 데리고 왔다고 생트집 잡는 손님.
서른살 정도의 이 아가씨는 매너 좋은 숙녀인 게 확실해보인다.
택시 9년의 경력이면 200미터 전방의 사람이 택시를 탈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이 가능하며 50미터 전방쯤에서는 그 손님의 살아온 내력과 직업, 나이 등을 알아낼 수 있다.
택시 문을 열고 탈 때의 몸놀림, 옷 구김 정도, 몸에서 나는 냄새 등을 종합하면 그 손님의 오늘 컨디션은 물론 가치관까지도 맞춰낼 수 있다.
이 정갈한 여자 손님은 시간에 몹시 쫓기는 상태는 아닌 것 같으니 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할 것이고, 그렇다면 난 이 손님을 마지막 손님으로 태운 후 회사로 들어간다면 오늘 일정은 정말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것이다.
아침 시간에 태운 50대 후반의 진상 손님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여의도 KBS 본관 부탁드립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정중하게 목적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니 내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목적지는 정확하게 확인했으니 이제 안전운전만 하면 된다.
이수고가차도를 오르기 위해 출발하려는 순간, 소나타Ⅲ. 아! 요즘에도 소나타Ⅲ가 굴러다니는구나.
내 앞으로 차선을 급하게 변경하더니 급정거를 한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급정거를 할 수밖에.
그 충격으로 손님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급정거했던 소나타(바쁘니까 Ⅲ는 생략)는 다시 이수고가차도 쪽으로 급차선 변경을 하더니 총알처럼 튀어나간다. 미안하다는 표시도 없다.
'뭐하는 거야. 저 시방새가.'
입으로는 손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소나타에게 욕을 한다.
'저 시방새를 잡아서 좋은 소리로 충고를 해줘야 하는데 손님이 있어서 참는다.'
그런데 소나타도 이수고가차도를 지나 올림픽대로로 들어간다.
나와 방향이 같다.
계속 방향이 같다면 옆으로 바짝 붙여서 계도의 말씀 한 방 날려줘야겠다.
올림픽대로에서 시속 100km로 미꾸라지처럼 달리는 소나타를 따라가기 위해 나도 무리한다.
손님이 미간을 찡그리는 게 보인다.
63빌딩 방향으로 들어가려는 차들로 길게 늘어선 여의상류 교차로에서 소나타는 그 행렬을 무시하고 앞쪽으로 쭉 빼더니 끼어든다.
나도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소나타 뒤로 붙어서 끼어든다.
여의도에 들어선 후 윤중로 2차선 도로를 시속 80km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는 소나타는 내가 분명 한 마디 해줘야 하는 거리의 악당이 분명한 것 같다.
여의나루역 삼거리에서 신호에 걸린다.
소나타 옆으로 붙여 한 수 가르쳐주고 싶지만 내 대각선 앞쪽에 소나타가 서는 바람에 다음 번을 기약한다.
소나타 뒷창문 안으로 보이는 운전자는 내 예상을 깨고 여자다.
뽀글뽀글 아줌마 파마를 한 40대 후반쯤 되어보이는 아줌마.
'걸레질을 하다가 왔나. 아줌마가 운전 더럽게 하는군.'
난 보복운전을 하는 게 아니다.
목적지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따라왔다면 보복운전이겠지만 마침 방향이 똑같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상대방 차를 가로막고 내려서 쇠파이프를 휘두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매너 있게 운전하라고 한 말씀 날려주겠다는 것뿐 아닌가.
신호가 바뀌자 역시 레이싱카처럼 튀어나간다.
나도 바퀴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악셀을 힘껏 밟는다.
손님이 무릎을 힘주어 붙이는 게 느껴진다.
여의도 공원 모퉁이 삼거리에서 신호에 걸린다. 하지만 마포대교 남단에서 직진신호를 바로 받고 온 경우 길어봐야 10초 안에 좌회전 신호가 들어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소나타는 1차선, 난 2차선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기 위해 멈춘다.
좌회전 차선을 2개나 할당해주는 이곳에서 소나타와 내가 나란히 서게 된 것은 이 땅의 사회정의를 펼치라는 하늘의 뜻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촌철살인의 따끔한 훈계를 날려야 한다.
창문을 연다.
손님이 있으니 머리 속으로는 '이 시방새야. 너 운전 똑바로 안하면 제 명에 못죽는다.'라고 생각만 하고 입으로는 "이봐, 운전 똑바로 해라."라고 말하려 한다.
내가 "이봐, 운전 똑"까지 말할 때 그 소나타 뽀글이가 나를 쳐다보는데 오른쪽 팔이 모두 문신이고, 껌을 쫙쫙 씹고 있는 얼굴은, 허걱…, 남자다.
'뭐?'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분명 조폭 넘버Ⅲ인 것 같다.
"… 바로 하셔야죠." 하며 말끝을 흐릴 뿐 아니라 목례까지 하고 만다.
좌회전 신호가 들어오고 소나타는 역시 총알처럼 튀어나간다. 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2 ,3초간 출발하지 못한다.
뒷차가 경적을 울려댄다.
손님의 표정이 '거봐. 잘난 척 하더니 쌤통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1분 후면 KBS에 도착한다.
손님에게 미안하고 창피한데 다리는 후들거린다.
손님의 전화벨이 울린다.
"응. 거의 다 왔어. 미안해. … 미안하다구. 30초 후면 도착해. 잠깐만. 저기 세워주세요. 다 왔어. 여기 택시비요."
그 단정한 여자 손님은 거스름돈 200원은 필요 없다는 손짓을 하더니 택시에서 내린다.
그 정갈한 여자 손님이 문을 서둘러 닫는 바람에 미처 내리지 못한 짜증의 끝자락이 열린 창문 틈으로 뒤늦게 빠져나간다.
"제 명에 못 죽는 줄 알았다. 택시가 운전을 얼마나 더럽게 하는지, 시방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