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기술

쾌변을 위하여

by 문기사

조회를 하자마자 인생이 서글퍼졌다.

고작 열여덟 살이었는데.

밑져봐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거짓말을 했다.

"선생님, 저희 외할머니가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대요. 엄마가 오늘 내려가야 한다고 조퇴하고 빨리 오라고 해서 …."

"그래? 외갓집에 가는 거냐? 외갓집이 어딘데?"

"외갓집이 남해, 땅끝 마을이라 …."

"땅끝 마을? 오래 걸리겠네."

"예. 외할머니가 30년을 혼자 사셨거든요."

"그래? 장지는 어딘데?"

"장지요? 예 …. 장지가 …, 장지가 어딘지를 아무도 모르셔서, 제가 부모님께 장지가 어디냐고 여쭤보았더니 남해 근처 …."

"그래? 장례 잘 치르고 와라."

"예."


그렇게 쉽게 성공하다니.

역시 거짓말을 할 때는 상대방이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외할머니가 혼자 사셨다는 것과 땅끝 마을 같은 건 거짓말의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는 신스틸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그 신스틸러 장면에서 냉철함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땅끝에서 30년을 혼자 사시다 가셨으니 선생님도 당신의 어머니 생각에 울컥했을 것이다.

그런데 장지가 뭐지?

'장지'의 뜻을 몰라서 버벅거린 것은 옥의 티였다.


한 달쯤 지난 후 종례가 끝나자 마자 인생이 또 서글퍼졌다.

외할머니 때처럼 3루타는 좀 위험할 수 있어서 간단하게 1루타 정도만 하기로 했다.

지난번 버벅거린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되겠기에 장지는 물론, 발인ᆞ부조ᆞ관ᆞ염ᆞ문상ᆞ수의 등 장례 용어를 공부했다.

"선생님, 할머니가 어저께 돌아가셨는데 내일이 발인이라 엄마가 내일은 학교 결석하고, 산소에 가야 해서 …."

"할머니는 얼마 전에 돌아가셨잖아."

"아! 지난번에 돌아가신 분은 외할머니시고 이번엔 친할머니, 친할머니가 육이오 때 할아버지랑 헤어지셨다가 극적으로 다시 만나신 지 1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 …."

"그래? 행복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것을 , 니가 고생이 많겠구나. 부모님 많이 도와드려라."


오! 예스.

역시 육이오 얘기와 극적인 상봉 얘기는 절묘한 기술이었다.

선생님은 그 짧은 순간에 정말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원래의 거짓말보다 더 거짓말 같은 상황을 만들어 부수적인 거짓말의 진위를 의심하느라 원래의 거짓말에 대한 냉철함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발인'이라는 비범한 단어를 자연스럽게 선택함으로써 지난번 '장지'라는 단어에서 버벅거린 것이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명예 회복까지 하게 된 것은 한국사에 길이 남을 거짓말의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그걸로 나의 고등학교 거짓말은 무사히 끝났다.

그 당시까지 살아 계셨던 할머니들이 오래 사시도록 기도했다.


20년이 지났다.

야구 글러브, 배트, 헬멧, 운동복(시합용과 연습용), 장갑 등 모두 구비하는 데 70만원이 들었다.

평균 이하의 가격으로 마련한 것이지만 아내는 평균 이하의 미련한 짓이라고 할 것이 뻔했기에 조용히 일을 추진했다.


사회인 야구단 청룡.

예전의 프로야구 MBC청룡 구단의 어린이 회 했던 사람들도 여럿 있다.

아직도 MBC청룡의 파란 색 유니폼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장비는 차 트렁크 아래 스페어타이어 넣는 공간에 보관했다.

물론 스페어타이어는 치워버렸다.

운동복은 운동이 끝난 후 세탁소에 맡다.

시합은 격주 일요일마다 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매일 야근에 토요일 출근은 기본이고 일요일도 수시로 출근해야 한다고 주위 사람은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직원이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아내는 내가 격주로 일요일까지 출근해야 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요일 아침 집을 나설 때마다 아내와 딸에게 미안했지만 MBC청룡이 나에게 안겨주었던 희열을 설명해봤자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그냥 달력 보다가 발견한 건데 당신 1, 3주나 2, 4주, 뭐 이런 식으로 출근하는 게 아니고 정확하게 격주 일요일에 출근을 하더라. 일요일에 출근하는 수당은 제대로 나와? 일요일엔 회사 식당 문 열어? 점심은 어디서 먹어? 당신네 부서 사람들 전부 다 나와? 부장님도? 당신네 회사 사람들은 전부 다 일요일도 출근해? 일요일까지 출근하면 다른 사람들은 불만 없어? 있을 텐데. 주로 뭐라고 불평해? 일요일은 회사 갔다 오면 왜 얼굴이 까맣게 타서 들어오는 거야?"


자칫 발각될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상대방의 집요한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 조금 버벅거리더라도 고등학교 때 이미 익힌 거짓말의 기술들을 마구 섞은 후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려서 흥분하게 하거나 동정심을 유발시킨다면 거짓말의 본질은 흔적도 없이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장님이 당뇨가 좀 심해지셔서, 아직 40대인데 당뇨가 말이 되니? 일요일에도 정문 쪽 식당은 운영을 하거든, 거기서 밥 먹고, 전부 다 나오는 건 아닌데, 난 앞으로 한 2년 정도 더 열심히 해야, 승진도 해야 우리 세 식구 먹고 살고, 경쟁도 심하고, 부장님이 점심 식사도 안 하시고 몸이 안 좋다고 일찍 들어가셨는데 오후에 입원을 했다고 연락이 와서, 당뇨가 그렇게 갑자기 입원을 할 병인가 생각했는데, 어쨌든 수당이 문제가 아니고 일단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완수를 해야 하는데, 요즘 20대 젊은 사원들은 일요일에 회사 나오라면 어떻게든 안 나오려고 해서, 내가 그 나이 땐 지금보다 더 심했거든, 당신이랑 결혼하기 전에도 맨날 야근하고, 일요일에도 출근하느라 데이트도 제대로 못 하고 …."

거짓말을 할 때 상대방의 집중을 흐리게 만드는 건 좋지만 말이 길어지면 결과적으로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스스로 변명하고 있는 꼴이 되므로, 거짓말은 무조건 짧은 문장으로 끊어야 한다.

그런데 오랜만에 기술을 구사하려니 몸이 안 풀렸나 보다.

역시 기술은 꾸준히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회사 간 거 맞아? 당신 고등학교 때 친할머니랑 외할머니 두 분 다 일찍 장례 치렀다며? 어머님이 다 얘기해주시던데. 담임 선생님이 또 그러면 가만 안 놔두려고 했는데 다행히 두 번에서 끝나서 그냥 넘어갔었다고 하셨다던데."


헉!

20년 전 얘기를 왜?

나의 거짓말의 기술을 능가하는 고단수의 기술에 크게 한 방 얻어맞고 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일단 상대방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어서 기선을 제압하는 신기술 같았다.

아내는, 회사를 갔는지 여부를 살짝 건드렸지만 그 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일요일에 회사 대신 야구장 가는 걸 아내가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그걸 모르겠으니 다음 일요일에 뭐라 말하고 나가야 할지 고민이다.

차라리 이쯤에서 위로 토하든 아래로 배설하든 처리해야 하는데 계속 끌어안고 있으니, 이러다가 숙변이 될 것 같다.


이렇게 가만히 내버려두는 건 또 무슨 신기술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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