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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기사 Dec 14. 2015

찌개의 유래

1987

빙겔리씨는

아무 생각이 없는 남자였다.

재산을 모두 잃어버려도 아무 생각이 없었고 상처도 받지 않았다.

우산, 모자, 신발 등 그의 소지품을 잃어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이 빼앗아가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도망을 가도, 그의 아이들을 다른 사람들이 빼앗아가도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빙겔리씨가 어느날 길을 가고 있었는데 머리가 땅바닥에 툭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가 "빙겔리씨, 당신 머리가 없네요!"라고 말하는데도 그는 머리 없이 마냥 걷기만 했다.

(후략)

<정말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

로베르트 발저 글, 캐티 벤트 그림



해마다 3월이면 과 연합 엠티가 있다.

그때야 뭐 대성리 아니면 새터였다.

대학교 2학년 때 우리 과는 새터로 연합 엠티를 갔다.


모든 프로그램이 끝나고 밤이 깊어 술판이 벌어졌다.

당시 엠티 술자리라는 게 다 그랬지만, 방 안에 열댓 명 정도씩 둘러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시다가 서너 명은 바람 쐬러 밖으로 나가서 다른 방으로 들어가 그곳에 정착하기도 하고 술을 못 이겨 한두 명씩 그대로 뒤로 쓰러져 잠들기도 하고….


3학년 현주 선배의 음식 솜씨는 과연 명품이었다.

우리들의 가방에 들어 있던 각종 재료와 양념들을 모두 모은 후 창의적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현주 선배와 한 방에서 술자리를 벌인 걸 몹시 만족하고 있었다.

그날 현주 선배가 만들어준 ' 찌개'(우리가 즉석에서 붙인 이름)는 전무후무한 맛이었다.

잘게 썬 깻잎과 반으로 자른 마늘, 그리고 기름을 뺀 치를 적당히 볶은 후 어떻게 어떻게 해서 만든 건데 정말 맛있었다.

우리는 그 찌개 덕분에 과식에 과음을 주저하지 않았다.


노래와 이야기가 찌개의 맛처럼 점차 수그러들 무렵 곯아떨어지는 학우들이 늘어났다.

난 취하지 않으려고 조절하면서 마시느라 끝까지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학우들의 이불을 덮어주기도 하고 술자리를 주섬주섬 정리하기도 했다.

거의 마지막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 많이 마셨다.

잠을 자다가 답답하고 거북해서 몸을 일으켰다.

순간 배 밑에서부터 목구멍 밖으로 음식물들이 하수관 터진 것처럼 밀려나왔다.

방바닥에 있는 찌개냄비를 급히 들어서 나의 식도를 막고 있던 토사을 모두 쏟아냈다.

개운했다.

뚜껑을 단정하게 덮어 깔끔하게 후처리를 했다.

다시 잠들었다.

편하게 잘 잤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대여섯 명의 학우들이 둘러 앉아 버너 위에 끓고 있는 찌개를 떠먹어가며 맛있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정신이 퍼뜩 든 난 내 발치에서 맛있게 찌개를 먹고 있던 상훈이에게 물었다.

"상훈아, 그 찌개 뭐냐?"

"응. 남아 있던 거 다시 끓였어. 밥은 내가 했다. 아! 시원해. 일어나서 먹어."

"…."

"이게 어제 먹었던  찌개랑은 또 다른 맛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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